PDF문서한국전통문화연구18_1_김남석_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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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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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김남석 부경대학교 국문과 교수

Ⅰ. 문제제기와 연구사 검토
Ⅱ. 기존 연구에서 반복된 ‘폭포’ 관련 진술과 

연극사적 논란

Ⅲ. <명기 황진이>의 실제 무대 복원과 디자인

에 대한 분석

1. 구획된 공연 공간과 엇갈린 시선 효과
2. 무대 분할과 서사 진행을 추동하는 숨

은 동력으로서의 물

3. 남녀의 만남과 이별, 그 동선(動線)으

로서의 무대

4. 무대 세트의 가감/ 변형과 공간 배경

의 이동/ 변모

Ⅳ.  <명기  황진이>  무대  장치의  정점으로서 

‘폭포’와 ‘흐르는 물길’의 기원

Ⅴ. 동양극장의 <명기 황진이>의 탄생 과정과 

무대화의 진의(眞義)

국문초록

1936년 8월 동양극장 청춘좌는 박종화 원작, 최독견 각색, 박진 편극․연출의 

<명기 황진이>를 공연하였다.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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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호

무대 장치 가운데 구룡폭포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 하지만 <명기 황진이>에 금강

산 구룡폭포가 등장하는 것은 극적 정황에 부합하지 않는다

. 그럼에도 구룡폭포를 

주장한 고설봉의 증언에 의해

, <명기 황진이>는 구룡폭포로 인해 공전의 인기를 끈 

작품으로 한국 연극사에 기록되었다

. 하지만 관련 사진 자료를 수집하고, 원작과 비

교 작업을 시행하면서 당대의 회고와 증언을 종합하면

, 이 작품에 설치된 폭포가 구

룡폭포가 아니라 박연폭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더구나 폭포와 관련된 무대 

장치의 미학적 효과를 확인하고

, 이러한 무대 미학이 서사의 미학과 융합하여 공연 

미학으로 발현되는 양상을 재구할 필요가 있다

. 본 연구는 이러한 무대 장치에 대한 

의구심에서 출발하여

, <명기 황진이>의 공연 양상과 그 미적 특성을 살피고, 이러한 

미적 특성이 발현되는 이유를 공연 전반에서 찾고자 했다

.

주제어

 동양극장, 청춘좌, 박진, 박종화, <명기 황진이>, <삼절부>, 구룡폭포, 박

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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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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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제제기와 연구사 검토

한국 연극사 연구에서 

‘동양극장’의 중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지만, 

이러한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동양극장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한 수

준에 도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 그것은 동양극장 관련 자료가 연구를 

진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기존 인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 하지만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관련 연구를 진

행시켜왔고

, 그 결과 동양극장 역사와 실체의 상당 부분을 해명하는 데

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이러한 고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 동양극장 관련 연구에서 보완

할 점 역시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그것은 선행 연구를 일별하면 더욱 분

명하게 확인된다

. 일단, 지금까지 동양극장 연구는 주로 동양극장의 외

적 사실

(역사와 관련 정보)을 밝히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 자

료 부족으로 인해 불가피한 점도 없지 않지만

, 공연 레퍼토리2와 해당 

작가 연구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음을 한계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 선행 연구들은 동양극장을 이해하는 

범위를 확대하고

, 후속 연구3를 촉발하는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했다는 

1

장혜전

, 「동양극장 연극에 대중성」, 뺷한국연극학뺸 19권, 한국연극학회, 2002, 5~42쪽.

2

김미도

, 「1930년대 대중극 연구-동양극장 대표작을 중심으로」, 뺷어문논집뺸 19권, 민족

어문학회

, 1992, 285~316쪽; 최지연, 「동양극장의 인기 레퍼토리 연구」, 뺷한국문화기

뺸 3권, 한국문화기술연구소, 2007, 145~163쪽 참조.

3

전지니

, 「1930년대 가족 멜로드라마 연구」, 뺷한국근대문학연구뺸 26집, 한국근대문학회, 

2012, 95~131쪽; 백현미, 「소녀 연예인과 소녀가극 취미」, 뺷한국극예술연구뺸 35집, 한국
극예술학회

, 2012, 81~124쪽; 이광욱, 「기술복제 시대의 극장과 1930년대 ‘신극’ 담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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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18호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 다만 향후 진행된 동양극장 관련 연구에

서 새롭게 보완해야 할 점을 자연스럽게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참조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보완 사항 중 하나가 무대미술 분야이다

. 동양극장 공연은 무

대미술팀에 의해 철저하게 준비되는 공연이었지만

, 후대의 연구는 이

러한 시스템에 대해 적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못하다

. 동양극장 무대미

술 관련 연구라고 한다면

, 원우전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고,4 원

우전 연구에서 동양극장의 대표작이 언급되는 정도

5에 머물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선행 연구의 공백을 인지하고 기존 연구에서 혼란

을 일으키고 있는 동양극장 무대미술 분야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구상

되었다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본 연구에서는 동양극장의 자랑거리이

지만 동시에 논란거리이기도 했던 무대미술의 한 측면을 짚어 보는 것

으로 이러한 선행 연구에 대한 보완책

(중 일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 동양극장의 무대미술은 관련 자료가 워낙 희소하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설봉의 증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1930년대 동양극장의 배우로 활약했던 고설봉은 동양극장에 대한 상

세한 회고

(증언)를 남겨 동양극장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후대의 학

자들에게 해당 극장을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 하지만 저

술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술과 사실이 누락되었고

, 오기와 오해 혹은 

전개」

, 뺷한국극예술연구뺸(44집), 한국극예술연구, 2014, 49~99쪽.

4

김남석

, 「최초의 무대미술가 원우전」, 뺷인천학연구뺸 7호,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2007, 

211~240쪽; 백두산, 「우전(雨田) 원세하(元世夏), 조선적 무대미술의 여정-원우전 무대
미술 연구 시론」

, 뺷한국연극학뺸 56권, 한국연극학회, 2015, 365~405쪽.

5

김우철

, 「한국 근대 무대미술의 고찰」,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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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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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오와 오류 역시 적지 않게 양산되었다

. 비록 누락이나 오류로 단정하

지는 못 할지라도 ― 고설봉의 주관적 견해나 연극적 편향성으로 인해

그가 남긴 기술 중에는 고설봉의 사견이 마치 객관적 사실인양 기재

된 부분도 상당하다

.

그 결과 고설봉의 

뺷증언 연극사뺸는 분명 유용한 자료임에는 틀림없

지만

, 그렇다고 해도 해당 저술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신뢰하여 수용하

는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 뺷증언 연극사뺸를 올곧게 파악하고 학문적

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 다른 자료들과 교차하여 검증해야 할 소임이 

후대에 넘겨진 셈이다

.

본 연구는 이러한 

뺷증언 연극사뺸의 증언에서 연원한다. 그 대목을 찾

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이 대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고설봉은 

원우전이 더운 여름날 시행된 한 공연

(<명기 황진이>)에서 창의적인 아이

디어를 발휘하여 폭포를 설계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한여름에 공연을 할 때였다

(1936.8.1 박종화 작 최독견 각색 <명기(名妓) 

황진이

>). 날도 덥고 하니까 따분한 무대를 보여주느니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무대장치로 꾸미기로 했다

. 우선 재목을 두 마차 실어 와서 금강산을 장치

하고 긴 호스를 사다가 극장 담 밖의 소방호수에 연결시켰다

. 그걸 무대 위

쪽에 가져다놓고 물을 튼 것이다

. 무대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고 물이 흐르

도록 했는데

, 무대 밑에 가 있던 몇 사람이 흘러내린 물을 계속 밖으로 퍼

내야 했다

. 이 장치는 원우전 디자인, 김운선 제작으로 동양극장의 도구사 

십 여 명이 총동원되어 만들었던 것이다

. 이 장치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 막이 올라가고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객석에서는 일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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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8호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 관객들은 장치만 보고 가도 입장료가 싸다며 즐

거워했다

. 나중에는 유리 공장에 가서 비틀린 유리 제작해다가 전기 시설

을 접속시켜 조명 효과까지 덧붙였다

. 장치를 움직이는 세트맨들의 장면 

전환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 관객들의 신용을 획득하기 위한 동양극장

의 노력은 이렇게 필사적인 것이었다

.6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이 고설봉의 증언은 중대한 논란을 남겨 놓았다

. 우선, 고설

봉은 원우전이 무대 미술에 대해 자기주장

(자율성)이 강하고 독립적으

로 작업

(무대디자인)을 수행했다는 또 다른 증언을 남겼는데

,7 이로 인해 

마치 위 구룡폭포가 

<명기 황진이>에 삽입된 독립적 무대디자인일 수 

있다는 오해가 파생되어 연구자들 중심으로 폭넓게 용인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위의 진술을 참조하면서

, <명기 황진이>와 ‘구룡폭포’라는 

이질적인 연결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기보다는 그만큼 무대 디자인 

분야에서의 획기적이고 자율적인 작업이 그 결실을 맺은 사례로 이해

하고 말았던 것이다

. 황진이의 주요 활동 공간이 ‘송도’였음에도 불구하

, 금강산이 작품의 무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선입견을 심은 것은 

의외의 결과라고 하겠다

.

결과적으로 

<명기 황진이>의 대본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설

봉의 증언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 후대의 여러 연구와 논문 집

필에서 귀중한 참조 사항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이러한 증언의 

사실성은 점점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 관련 연구가 진행되자 새로

6

고설봉 증언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59쪽.

7

고설봉 증언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137~13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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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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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사실과 주장들이 연계되면서 오류일 가능성이 스스로 증가하였다

결국 고설봉의 증언은 당시 상황이나 제작 의도와 상치되는 결과를 낳

았다는 가정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에 

<명기 황진이>를 올곧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필요해졌으며

, 원작과의 관련성과 사진 자료를 통한 무대화 과

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당위성 또한 증가했다

. 본 연구는 이

러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인정하고

, 연극사적 논란을 해결할 목적과 

<명기 황진이>의 실체를 논구할 목적 하에 구상 집필되었다. 

Ⅱ. 기존연구에서 반복된 ‘폭포’ 관련 진술과

연극사적 논란

앞에서 살펴 본 대로

, 고설봉은 뺷증언 연극사뺸에서 <명기 황진이>의 

무대장치가 구룡폭포라고 기술했다

.8 고설봉이 ‘구룡폭포’ 무대장치를 

동양극장 시절의 것으로 진술하는 바람에

, 구룡폭포는 이후 연극사(기

)에서 혼란과 착오를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고 만다

. 하지만 <명기 황

진이

>에 물이 흐르는 장치와 폭포가 설치된 점은 사실일 수 있지만, 다

음의 증언과 기록들을 참조하면 

<명기 황진이>의 무대 배경이 구룡폭

포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조심스럽게 타진되어 왔다

8

고설봉 증언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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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8호

연극에서 무대미술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또 극단이나 극장 측에서도 무

대미술에 상당한 신경을 썼고 많은 비용도 감수했다

. 대중연극의 메카라 

할 동양극장에서 특히 무대미술에 힘을 기울였다

. 동양극장이 전성기를 

누릴 때는 무대를 현실과 일치시킬 만큼 장치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 즉 금

강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 

<견우와 직녀>의 무대의 경우 구룡폭포를 실감

나게 보여주기 위해서 바닥을 뚫고 소방호수로 천정으로부터 물을 쏟아지

게 한 적이 있다

. 이는 마치 서구근대극 초기의 무대장치를 연상시키는 것

이다

. 이는 마치 푸줏간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사다가 그대로 무

대 위에 걸어놓은 적이 있었다

. 리얼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세련된 작품일 수 없다

.9

위의 대목은 유민영이 구룡폭포의 무대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 유

민영은 구룡폭포의 무대가 

<견우와 직녀>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동양극장은 

<견우와 직녀>를 공연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유민영은 자

신 있게 

<견우와 직녀>가 동양극장에서 공연되었다고 주장했다. 더욱 

의아한 것은 동양극장에서 일어났다는 위의 공연 상황이 고설봉이 증언한 

<명기 황진이>의 ‘구룡폭포’의 무대 상황과 일면 유사하다는 점에 있다.

한편 유민영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최상철의 견해로도 인용된다

. 최

상철은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를 보면) 금강산을 배경으로 했던 <견우와 직

>를 위한 무대장치에서는 실제로 구룡폭포를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

하여 소방 호수로 천장에서 물을 쏟아 부었

”10다고 기록하고 있다. 

9

유민영

, 「무대미술의 사적고찰」, 뺷미술세계뺸 74, 미술세계, 1990, 135~136쪽.

10

최상철

, 뺷무대 미술 감상법뺸, 대원사, 2006,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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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15

그런데 최상철은 이두현의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에서 위의 구절을 인

용했다고 표시했다

(유민영의 저술이 아니라)

. 실제로 이두현의 책에는 한 

관련 삽화가 실려 있고

, 마치 동양극장의 공연 작품인 것처럼 ‘창작무

대 금강산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어 이러한 착오를 가중시키고 있다. 

구체적인 사진 자료로 아래에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에 수록된 무대 관련 

삽화를 인용하고자 한다

.11

이러한 일련의 연극사적 기술에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 앞에서도 말한 대로 동양극장이 상연한 작품 중에는 <견우와 직

>라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적어도 일제 강점기 공연 

11

본 연구에 앞서

, 이두현의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에 삽입된 원우전 무대 스케치의 문제적 면

모를 다음 논문에서 일부 소개한 바 있다

(김남석, 「새롭게 발굴된 원우전 무대 스케치의 

역사적 맥락과 무대미술의 특징에 관한 연구」

, 뺷한국연극학뺸 56호, 한국연극학회, 2015, 

336쪽).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되, 원우전의 무대미술사적 대표작 <명
기 황진이

>에 관련된 논란과 의의를 집중적으로 규명할 목적으로 새롭게 발굴된 사진 자

료를 중심으로 동양극장 무대미술의 일단을 논구하고자 했다

.

12

이두현

,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 민속원, 2013, 322쪽.

<그림 1>

뺷한국 신극사 연구뺸에 수록된 무대 관련 삽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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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8호

연보에서는 

<견우와 직녀>라는 작품을 동양극장에서 공연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

둘째

, 이 <견우와 직녀>를 차범석의 1958년 작품이라고 인정해도, 

이 작품에 구룡폭포 무대장치가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왜냐

하면 현재 남아 있는 대본

(원작을 후대의 수정한 판본으로 판단 됨)에는 금강

산의 

‘상팔담’이 아니라 ‘만폭팔담’이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13 지리적으로 볼 때, 구룡폭포는 외금강에 위치하고, 만폭팔

담은 내금강에 위치하므로 아무래도 만폭팔담과 구룡폭포를 직결시켜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한다

.

셋째

, 후대 ‘구룡폭포’ 관련 진술은 아무래도 고설봉의 증언(뺷증언 연

극사

)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인다

. 왜냐하면 현재 남아 있는 <명기 황진

> 자료를 보면, 4막 공간에 설치된 ‘폭포’에서 위의 진술이 유래되었

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그럴 경우 구룡폭포가 아닌 

‘박연폭포’(황진이와 서화담과 함께 송도삼절에 속하는)이거나 송도의 다른 폭

포가 되어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 즉 ‘구룡폭포’에 대한 진술은 처음부

터 착오였고

, ‘박연폭포’류의 폭포가 <명기 황진이> 무대에서 구현된 

폭포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유민영의 기술에서 

<견우와 직녀>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했다

는 사실과

, 이 무대장치를 한 사람이 동양극장에서 활동할 만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

, 그리고 동양극장의 <명기 황진이>에 폭포가 등장하

기는 하지만 후대의 착오에 의해 금강산의 폭포와 혼동될 가능성이 농

13

<견우와 직녀>의 최초 공연 대본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이 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 하지만 2016년 현재 이 대본의 소장자는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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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17

후하다는 사실 등을 단편적으로 수용하여 참조할 수는 있겠다

. 또한 초

창기 한국 연극에서 이러한 무대미술상의 효과는 긍정적이든 부정적

이든 충격적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유민영과 최상철은 이러한 효

과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펼쳤다

)

.

금강산과 구룡폭포

, <명기 황진이>와 <견우와 직녀>, 동양극장 공연

과 창극단 공연

14

 등이 혼재되면서, 이후 ‘구룡폭포(혹은 박연폭포)’를 둘

러싼 공연사적 실체가 혼란을 겪게 되었다

. 2015년에 발굴된 원우전의 

무대 스케치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바 있다

원우전의 스케치는 원우전이 일찍부터 금강산 스케치를 무대 디자인의 

핵심 아이디어로 도입하였고 이를 활용하여 동양극장의 무대 디자인을 

구상한 바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15 또한 

이러한 무대 스케치가 

1950년대 이후 남한의 연극(특히 여성국극)에 중요

한 무대 디자인으로 변형 수용하였다는 사실 또한 시사해주었다

.

이 과정에서 

‘금강산 폭포(구룡폭포)’가 <견우와 직녀>의 폭포로 수용

되었고

, <명기 황진이>에서의 ‘폭포’는 근본적인 아이디어가 이와 연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암시를 얻을 수 있었다

. 다만 이에 대

한 명확한 정리가 완결되지 않아서

, 한국연극사의 실상과 의문을 밝혀 

줄 단서를 제공하는 정도의 역할에 만족했다고 해야 한다

. 본 연구는 이

러한 의문과 논란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연극사적 혼란을 해결하고자 

여타의 자료를 활용하여 진실에 대한 논리적 추론을 수행하고자 한다

.

14

<견우와 직녀>는 창극단에서 공연한 작품이다.

15

김남석

, 「새롭게 발굴된 원우전 무대 스케치의 역사적 맥락과 무대미술의 특징에 관한 

연구」

, 뺷한국연극학뺸 56호, 한국연극학회, 2015, 329~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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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18호

Ⅲ. <명기 황진이>의 실제 무대 복원과

무대 디자인에 대한 분석

<명기 황진이>가 구룡폭포를 무대장치로 활용한 작품이었다는 고설

봉의 증언은 증빙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근대연극사의 중요한 증

언으로 수용되었다

. 그런데 <명기 황진이>의 무대 사진이 발굴되면서, 

이러한 증언과 추정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 그것은 동시

에 기존 연구와 관점 그리고 기술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

1. 

구획된 공연 공간과 엇갈린 시선 효과

<명기 황진이>의 오프닝 장면에서 무대의 구조는 <그림 2>와 같다.
<명기 황진이>의 서막 사진을 보자. 일단 무대는 물리적 공간상으로 

크게 두 개로 나누어진다

(upstage / downstage)

. 무대 뒤 편(upstage)에는 

다리가 배치되어 있는데

, 이 다리로 인해 무대 앞 편(downstage)과 높이 

차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 다리는 ‘송도 광화문 밧(밖) 병부다리(병부

)

’로 설정되었고,16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는 공간(DC)이 다리(UC)와 

16

이 

‘병부교’는 <명기 황진이>의 원작에서 설정한 공간적 배경이다(박종화, <황진이의 역

>, 뺷월탄박종화문학전집뺸 11권, 삼경출판사, 1980, 294쪽 참조; 박종화, <삼절부>, 뺷한

국작가출세작품전집

뺸 (1), 을유문화사, 1976, 25~26쪽 참조). 본 연구에서는 박진의 기

록과 

뺷매일신보뺸 신문 기사의 기록을 참조하여(「여름의 바리에테(8)」,  뺷매일신보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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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19

자연스럽게 분리되었다

.17

당시

 무대 설명에 따르면, 무대 뒤로는 ‘멀리 만월대의 울창한 송림’

이 배치되었고

, 계절적 배경은 봄으로 설정되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

고 남녀가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풍광을 연출하기에 적당한 시

1936.8.7, 3쪽 참조), <명기 황진이>의 원작을 박종화의 소설 <삼절부>(후대의 개작본 
<황진이의 역천>)로 전제한다. 이 원작의 설정을 인용할 시에는 ‘박종화 전집’ 형태로 
1980년 삼경출판사에서 발간된 <황진이의 역천>을 기저 판본으로 삼았으며, 1976년에 
발표된 

<삼절부>는 이 기저 판본과의 비교를 통해 주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다. 

17

무대에서 연기 영역은 크게 

9등분으로 이해되고 있다(한국문화예술진흥원, 뺷연기뺸, 예

, 1990, 46~47쪽 참조). 이 글에서는 무대 9등분 구획을 수용하여 필요할 때마다 약칭

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

관객(석) 시선(을 통해 본 무대 분할도)

UR(upstage right)

UC

UL(upstage left)

RC

C(center)

LC

DR(downstage right)

DC

DL(downstage left)

18

서막의 내용과 무대 사진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했다

(「여름의 바리에테(8)」, 뺷매일신보뺸, 

1936.8.7, 3쪽 참조).

<그림 2> 서막 ‘송도병부교하(松都兵部橋下)’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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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8호

점이었다

. 원작에 따르면, 봄이 오자 순박한 처녀들이 봄옷을 만들려는 

의도로 빨래터로 모여들었는데

, 이때 소과사마방(小科司馬房)에 급제하

여 진사에 오른 

‘황소년’이 병부교를 지나가게 된다.19 처녀들이 빨래터

로 모여들고

, 소년 재사의 발걸음이 거리로 나오는 시점을 ‘만남의 시

’으로 삼은 것이다. 

왼쪽 언덕으로 황소년이 나타났습니다

. 양반의 아들다운 위엄 있고 천

천한 걸음

(으로) 다리를 건너서 잠깐 뒤를 돌아보소 발음 멈추고 섰습니

. 무대 바른편으로 서사(序辭) 읽는 사람(심영 분)이 나타나서 황소년과 

현금의 연분 그리고 황진의 일생을 암시하는 서사를 읽습니다

. (…중략…) 

서사가 끝나자 다리 밑에서 빨래하는 처녀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황소

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가슴을 안으며 

“아이 참 잘 두 생겼다” (…중

략…

) “이제 그만 들어가자” “그래 넌 안 갈련?” 한 사람의 처녀가 현금(왼

쪽에서 빨래하는 처녀

)을 바라보고 뭇습니다.20

병부교 위로 나타난 남자가 

‘황소년(황철 분)’인데, 그는 미래에 ‘황진이

의 부친

’이 되는 인물이다. 반면 다리 밑에는 빨래를 하는 처녀들이 등장

하는데

,21 박진은 이 빨래하는 처녀들을 ‘표랑(漂娘)으로 지칭했다.22 무

19

박종화

, <황진이의 역천>, 뺷월탄박종화문학전집뺸 11권, 삼경출판사, 1980, 294쪽 참조.

20

「여름의 바리에테

(8)」, 뺷매일신보뺸, 1936.8.7, 3쪽.

21

연출가 박진은 총 네 명의 표랑을 무대에 기용했고

, 표랑 1을 남궁선, 표랑 2를 한은진, 표

랑 

3을 김소영이 맡았으며, 외따로 떨어져 빨래를 하는 표랑 진현금 역을 차홍녀가 맡았

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진,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6쪽 참조). 하지만 실제 무대에서 표랑은 세 사람이었고, 이 세 표랑 중에는 두 처
녀와 마주 앉아 홀로 빨래를 하는 현금이 포함되어 있었다

.

22

원작에서는 

‘표랑’의 한자를 ‘漂浪’으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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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21

리를 지어 빨래하는 

2명의 표랑이 황소년을 연모하게 되는 처녀들이고, 

외따로 떨어져 빨래하는 처녀가 황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여인이다

.

외따로 떨어진 처녀

23는 처음에는 황소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빨

래만 하는 여인으로 설정되는데

,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황소년

의 관심을 끌게 되고

, 결국에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사이가 된다. 

황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이 여인이 

‘(진)현금’(차홍녀 분)으로 미래에 ‘황

진이의 모친

’이 되는 인물이다. 

무대 정황을 세부적으로 파악해 보자

. 황소년이 다리 위로 지나가면, 

정황상 두 처녀는 황소년의 풍모를 흠모의 시선으로 쳐다보게 된다

. 황

소년의 동선

(upstage에서 이동)이 

UR(오른쪽)에서 UL(왼쪽)로 이동하면, 처

녀들

(‘downstage’ 혹은 ‘LC에 인접한 Center’에 위치)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

’을 바라보게 되므로, 두 인물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

게 된다

. 또한 황소년의 위치와 처녀들의 위치는 무대의 높낮이 차에 

의해 명확하고 간결하게 나누어지므로

, 처녀들의 연정을 담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러러 보는 각도’(카메라의 low-angle shot, 앙각(仰角))를 형성

할 수 있었다

. 앙각은 피사체를 크게 보이도록 유도하여 대상을 흠모하

고 존중하는 느낌을 형성한다

.24

하지만 이러한 처녀들의 연정에도 불구하고 황소년의 시선은

, 오히

려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진현금을 주목하게 된다

. 처녀들의 반대편에 

위치한 진현금은 무대상에서 

RC에 인접한 중앙에 위치하게 되면서, 황

23

위의 기사에서는 이 처녀의 위치를 

‘왼쪽’으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객석에서 바라볼 때 

방향을 의미하므로 이 논문에서 사용하는 무대상의 위치로 환원하면 오른쪽

(right)에 해

당한다

24

죠셉 보그스

, 이용관 옮김, 뺷영화보기와 영화읽기뺸, 제 3문학사, 1991, 144~14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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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18호

소년의 시선을 연극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지하지 못하는 자리를 확보

하고 있다

. 그러니 황소년의 시선이 계속해서 진현금을 향하는 것이 가

능해진다

. 그러다가 두 처녀가 퇴장하고 난 이후에 진현금과 황소년은 

무대 아래에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 따라서 시선 

교환은 처녀들이 보내는 시선과 황소년이 진현금에게 보내는 시선이 

엇갈리면서 조성된다고 하겠다

.

<삼절부>에서 이 부분을 참조해도, 황소년과 진현금의 만남이 엇갈

린 시선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황은 어린 듯 저도 모르게 나귀 등에서 선뜻 내려 걸음을 멈추고 돌난간

에 기대서서 시냇물을 굽어본다

. 황이 이렇게 다리 아래를 내려다볼 때 저

편에서도 이편을 바라다본다

. 세상일을 좋게만 보는 성(性)이 싹트는 소년소

녀들이었다

. 검은 갑사복건에 옥색도포를 입고 나귀 등에 우뚝 탄 미소년

을 볼 때 굴리지 않으려는 처녀들의 추파는 어느덧 소년의 몸으로 옮겨진다

.

“참 잘 생겼다.”

“옥골선풍이 바로 신선 같다.” (…중략…) 

버들 밑에는 단 하나 동무도 없이 빨래만 흔들고 있는 처녀가 하나 있었

. 황은 한 식경이나 이 여자에게 눈을 보냈다. 대꾸하는 추파를 받으려 그는 

애를 썼으나 저편에서는 옆도 보지 않았다

. (…중략…) 해가 저무니 빨래꾼

들은 하나씩 둘씩 다 돌아갔다

. 다만 한 사람 수양버들 밑에는 어여쁜 아까 

그 처녀가 남은 빨래를 짜고 있었다

“여보, 길가는 사람이오. 목이 마르니 물 한 박만 주구료”25(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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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23

위의 설정은 

<명기 황진이>의 설정으로 치환되어 표현되었다. 다만 

<명기 황진이>에서 구체적인 사건을 엮어 사건을 진행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부딪치는

(대면하는)

 시선을 따라 암시적으로 사건을 진행시키는 

방식을 먼저 도입한 점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원작에서 인물들의 시선은 위

/ 아래, 이편/ 저편으로 교차되며 선망

과 호기심을 담아내기 시작하고

, 급기야는 성(性)적 의미를 담은 야릇한 

시선까지 포함하게 된다

. 연극 <명기 황진이>는 이러한 시선의 교차와 

서사의 흐름을 병부교 높이를 활용하여 연극적으로 표현하였고

, 이를 

관객들에게 시각적 장면으로 공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냇물을 바라보는 황소년의 시선’ →‘황소년을 바라보는 

처녀들의 시선

’ →‘진현금을 주시하는 황소년의 시선’ →‘황소년의 시선

을 인지하지 못하는 진현금의 태도

’가 서로 엇갈리면서 무대 공간에는 

엇갈린 시선의 동작선이 생겨난다

. 이러한 동작선은 때로는 신체적 움직

임과 어울리면서 연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 결국 엇갈린 시선은 황소년이 

아래로 이동해서 직접 진현금을 찾아오는 설정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

황소년의 접근이 극적 효과를 발하기 위해서는 그의 진중성이 먼저 

제시되어야 했다

. 서두에서 황소년은 과거에 급제한 젊고 뛰어난 재사

로 등장하여

, 그에 걸맞은 행동 양식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때 황소년

의 걸음걸이는 느리고 침착하게 연기되어야 한다고 주문되었다

. 이 작

품에서는 황진이가 양반 출신이라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는데

, 이러한 

특징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부친인 황소년부터 양반이었다는 

(출신)이 부각되어야 했다

25

박종화

, <황진이의 역천>, 뺷월탄박종화문학전집뺸 11권, 삼경출판사, 1980, 295~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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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18호

황소년과 대화를 나누는 처녀들도 원작의 설정에 따라 크게 두 부류

로 나뉘었다

. 하나는 황소년을 흠모하여 쳐다보는 처녀들이고, 다른 하

나는 빨래에 심취하여 처음에는 황소년을 인지하지 못하는 여인이다

후자의 여인은 하수 쪽에 위치한

(DR)

 처녀인 ‘(진)현금’으로, 친구들이 

빨래터를 떠나자 돌아온 황소년과 만나 가약을 맺는 여인이다

. 이 진현

금의 딸이 황진이인 셈이다

.

이로 인해 여인들의 영역인 

Donwstage는 진현금/ 처녀들의 영역으

로 분리되는데

, 여기에 또 하나의 분리 요소가 개입한다. 그것은 처녀

들과 서사 역의 분리에서 연원한다

. 박진에 따르면 서사 역을 맡은 배

우는 심영이었는데

, 무대상에서 심영의 위치는 무대 왼쪽 전면(‘DL’, 객

석에서 바라보았을 때 박진이 묘사한 

‘바른편’에 해당)이었다

.

심영은 박진이 연출한 작품에서 

‘서사’ 역할을 맡은 전력이 있었는데, 

그 작품이 토월회 

1920년대 대표작 <아리랑고개>였다. <아리랑고개>

황철 분

왼쪽 여인 진현금

(차홍녀 분)

심영 분

<그림 3> 황소년의 위치와 걸음걸이

<그림 4> 처녀들의 배치와 빨래 연기

<그림 5> 서사의 모습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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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25

에서 심영은 백 도포

, 백 띠, 통천관, 마른 신을 착용한 노인으로 분장하

여 등장한 바 있었다

. 특히 주목되는 바는 ‘커다란 책’을 들고 등장하여 

무대 중앙에서 서서 서사

(序詞)를 읽는 행위였다

.26 위 공연 사진에도 이

러한 차림새와 유사한 서사가 등장하고 있다

. <명기 황진이>에서 서사 

(심영 분)은 역시 흰 도포에 흰 띠를 매었고

, 갓을 쓰고 양반의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 물론 커다란 책에 해당하는 문서(책)을 들고 

있는 모습도 흡사했다

.27

사실 서사의 모습만 유사한 것이 아니었다

. <명기 황진이>와 마찬가

지로 

<아리랑고개>에서도, 수양버들 아래 처녀들이 등장하여 빨래를 

하는 장면

(서사 장면과 함께)으로 막이 올랐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 구

체적으로 말하면

, 박진은 <아리랑고개>의 오프닝 씬에서 처녀들이 ‘빨

래 방망이질을 하기도 하고 헹구기도 하고 쥐어짜기도

’ 하는 연기를 도

입한 바 있다

.28 

<명기 황진이> 오프닝에 설정된 빨래하는 처녀들의 모습은 원작에도 

나타나는 설정이기 때문에

, 오로지 <아리랑고개>의 영향을 받은 것이

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 하지만 빨래터에 처녀들뿐만 아니라 서사를 

함께 배치하여 오프닝을 진행하는 수법은

, 원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구성 방식이다

. 따라서 박진은 원작 <황진이의 역천>의 도입부를 <아리

26

박진

, 「울음바다가 된 조선극장」,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48쪽 참조.

27

서사가 담당한 역할은 관객들에게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고 사전에 이해하도록 돕는 역
할로

, 기본적으로 원작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도입부를 무대 위에서 읽어주

는 작업에 해당했다

. 서사의 내용은 뺷매일신보뺸 기사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 기사에 수록

된 내용은 원작 소설의 두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박종화, <황진이

의 역천

>, 뺷월탄박종화문학전집뺸 11권, 삼경출판사, 1980, 294~295쪽 참조).

28

박진

, 「울음바다가 된 조선극장」,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4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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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18호

랑고개

>의 도입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끌면서(편극/ 연출 박진),29 과거

의 성공 사례를 참조하여 오프닝을 구성하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 동양극장 <명기 황진이>는 토월회 인맥의 성공 작품 

중 하나였던 

<아리랑고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시작 방식을 고수한 

작품이다

. 다른 점이 있다면, 무대 후면에 황소년이 등장하고 있다는 

(무대 영역이 세 부분으로 분리된 점)과

, <명기 황진이>에서는 실제 물이 

흐르는 빨래터를 조성하고 연기했다는 점이다

. 이러한 측면에서 연출

가 박진은 

<명기 황진이>를 무대화하면서, 과거 <아리랑고개>를 통해 

성공을 거둔 바 있었던 시작

(opening)

 방식을 도용했지만 이를 한 단계 

진화시키려고 했으며

, 무대 장치를 맡은 원우전이 실제 물을 가미하여 

그 차이점을 부각시켰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박진은 

<아리랑고개>의 성공 요인을 <명기 황진이>에 효

과적으로 접목하고자 하면서도

, 동시에 황소년과 물을 가미하여, 무대

의 영역을 크게는 세 부분

(황소년/ 처녀들/ 서사)으로

, 세분하면 네 부분

(황소년/ 표랑 둘/ 진현금/ 서사)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 여기에 원우전이 

장치가로 참여하여 병부 다리 밑을 흐르는 실제 냇물을 무대에서 실현

29

박진은 자신이 

<명기 황진이>를 각색 혹은 편극했다고 회고를 통해 밝힌 바 있다(박진,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6쪽 참조). 이것은 공식

적으로는 최독견이 각색을 맡았다는 증언과는 배치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고설봉 증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59면). 다만 1936년 당시 동양극장 전속작가 시스템은 완

비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 최독견이 1차 각색한 대본을 2차 각색하거나 공연 연습 

중에 편극 형식으로 바꾸어 연출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에

서는 

‘박진’을 편극자(연출자)로 인정하고 넓은 의미에서 각색 과정에 관여한 인물로 간

주하고자 한다

. 왜냐하면 박진은 자신이 직접 박종화의 작품 사용을 허가받았다고 술회

하고 있으며

, 이미 태양극장 시절에 이 작품이 공연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박진이 일

찍부터 이 작품의 기획과 각색 그리고 연출 전반에 관여한 흔적을 농후하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background image

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27

하여

, 이러한 연기 공간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할할 수 있는 계기를 갖

출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니까 무대 3분 영역의 계기이자 과거 무대(<아

리랑고개

>)와의 근원적인 변별점은 시내(물)의 도입이었고

, 그로 인해 다

리 위의 공간

, 빨래터, 그리고 서사가 등장하는 영역(DL)이 자연스럽게 

분리될 수 있었다

.

무대 공간이 분리되자 각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이야기

(연기 공간에 따른)

가 진행될 수 있는 무대 조건이 형성되었다

. 황소년은 유람 나온 양반의 

행색으로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야 했고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양반가의 시작

을 암시하며

)

, 빨래터에서는 현금을 포함한 처녀들이 일상의 일과대로 빨

래를 해야 했으며

(마을 처녀들의 관심을 모을 정도로 황소년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

, 서사는 황소년과 처녀 현금의 인연을 관객들에게 알려주

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특출한 외모와 성격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알려주며)

.

2. 

무대 분할과 서사 진행을 추동하는 숨은 동력으로서의 물

대분된 세 개의 영역은 한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야 했기 때문에

, 무대는 상호 분리 독립된 연기 영역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 다리 위의 공간과 빨래터는 자연스럽게 높이에 의해 분리되었

, 빨래터와 서사의 영역은 물과의 관련성에 따라 차별화되었다. 원우

전과 동양극장 무대 장치부는 비단 다리를 만드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

, 그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도록 하여 무대장치의 입체감을 더했을 


background image

28 

 

  제18호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연기 영역을 자연스럽게 분할하는 데에 조력

했던 것이다

무대 사진을 보면

, 처녀들 사이로 흐르는 물이 형상이 뚜렷하게 인지

된다

. 무대 배경으로 지정되었다는 만월대의 풍경은 제대로 인지되지 

않고 있고 폭포의 행색도 배치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 무대 뒤편

(UC)에서 흘러와 병부다리를 통과하여 무대 앞쪽으로 흐르는 물의 모

습은 유독 선명하게 포착되고 있다

이렇게 무대 면을 흐르는 물은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

했다

. 더구나 공연 시점이 더운 여름이었기에30 이러한 물의 흐름은 청

량감을 선사하며 관극의 매력으로 강도 높게 작용할 수 있었다

.31 동시

에 이 물로 인해 무대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다리 위

(upstage)의 느린 걸음걸이

, 무대 아래(평면)로 흐르는 물(UC→C→DC)과 

이 속도를 활용한 빨래

(질)

, 그리고 서사의 낭독이 어우러져 일종의 리

듬감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은 관객들의 시각과 청각을 고루 자극

하는 역할을 한다

. 여러 층위의 움직임(황소년의 움직임/ 빨래질 소리/ 물의 

흐름과 소리

/ 서사의 낭독)이 어우러지면서 역동적이면서도 다각적인 감

각적 자극을 생성할 수 있었다

. 이러한 감각에의 충동은 연극이 지니는 

오래된 강점 중 하나이며

, 그중에서 물의 움직임과 소리는 극적 배경

30

<명기 황진이>는 1936년 8월 1일에서 7일까지 동양극장에서 청춘좌 제 4주 공연으로 시
연되었다

. 당시 이 작품은 박종화 작 최독견 각색 박진 연출(편극)의 4막 5장의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고

, 이운방 작 비극 <애욕>(2막)과 화산학인(이서구) 작 <신구충돌>(2장)과 

함께 공연되었다

31

고설봉은 이 작품이 공연되면 관객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설봉 증언,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5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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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29

(음)을 넘어 일종의 물리적 오브제로 기능할 수 있는 매혹적 요소였다

이러한 물의 도입과 성공으로 이 공연은 동양극장 성공작 중에서도 특

별한 공연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무대에 도입된 물은 무대 공간을 구획하고 각자의 영역

(인물

과 서사

)을 분할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 이렇게 구획 분할된 공간에는 서

로 다른 배우들이 자리를 잡고 개성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 ‘황철’

과 

‘심영’ 그리고 ‘차홍녀’는 동양극장(청춘좌)을 대표하는 배우로, 1930

년대 후반에 가장 주목받은 연기 조합

(황철과 차홍녀)이자 경쟁 관계(황철

과 심영

)를 형성하고 있던 배우들이었다

. 동양극장 관객들은 이러한 일

류 스타들의 움직임과 연기를

, 흐르는 물이라는 독특한 상황과 함께 비

교 관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

고설봉은 

<명기 황진이>의 서막, 즉 개막 직후에 관객들이 감탄을 

했다고 증언했는데

,32 그 이유가 단순히 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흐르는 

물도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냈겠지만

, 더욱 중요한 이유는 흐르는 물과 

연기 공간의 세심한 구획 그리고 그 연기 공간에 출연한 배우의 면면과 

개성적 역할 연기가 종합되었기 때문이었다

. 비록 고설봉의 증언처럼 

금강산 풍경과 구룡폭포라는 실체는 무대 위에 반영되지 않았지만

(적어

도 서막에서는

)

, 흐르는 물의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시각적 자극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

이제 서막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정리해보자

. <명기 황진이>의 공간

적 배경

(서막)은 송도(개성)

 만월대를 배경으로 삼은 병부다리와 빨래터

였다

. 여기에 흐르는 물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시각적 이미지의 원천으

32

고설봉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5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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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18호

로 작용하였고

, 이후의 막에서는 폭포의 경쾌함으로 다시 한 번 무대 위

에 재현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 서막의 시내는 앞으로 나타날 폭포

의 근원으로 마련되었으며

, 일종의 정보 통제를 통하여33 이후 막에서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낼 목적으로 예비된 물이었던 것이다

.

3. 

남녀의 만남과 이별, 그 동선(動線)으로서의 무대

<명기 황진이>의 2막은 흥미로운 무대 장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먼저 관련 무대 사진을 보자

.

33

서사 양식에서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통제하여 일종의 효과를 거두는 것은 서술 전
략으로 흔하게 발견된다

. 영화에서는 이러한 구성 전략을 점진노출(slow disclosure)이

라고 한다

(스테판 샤프, 이용관 역, 뺷영화구조의 미학뺸, 영화언어, 1991, 125~126쪽 참

). 이러한 점진노출은 시각적 장면을 중시하는 연극에서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

34

「여름의 바리에테

(9)」, 뺷매일신보뺸, 1936.8.8, 3쪽 참조.

<그림 6> 2막 황진(黃眞)의 집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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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31

2막 ‘황진의 집’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황진의 집’에 

몰래 침입한 불청객 청년을 다룬 장이고

, 2장은 이 청년(‘총각’, 유현 분)이 

죽어 장사를 지내는 장이다

. 기본적으로 2막 1장과 2막 2장은 동일한 

장소를 무대 배경으로 삼지만

, 시간상의 추이가 개입되어 2막 2장은 가

을의 시점으로 변경된다

. 위의 공연 사진은 몰래 침입한 불청객 청년을 

다룬 

2막 1장이다. 무대 오른쪽(RC)으로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

나고 있다

.

위의 무대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2장의 개요를 먼저 살펴보자, 황

진이를 흠모하던 청년이 죽고 그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도착하자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

. 이를 의아하게 여긴 사람들을 대신하여 황진

이가 자신의 치마를 관 위에 덮도록 허락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

35를 바탕으로 삼은 장이 

2장이었다. 

원작 소설에서 이 대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관이 움직이지 않는 

황당한 사건은 상여를 맨 청년의 친구들이 극성을 떨며 일부러 꾸며낸 

사건이었다

. 그러니까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 총각의 딱한 사정을 모른 척한 황진이에 대한 친구들의 복수였던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복수심을 알 리 없는 황진이는 이 사건을 겪으

면서 

‘이 쇠를 녹이고야 말 총각의 정염’에 그대로 감동하고 만다.

한편 청년의 죽음은 황진이로 하여금 결국 자신의 불행한 처지

(‘절름

35

이 일화가 가장 먼저 나타난 문헌은 

뺷송도인물지뺸였다. 이 문헌에는 나아가지 않는 상여

, 치마를 덮어주는 황진이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이한 행적은 후대 박종화의 

소설에서는 상여꾼들의 고의적인 장난으로 변형된다

. 뿐만 아니라 이웃집 총각의 상사

와 죽음은 후대의 황진이 관련 소설에서 주요한 모티프로 활용되는데

, 이러한 소설적 설

정의 기원으로 이태준의 

<황진이>를 꼽는 것이 일반적이다(임금복, 「새로 쓴 <황진이> 

연구」

, 뺷돈암어문학뺸 17집, 돈암어문학회, 2004, 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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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18호

발이 양반

’)를 새삼 자각하도록 만들고

, 차라리 총각의 배필로 사는 이만 

못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 반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 이에 

황진이는 자신의 치마를 총각의 상여로 보내 스스로 정조를 훼손하고

과거와 다른 가치관을 갖은 여자로 변모한다

.

이러한 원작 소설의 상황은 

2막의 2장에서는 거의 그대로 수용되지만, 

2막의 1장 그러니까 총각과 황진이의 만남을 다룬 장에서는 원작의 설정

이 가감되어 수용된다

. 가장 민감하게 변화하는 지점은 총각이 황진이를 

만나지 못하는

(단지 담장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설정에서 탈피

하여

, 황진이를 만나러 직접 월담을 하는 설정으로 변모한 점이다. 

그러니까 

2장에서 상사병을 앓게 된 청년은 죽기 전에 황진이를 찾

아가 만나는 필사적인 모험을 시도하는데

, 이러한 만남을 다룬 장이 2

막의 

1장이었던 것이다. 위에 인용된 무대가 바로 이러한 ‘만남’ 장면을 

담고 있다

. 2막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기사에서는 청년의 

침입과 황진이 여종의 놀람 그리고 황진이와의 대면을 상세하게 기록

하고 있다

.36 즉 원작에서 먼발치에서 황진이를 만나 상사병에 빠지는 

청년의 삽화가

, 공연 대본에서는 청년의 도발적인 잠입으로 변형된 것

이다

.

이것은 아무래도 시각적 구현을 중시하는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요

구하는 설정에서 기인한다

. 연극적으로 청년이 황진이를 만나지 못하

는 사건을 극화하는 것은 관객의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격감될 수밖에 

없고

, 실제로 이 장면을 극화하기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해야 한

36

「여름의 바리에테

(9)」, 뺷매일신보뺸, 1936.8.8, 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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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33

. 담장 바깥에 머물면서 황진이와 차단된 총각의 행동만을 보여주는 

극적 행위는 시각적인 답답함을 창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따라

서 황진이와 청년의 대면을 무대에서 기획하고 구현한 것은 자연스러

운 선택이라고 해야 한다

.

변화된 설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청년이 뛰어넘어야 하는 담장이 

배치되어야 했다

. 청년은 죽기를 각오하고 ‘황낭자’를 만나기 위해 이 

담장을 넘어 황진이의 거처로 침입했다는 설정을 충족하기 위해서이

. 불청객 청년을 처음 발견한 이는 여종으로, 위의 무대 사진에서는 

청년의 맞은편 그러니까 무대 상수 쪽

(LC, left center)에 여종이 위치하고 

있다

. 여종은 놀라 황진이에게 도둑이 들었다고 고하고, 당황한 청년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답한다

위의 사진에서 청년이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계면쩍어 하는 인

상은 이때의 정황을 대변하고 있다

. 청년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해

명하고

, 죽기 전에 황진이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읍소한다

.

이러한 대면에서 황진이 역할을 맡은 여배우의 위치는 주목된다

. 이 

여배우는 마루에 서서

(UC)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로 인해 위엄

에 찬 황진이의 분위기를 체현하려는 의도를 짙게 드러낼 수 있었다

실제 대사에서 황진이는 처음에는 

“야밤에 남의 집 담을 넘으니 도적인

?”라고 점잖게 물었고, 그 다음에는 “그러면 무슨 연고로 월장을 하여 

들어왔나

?”라고 다시 예의를 갖추어 묻고 있다. 즉 황진이(의 연기)는 계

속해서 점잖은 표정과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 청년을 아랫사람으로 하

대하고 온정을 베푸는 상전의 위치를 유지해야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ackground image

34 

 

  제18호

그러기 위해서는 높이 차이가 실현되는 무대 공간이 설치될 필요가 있

었던 것이다

.

서막에서도 그러했지만

, 무대 위에서의 높이 차는 여러 설정을 편안

하게 이끄는 기반이 된다

. 서막에서 황소년과 여인들의 신분 차와 내밀

한 감정의 결을 보여주는 데에 무대 높이가 일조했다면

, 2막(1장)에서는 

황진이와 총각의 입장 차와 감정을 보여주는 데에 무대 높이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다음으로

, <명기 황진이>의 3막 제목은 ‘유수(留守)의 산정(山亭)’이다. 

황진이는 

2막에서 공언한 대로 기생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원작의 설

정에 따르면

, 황진이는 청년의 상여에 자신의 치마를 덮어준 이후에 스

스로 기생이 되었다

. 자색을 탐하는 많은 선비재사들과 공경대부들이 

그녀를 원했지만

, 그녀는 도도한 품성을 견지하며 자신이 선택하는 특

별한 남성들에게만 몸을 허락하고자 했다

.

이러한 원작의 설정은 각색작에도 유효하게 적용되어

, 3막 ‘유수의 

산정

’에 모인 양반들은 너도나도 황진이를 보기를 애쓰게 된다. 황진이

는 이러한 바람을 무시하고 일부러 뒤늦게 나타나며 양반들의 비난에

도 도도한 품성을 잃지 않는다

. 그럼에도 재치와 계교로 양반들의 비난

을 사지 않고

, 오히려 양반들을 놀려 주어 그들 스스로 화가 나서 잔치

를 폐하도록 유도했다

. 다시 말해서 황진이는 스스로 홀로 남는 방식을 

알고 있었고

, 이로 인해 홀로 남아 소세양을 만나게 된다. 

박진의 기록에 따르면 

3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송유수 외에도 김판

, 윤참판 등 주로 고위 관리였다.37 ‘송유수’는 김동규가 맡았고, ‘김판

’는 박제행이, 그리고 ‘윤참판’은 서월영이 맡았다.38 이들 배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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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35

황철과 심영 다음의 조역을 주로 담당하는 배우 진용으로

, 희극적인 연

기와 노역 혹은 악인 역할 내지는 군중 씬

(mob scene)에 장점을 가진 연

기자들이었다

. 특히 박제행과 서월영은 콤비를 이루면서 각각 희극적

인 연기와 악역을 주로 담당하곤 했다

소세양을 역을 맡은 사람이 심영이라는 점은 동양극장 청춘좌의 배

우 구조에서 기인하는 당연한 결과이다

. 소세양은 황진이가 스스로 몸

을 허락한 인물로

, 김판서나 윤참판과 달리 황진이가 인정한 인물이며 

이에 따라 극중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 이러한 소세양 역은 청춘좌를 

대표하는 주연 배우의 몫일 수밖에 없다

. 황철이 4막의 지족선사 역을 

맡았다면

, 3막의 소세양 역은 심영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심

영은 서막의 서사를 맡고 난 이후 

3막에서 소세양으로 다시 출현하게 

된 것이다

3막의 도입에서 고위 관리들이 북적거리다가 퇴장하면, 3막의 무대

에는 소세양과 황진이만 남게 된다

. 황진이가 사랑했던 두 번째 남자

(첫 번째 남자는 ‘이웃 청년’)가 소세양이다

. 특히 그녀가 기생이 되고 나서 

37

박진

,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6쪽 참조

38

원작 소설에서 

‘유수’는 ‘송도(개성)유수’를 가리키는데, 송도유수는 황진이에게 벽계수

에 대한 유혹을 부탁하는 인물이다

. 이러한 원작 소설의 설정까지 각색 대본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 송도유수가 마련한 자리에서 황진이와 소세

양뿐만 아니라 황진이와 벽계수가 헤어지는 장면이 공연되었을 가능성을 함부로 배제할 
수는 없다

. 송도유수 역시 황진이와 교류한 양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장시

, 「황진이 관련 자료」, 뺷동방학뺸 3집,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1997, 308~400쪽 참조). 

다만 

1976년 을유문화사 <삼절부>에는 ‘벽계수’ 관련 에피소드 자체가 설정되어 있지 않

(박종화, <삼절부>, 뺷한국작가출세작품전집뺸 (1), 을유문화사, 1976, 29~31쪽 참조). 

이러한 정황은 최초 

<삼절부>에 벽계수 관련 삽화가 삽입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높

여주며

, 그렇다면 <명기 황진이>에도 벽계수 삽화는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

다고 하겠다

. 따라서 <명기 황진이> 공연 사항을 기록한 주요 배역표에 벽계수 역할을 

맡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까닭도 이해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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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18호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 오직 소세양만이 그녀의 존경과 사

랑을 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황진이는 이러한 소세

양을 떠나보내야 한다

. 그래서 3막의 공간적 배경은 ‘산정(山亭)’은 이별

의 장소가 된다

.

<명기 황진이>는 2막과 3막에서 헤어지는 남자들의 에피소드를 중

심으로 사건을 전개하고 있다

. 3막의 무대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2막을 감안할 때 산정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군중 장면(mob scene)에서 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

(two shot)으로 변경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 무대 

배치의 변화는 실질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 4막의 무대 배치와 상당

히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 그만큼 동양극장 무대미술팀은 이 작품에

서 무대 배치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 그 논리를 따라가 보자.

4. 

무대 세트의 가감 / 변형과 공간 배경의 이동 / 변모

<명기 황진이> 4막의 배경인 ‘지족암’은 시사하는 바가 큰 무대이다. 

그것은 

4막의 무대가 2막의 무대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

이다

. 이러한 정황을 인정한다면, 2막― 4막의 연관성에서 3막만 배제

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 보다 세분된 극적 정황 파악하기 위해, 4막의 

무대 배치와 배경 공간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

4막의 공간적 배경인 산속에 위치한 절이다. 이 절에는 ‘지족화상(知

足和尙

)

’이 살고 있었고, 이 절 이름은 ‘지족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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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37

뜻을 푼다면 

‘족함을 알고 있는’ 도가 높은 승려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 원작을 참조하면, 지족화상은 수양 경력이 높은 

승려로 당대의 성불로 칭송받고 있었으며

, 서화담과 함께 당대의 도학

자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 당연히 지족선사가 머무는 지족암은 도학

의 의미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공간으로서의 

‘지족’은 실제 내용과는 상반된 의미를 지

니게 된다

.40 그것은 황진이가 방문하여 벌이는 일련의 행위 때문이었

39

「여름의 바리에테

(10)」, 뺷매일신보뺸, 1936.8.9, 3쪽 참조.

40

황진이 설화와 관련 창작 소설에서 지족선사는 남성 훼절자의 대표적인 전형이자 허위
와 위선의 종교인으로 설정되고 있다

(윤분희, 「‘황진이 이야기’의 의미 생성과 변모」, 뺷우

리말글

뺸 34집, 우리말글학회, 2005, 158~159쪽 참조). 이러한 대표적인 화소는 박종화

의 소설에도 활용되었고

, 각색 과정에서 <명기 황진이>의 연극적 정점으로 수용되었다. 

특히 황진이의 뇌쇄적인 몸매를 관객들에게 노출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는 삽

<그림 7> 4막 지족암(知足庵)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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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18호

. 박진은 이 작품의 연출을 맡았으면서도, 여주인공 ‘황진이’ 역할을 

동양극장 최고 인기 여배우이자 자신이 총애했던 차홍녀에게 맡기지

는 않았다

. 그는 훗날의 회고에서, 관례대로만 했다면 황진이 역은 응

당 차홍녀에게 돌아가야 했겠지만

, ‘뭇남자를 녹이는 데는 간하고 요절

한 웃음을 많이 필요

’ 했기 때문에 지경순이 더욱 적격이었다고 그 이유

를 밝히고 있다

.41 뒤집어 말하면 황진이 역할은 요염하고 간드러진 연

기를 요하는 역이었기 때문에

, 이러한 연기에 약점을 드러내는 차홍녀

를 기용하지 못하고

, 상대적으로 연기 진용에서 비중이 떨어졌지만 해

당 배역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지경순을 발탁했다는 대답이다

.

연출자 박진의 대답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 당시 동양극장 여자 

배우 연기 구도를 정리하면 주연 차홍녀

, 조연 남궁선, 한은진, 김소영

으로 나눌 수 있고

, 지경순은 아직은 그 밑의 비중을 지닌 여배우에 해

당할 때이다

. 차홍녀라는 그늘에 가려 있기는 하지만 여배우 2진을 형

성하는 남궁선

, 한은진, 김소영은 큰 인기를 모을 수 있는 여배우였고, 

실제로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남궁선은 중앙무대의 여자 주연으

, 한은진은 영화 <무정>의 주인공 역으로, 김소영은 1940년대 조선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변모하며 조선의 연예계를 대표하게 된다

.

그럼에도 당시 세 여배우는 표랑 역할이나 기생 역할에 머물러야 했

, 비교적 젊고 연기 경력이 짧은 지경순이 황진이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황진이 역할 중 비교적 까다로운 

4막에서의 연기 때문이었다. 4

막에서 황진이는 노출이 심한 연기를 수행해야 했고

, 그녀의 몸매와 외

화였기 때문에

, 동양극장 측은 적극적으로 이 삽화를 수용했다.

41

박진

,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6~15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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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39

모는 이를 감당하기에 적격이었다

. 이러한 4막의 연기는 무대 공간과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있다

.

42

「지경순

(池京順)과 4군자」, 뺷조선일보뺸, 1939.8.6, 4쪽 참조.

43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ht p://www.kmdb.or.kr/vod/

44

「눈물의 명우

(名優) 차홍녀(車紅女) 양 영면」, 뺷조선일보뺸, 1939.12.25, 2쪽.

45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ht p://www.kmdb.or.kr/vod/

<그림 8> 지경순

42

<그림 9> 영화 <장화홍련전>(1936년)의 지경순 이미지

43

<그림 10> 차홍녀

44

<그림 11>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년)의

차홍녀 이미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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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18호

4막에서 황진이는 면벽 수양을 하는 지족을, ‘간사한 웃음’과 ‘춤과 노

’ 그리고 ‘아양’과 ‘뇌쇄적인 몸매’로 유혹해야 했다. 실제 지족 역을 맡

은 황철

(1인 2역 수행)이 지경순의 연기에 뇌일혈에 걸릴 정도로 아찔한 유

혹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 노출 수준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박진은 지경순의 신체적 요염함이 관객들을 대거 끌어 모와 만원

사례를 초래했다고 자체 분석한 바 있다

.46 실제로 <명기 황진이>의 광

고를 참조하면

, 동양극장 측이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관객에게 별도의 양

해를 구할 정도로 이 공연이 각광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7

이러한 진술과 관련 정보를 활용하여

, 4막의 공간에 대해 논구해보

. 일단, 4막의 공간 규모는 ‘황진이’(역을 맡은 지경순)가 활달한 동선을 

구사할 수 있는 규모

(암자의 내부 크기 측면에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이

러한 전제는 지경순

(황진이 역)이 춤을 추거나

, 상대역인 지족선사를 유

혹하기 위해서 그 주변을 움직일 수 있는 절대 공간을 감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지족화상이 고정된 자세(면벽)로 연기에 임한다

하더라도

,48 황진이 역의 배우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

은 적지 않은 면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 게다가 황진이 역을 맡은 

지경순은 얇은 속옷만 입은 채 지족 옆에 눕는 연기를 수행해야 했는

,49 이를 위해서는 제법 넓은 공간의 방(안)이 마련되어야 했다.

46

박진

,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6~157쪽 참조.

47

<명기 황진이>」, 뺷동아일보뺸, 1936.8.7, 2쪽.

48

박진은 지족선사가 처음에는 

‘벽만 향해서 참선만 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박진, 「지족 역을 진짜 녹여버린 황진이 역」, 뺷세세연년뺸, 세손, 1991, 157쪽 참

).

49

원작에서 황진이는 잠을 자는 척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고 이를 바탕으로 지족화
상을 유혹하여 파계시키고 있다

. 따라서 황진이가 누울 수 있는 공간과, 몸을 뒤척이고 

움직일 수 있는 간격이 필요했다고 추론해야 한다

. 물론 <명기 황진이>에서는 원작의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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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41

하지만 위의 무대 사진으로 확인되는 지족암의 크기는 이러한 활달

한 동선을 확보한 크기는 아니었다

. 더구나 황진이 역할의 요염한 이미

지를 전달하는 데에

, 무대와 관석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다고 해야 한

.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황진이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그

녀의 시각적 자극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이 창출되었어야 

했는데

, 4막의 무대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다.

요약하면 지족암 내부 공간은 내부적으로는 비좁고 객석과는 지나

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이것은 내부 공간 즉 지

족암 자체의 구현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결론을 남긴다

.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2막과 4막의 무대 배경을 비교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

정을 넘어 춤추고 노래하는 연기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 더욱 확대된 공간이 필요했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

4막의 지족암

2막의 황진이의 집

<그림 12> 2막과 4막의 무대 배경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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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18호

동양극장 측은 이러한 지족암을 무대 배경으로 표현하기 위해

, 몇 가

지 변화를 도입했다

. 일단 4막에는 무대 뒤편으로 나무(숲)가 우거져 있

고 

2막에서 황진의 집이었던 공간이 절로 변모해 있다. 그러니까 2막의 

‘황진이 집’에서 무대 하수 쪽 장독대와 담장이 사라지고, 무대 상수 쪽

에 위치했던 문

(혹은 곳간)을 덮어 가린 상태로 

4막의 지족암이 만들어진 

것이다

.

그러니까 

4막의 무대 지족암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형성된 무대가 

아니라

, 2막의 세트를 변형하여 만들어진 무대라고 하겠다. 그러다 보

니 

2막에서 주로 황진이가 연기하는 내부 공간― 전술한 대로 이웃집 

청년과 여종은 단 아래에 위치하고 황진이만 홀로 마루에 위치 ― 을

, 4

막에서는 황진이와 지족선사 ― 그것도 황진이의 활달한 동선과 연기 

공간이 필요한 설정 ― 가 함께 연기하는 공간

(크기)으로 전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 2막에서는 황진이 독립 위치와 정태적 연기에 적당했

던 공간이

, 4막에서는 변화된 설정으로 인해 비좁고 옹색하게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

2막과 4막의 무대 사진을 세밀하게 비교하면, 4막에서 무대 위에 설

치된 

‘단’(지족암)의 크기를 확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2막에

서 황진이 집으로 사용되던 무대의 앞부분에 직사각형 단을 덧댄 흔적

이 있는데

, 이것은 무대 크기를 넓히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이러한 확

장 의도는 황진이의 동선

(춤추고 눕고 뒤척일 수 있는)과 관련이 깊다

. 하지

만 이러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지족암은 현실적으로 충분한 면적을 확보

했다고 할 수 없다

. 이러한 무대 상황은 2막의 무대를 4막에서 재활용하

면서 생긴 근원적인 한계를 완전히 숨길 수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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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43

이 무대를 제작한 원우전은 무대 전환과 세트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

하는 무대장치가라고 알려져 있었다

.50 그는 여름 시점의 배경을 겨울 

시점의 배경으로 순식간에 전환할 정도로

, 무대에서의 시간 이동이나 

무대 배경의 급속한 전환에 능숙한 무대장치가였다

. 이러한 장치가가 

2막과 4막의 무대를 근본적으로 동일한 세트를 활용하여 전환한다는 

기본 착상을 실행하는 것은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다

.51 2막과 4막을 

비교하면

, <명기 황진이>에서 담장과 월동문 그리고 장독대를 치우고 

부엌을 가려 집을 정자로 바꾸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기본 착상

을 무대화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그 결과 황진이의 집

(2막)은 집 같은 인상이 덜했고

, 산사(4막)는 고즈

넉한 분위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 ‘집’이라고 보기에는 엉성했고, 절이

라고 보기에는 기품 있는 이미지가 충분하지 못했다

. 이러한 차질이 빚

어진 근본적 원인은 장면 전환에 따른 무대장치

(재활용)를 고려했기 때

문이었다

. 즉 무대장치를 신속하게 변화하면서―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대장치가가 이 네 번의 변화에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서―네 번의 다른 공간을 묘사해야 하는 임무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무대 사진을 통해 

2막과 4막을 비교하면 원우전이 무대장

치를 부분적으로 조합해서

, 필요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일에 집중

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상당히 창

의적이고 또 경제적이었다

. 하지만 이것만으로 원우전의 장치가 스스

로 빛을 발할 수는 없었다

. 그의 창의력은 뛰어났지만, 그 결과 지나치

50

「무대미술 담당자 원우전」

, 뺷증언 연극사뺸, 진양, 1990, 137~138쪽 참조.

51

더구나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3막 역시 이러한 기본 구도에 종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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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18호

게 무대 회전에만 집중했고 공간 자체가 드러내는 적절성을 올곧게 구

현하는 데에는 장점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Ⅳ. <명기 황진이> 무대 장치의 정점으로서 ‘폭포’와

‘흐르는 물길’의 기원

비록 

<명기 황진이>의 무대 장치가 각 막(서막/ 2막/ 4막)마다 적절성의 

측면에서 다소의 편차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장치상의 변화가 강조하는 한 부분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 더구나 이러한 강조 부분으로 인해 편차와 다소간의 문제를 보완할 

수 있었다

. 그것은 무대 하수 쪽 뒤편 배경을 이루는 작은 ‘폭포’이다.

4막 무대 사진 상으로 보면, 이 폭포는 숲 사이에 나지막하고 소담하

게 걸려 있다

. 이 폭포를 상세하고 유기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 ‘서막’

의 정경과 

‘2막과 4막’의 풍경, 그리고 ‘폭포’ 부분 확대 사진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서막의 

‘병부교’ 세트를 제거하면, 2막과 4막의 ‘숲’이 보이는 정경이 

드러나도록 처음부터 배치되어 있었다

. 결론적으로 <명기 황진이>의 

무대는 산

(숲)을 배경으로 한 폭포를 병부교로 감추고 서막을 시작했고

2막에서는 이 폭포를 담장으로 감추며 기밀을 유지하다가, 4막에 이르

러서야 비로소 폭포의 실체를 드러내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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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45

그렇다면 서막에서 흐르는 시냇물은 병부교 뒤에 감추어져 있던 폭

포의 물을

, 무대 위로 흐르도록 하여 연출한 효과라고 하겠다. 결국 병

부교는 폭포를 감추면서도

, 그 물길을 활용하기 위한 이중적으로 고안

된 세트였다고 할 수 있다

.

2막에서도 이러한 감춤 효과는 이어졌다. 전술한 대로 2막과 4막은 

상수와 하수의 일부 기물을 감추거나 치움으로써 변형되지만

, 기본적

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 2막은 월동문과 담장으로 무대 하수 

<그림 13> 서막의 전체 정경(병부교)

<그림 14> 2막의 정경(황진이의 집)

<그림 15> 4막의 정경(지족암)

<그림 16> 4막 지족암의 우측(하수) 폭포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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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18호

쪽 뒤 배경

(UR, upstage right)을 가리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 4막이 되면 이

러한 배경이 제거되고 그 안에 숨어 있던 폭포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

러내는 무대 배치였다

. 서막에서부터 무대 장치의 핵심을 이루던 ‘흐르

는 물

’이, 궁극에는 ‘쏟아지는 물’의 형태로 무대 위에 재현된 셈이다.

무대 사진만으로는 물

(길)의 형태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연극사 관련의 진술

(고설봉의 증언)을 참조하고 서막에서의 

‘물의 배치’를 

감안하면

, 4막에서 폭포는 실제로 재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진 상

의 폭포는 육안으로 보아도 물줄기가 선명하고

, 고설봉의 증언에서도 

“무대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고 물이 흐르도록 했는데 무대 밑에 가 있

던 몇 사람이 흘러내린 물을 계속 밖으로 퍼내야 했다

”는 기록이 발견

되고 있다

. 그러니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이 폭포가 무대 위에서 실현

되었을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

따라서 

<명기 황진이>의 무대 상 폭포는 실제로 재현되었고 그에 따

르는 부대 효과를 충실히 수행하여 이 작품을 인기작으로 만드는 요인

이 되었다는 연극사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다만 연극사에

서 기술된 것처럼 

<명기 황진이>의 폭포를 구룡폭포로 간주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

<명기 황진이>의 배경이 개성(송도)이기 때문에 금강산과는 물리적 

거리 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 4막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지족암(지족

선사의 거처

)이 금강산에 있다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 오히

려 지족선사가 기거하는 지족암은 개성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위치하

, 원작에서도 이러한 설정을 수용하고 있다.52 실제로 황진이 관련 

설화에서 지족암은 

30년 면벽을 하던 지족선사의 거처로 알려져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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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47

, 후대의 다른 소설에서도 이러한 설정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고설봉의 증언에 착오가 있던가

, 이를 듣고 정리하는 과정에

서 발생한 장원재의 착오에 의해 

<명기 황진이>의 ‘폭포’가 ‘구룡폭포’

로 오인되어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겠다

. 다만 이러한 착

오나 오기에도 불구하고

, <명기 황진이>의 ‘폭포’와 원우전의 금강산 

스케치 속 폭포의 풍경은 대단히 흡사하고

, 그 기원의 동일성(동일 작가, 

같은 착상

)을 상정하는데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지족을 쓰러뜨린 황진이는 천하에 인물 없음을 탄식했다

. 황진이는 천마(天摩)

의 거룩한 영봉

(靈峰)을 우러르며 파계된 지족화상을 뿌리치고 울적한 마음에 산

천의 절승

(絶勝)이나 찾으려 하여 짚신 감발로 다시 동으로 성거산을 향하고 떠났

. (…중략…) 굽어 서으로 송악을 바라보고 굽이쳐 흐르는 예성강 물빛을 보

 새삼스럽게 산천은 옛인 양한데 사백 년 기업이 한마당 꿈임을 탄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진이는 길이 하늘로 향하여 휘파람을 불었다. 다시 발을 

돌이켜 박연폭포를 찾았다

.

53(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명기 황진이>의 폭포는 구룡폭포가 아니라 박연폭포였다. 

원작에서 지족을 파계시킨 황진이는 서화담을 찾아가는데 그 도중에

서 만난 폭포가 박연폭포였다

이제

, <명기 황진이>의 무대를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명기 황진

> 4막의 무대 배치는 분명 원우전의 특성을 담보하고 있지만, 작품 

52

박종화

, <황진이의 역천>, 뺷월탄박종화문학전집뺸 11권, 삼경출판사, 1980, 307쪽.

53

앞의 책

,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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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18호

어디에서도 구룡폭포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 가장 관련성이 높은 장면

이 서막과 

4막인데, 서막은 폭포가 아닌 개울(시내)이 중심을 이루고 있

었고

, 4막에 지족암에 걸린 폭포가 무대 하수 뒤편에 설치되어 있었다. 

앞에서 정리한 대로 서막의 물줄기는 무대 하수 뒤편에 설치된 폭포로

부터 연원했지만

, 이 폭포가 드러나는 장면은 4막으로 그 이전까지는 

폭포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무대배치였다

.

<명기 황진이> 4막의 폭포는 일단 원우전의 무대 스케치와 유사한 

구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 정황상으로 ‘구룡폭포’가 될 수 없으

, 원작과 관련 근거를 종합할 때 이 폭포는 박연폭포여야 합당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원우전 스케치에 등장하는 

(상)팔담의 풍경을 직접 구현한 폭포로도 보기 힘들다

. 다만 이 과정에

서 원우전의 금강산 스케치 상팔담 풍경 속 폭포와 유사한 폭포의 형태

와 그 기원을 확인할 수는 있다

54

원우전의 이 무대 스케치는 금강산 

‘팔담’의 풍광을 담은 스케치로 판단되고 있다(김남

, 「새롭게 발굴된 원우전 무대 스케치의 역사적 맥락과 무대미술의 특징에 관한 연구」, 

뺷한국연극학뺸 56호, 한국연극학회, 2015, 334쪽 참조).

<그림 17> 원우전의 무대 스케치

54

<그림 18> <명기 황진이> 4막의 폭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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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49

원우전은 동양극장 시절 이미 금강산의 스케치를 활용하여 무대장

치를 구현한 바 있다

. 이를 확실하게 증빙하는 작품은 1937년 5월에 공

연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일련의 스케

치를 작성했고

55

 이를 활용하여 무대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는 논리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 이러한 주변 정황을 종합하면, 동양극장 시절 

원우전

(무대미술팀)이 금강산과 일련의 풍경을 활용하여 무대장치를 만

드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지

만 대략적으로 흡사한 전례를 찾을 수 있다

.

따라서 원우전과 무대미술팀이 비록 팔담의 폭포를 직접 

<명기 황진

>에 대입하여 무대장치로 구현한 것은 아니지만, 그 팔담의 풍광을 

원형으로 삼아 새로운 작품의 중요한 배경 ― 즉 박연폭포의 모델로 삼

56 ― 으로서의 폭포를 구현하는 데에 일정 부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제작 과정의 비밀이 잘못 노출되어 착오에 

가까운 고설봉의 증언이 횡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이 <명기 황진

>에 숨겨진 폭포이자 드러난 물길의 기원으로서의 무대 장치의 기원

이었다

.

55

원우전이 남긴 일련의 금강산 연작 스케치는 다양한 형태로

, 산과 호수, 폭포와 계곡, 그

리고 암자 등의 금강산 풍경을 담고 있다

.

56

박종화의 원작을 참조하면

, 지족화상을 파계시킨 황진이가 찾아간 곳이 박연폭포이며, 

성거산에 웅거하고 있는 서화담이었다

. <명기 황진이>에서 서화담이 등장했고, 관련 일

화가 사건화 되었다는 근거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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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18호

Ⅴ. 동양극장의 <명기 황진이>의 탄생 과정과

무대화의 진의(眞義)

한국 문학사에서 황진이 관련 설화는 오래 전부터 각종 문헌에서 발

견되고 있다

. 그녀에 관한 초기 기록은 17세기 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

는데

, 뺷성옹지소록뺸(1611)이나 뺷어우야담뺸(1622) 혹은 뺷송도기이뺸(1631) 등

에 이미 그 흔적이 남아 있다

.57 이러한 황진이 담론은 근대 시기 이후에

도 끊임없이 이야기

(서사물 혹은 소설)로의 변모를 겪게 된다

. 아무래도 

그 시초는 

1929년 2월호 한용운의 「천하명기 황진이」58였는데, 이 글이 

수록되고 다음 호에도 관련 서사가 이어서 연재되면서 일제 강점기 조선

인의 마음에 황진이 설화는 다른 형태의 서사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

1920년대부터 확산된 ‘황진이 서사’  창작(각색)  움직임은 박종화의 

<삼절부>로 이어지며 정식 소설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59 박종화의 

이 작품을 읽은 박진은 

1936년 8월에 <명기 황진이>로 소설을 각색하

여 동양극장 무대에 올렸다

. 비록 공연 대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신문 기사와 관련 사진을 종합할 때 원작의 설정에 충실했던 공연이었

57

우미영

, 「‘황진이’ 담론의 형성 방식과 여성의 재현」, 뺷한국문학이론과 비평뺸 28집, 한국

문학이론과 비평학회

, 2005, 168~169쪽.

58

한용운

, 「천하명기 황진이」, 뺷별건곤뺸 18호, 1929.1, 43쪽 참조.

59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1930년대 황진이 서사의 모태를 제공한 작가가 이태준으로 단정하

고 있으며

, 박종화의 <삼절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1950년대 <황진이의 

역천

>을 이태준 소설 <황진이>의 후속 작품으로 보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김병길, 「‘황

진이

’ 설화의 역사소설화와 그 계보」, 뺷동방학지뺸 147권,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9, 492

쪽 참조

; 임금복, 「새로 쓴 <황진이> 연구」, 뺷돈암어문학뺸 17집, 돈암어문학회, 2004, 26

8~26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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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51

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당시 문단 상황을 보면

, ‘황진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도 발견된다. 

1936년 6월 2일부터 뺷조선중앙일보뺸에서는 이태준의 <황진이>를 연재

하기 시작했는데

(1936년 9월 4일 중단, 1946년 8월 동광당서점에서 출간)

, 동양

극장이 

<명기 황진이>를 무대화하는 시점인 8월 1일에도 이 연재는 계

속되고 있었다

.60 이태준의 <황진이>는 황진이 소재 서사물 중에서도 

주목되는 작품인데

, 연재 시점에서의 영향력―그러니까 관객들의 호기

심 고조와 관람 분위기 형성―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러니 

동양극장 측으로서는 이태준의 

<황진이>는 일종의 호재였다. <황진이>를 

읽고 있는 독자들을 잠재적 유효 독자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비록 박진은 박종화의 작품을 모본으로 삼아 각색

(편극)이 단행되었다

고 술회하고 있고

, 공연 당시 신문에 게재된 관련 기사에서도 박종화 작품

과의 유사성이 강도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 그럼에도 불구

하고 

1930년대(1936년)에 형성된 ‘황진이 서사’의 인기와 영향에서 무한정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 박진과 동양극장의 공연 전략상으로 ‘황진이 서

’의 유행과 친숙도는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황진이 서사의 정점인 이태준의 

<황진이>가 탄생하는 과정

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되는 신문들 간의 경쟁에서 그 연원을 찾

을 수 있다

. 특히 인지도나 재원 면에서 비교적 열세였던 뺷조선중앙일

뺸는 이태준의 소설을 통해 신문 독자의 확보와 영향력의 증대를 도

모하고자 했다

.61 이러한 주변 상황과 의도로 인해, 1930년대 조선의 

60

김종호

, 「황진이 소재 서사의 궤적과 이태준의 <황진이>」, 뺷우리문학연구뺸 42집, 우리문

학회

, 2014, 191~19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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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18호

문단에서는 황진이 관련 서사가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한 소재

이자 모티프로 자리 잡게 된다

.

현재 박종화의 초기작 

<삼절부>의 내용과 출처는 명확하게 확인되

지 않고 있다

.62 단 박종화가 1955년에 수정하여 간행한 <황진이의 역

>이 그 초기작의 위용과 변화를 거의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인하고 있다

.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박종화가 

전집으로 정리한 후대의 판본 

<황진이의 역천>을 <삼절부>의 대체 판

본으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63 뺷매일신보뺸에 게재된 <명기 황진

> 공연 대본의 일부 대사와 전체 설정이 <황진이의 역천>의 그것들

과 매우 흡사하고

, 영향 관계를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다는 관찰 역시 

이러한 판단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 <명기 황진이>의 각색 과정을 되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 1936년 작품 난을 겪던 동양극장 측 박진(연출가)은 “월탄

61

김종호

, 「황진이 소재 서사의 궤적과 이태준의 <황진이>」, 뺷우리문학연구뺸 42집, 우리문

학회

, 2014, 205~206쪽 참조.

62

우미영은 

<삼절부>가 1935년 8월에 발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최초 발표 지면

을 실제로 확인하기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우미영, 「‘황진이’ 담론의 형성 방식과 여성

의 재현」

, 뺷한국문학이론과 비평뺸 28집,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5, 173~174쪽 참

). 이러한 진술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후대의 학자 중에서는 초판본이 아닌 이후의 판

본으로 연구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 관련 문학사에서는 박종화가 <삼절부>를 정리하여 

1955년 새벽에 수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63

1976년 한국소설가협회에서 편찬 간행한 뺷한국작가출세작품전집(1)뺸에는 박종화의 
<삼절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구조는 <황진이의 역천>의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황진이의 역천>에 비해 간결한 문체와 구조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뺷한국작가

출세작품전집

(1)뺸 판본의 경우 제목이 <삼절부>이긴 하지만, 1976년도 간행본에 실려 

있기 때문에 

1930년대 <삼절부>를 모본으로 삼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증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 다만 <황진이의 역천>과는 달리, 뺷연려실기술뺸에서 발췌한 ‘황진이 관련 기

’이 서문(에피그램)으로 배치된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박종화, <삼절부>, 뺷한국작

가출세작품전집

(1)뺸, 을유문화사, 1976, 24~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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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53

이 어느 잡지에 서너 페이지 써 놓은 황진이의 얘기를 본인에게 승낙을 

받고

” 자신이 각색(편극)해서 공연 대본으로 만들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공식적인 각색자는 최독견)

. 이때 ‘서너 페이지 써 놓은 황진이의 얘기’라

는 작품이 

<삼절부>로 판단된다. 

하지만 원작은 분량 상 공연에 다소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클

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황진이와 이웃집 청년의 만남’이나 ‘황진이의 

지족선사 유혹

’ 대목을 연극적으로 재편하여 분량을 보강할 필요가 있

었다

. 이를 위해 각색자들은 황진이와 남자 상대역의 만남 장면을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각색 욕구를 느꼈던 것으로 보

이며

, 이러한 필요를 기반으로 <명기 황진이>의 공연 대본을 생성시킨 

것으로 파악된다

.

그래서 원작에서는 담장 바깥에서 힐끗 황진이를 훔쳐본다는 이웃

집 청년의 설정을 월담하여 직접 황진이를 대면으로 설정으로 바꾸어 

무대 위에서 직접 대사로 처리했고

, 지족선사를 은밀하게 유혹한다는 

원작의 사건 전개를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몸짓

(춤과 노래)을 곁들이

는 사건 전개로 변모시킨 것이다

.

이러한 각색과 추가 설정에는 무대 위에서의 장치 변화가 동반되어

야 했다

. 원우전을 비롯한 동양극장 무대미술팀은 <명기 황진이>의 무

대 장치를 몇 가지 특징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 일단 

병부교나 황진이의 집

(대청마루)

 등을 축조하고 이를 무대에 기용하여 

그 높이 차를 활용하고자 했다

. 시선의 교차나 대면의 방식에서 높고/

낮은 차이를 도입하여

,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연극적으로 제시했다. 

다음으로

, 무대 위에서 물을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무대제작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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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18호

로 관객들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 서막에서의 흐르는 시냇물과 4막에

서의 폭포는 대표적인 방식인데

, 이러한 물의 흐름은 공간의 분할, 청

량감 전달

, 역동적 이미지, 서사의 상징성 등을 구현할 수 있었으며 무

엇보다 관객들에게 무대미술의 참신한 인상을 전할 수 있었다

<명기 황진이>의 각색 과정과 공연 현황은 동양극장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주요한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1936년 8월은 

동양극장이 신생극장의 이미지를 벗고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

어내고 있던 일련의 시기였다

. 1936년 7월 15일부터 시작되어 7일간 공

연 된 

<단종애사>는 이왕직의 항의로 중단되기 이전까지 다수의 관객

을 끌어 모은 작품이었다

. 하지만 박진은 이 7일 간 잠재적 유료 관객을 

모두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 <단종애사> 이후에 임시

방편으로 투입된 공연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 최고의 

인기작 중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로 공전의 인기를 끌어 모은 작품이었

. 그 결과 이 작품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재공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36년 8월 1일부터 시행된 <명기 황진이>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

>의 후속작으로 선택된 작품이었다. 박진의 회고를 액면 그대로 빌

리면

, 작품 난이 가중되자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박종화의 작품을 기획

/ 편극/ 연출하여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 난은 기

실 동양극장이 처한 원론적인 어려움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 박진

이 

<삼절부>를 선택한 숨은 의도는 당대 ‘황진이’ 서사가 형성하고 있

는 문화적 맥락과 공연 성공 가능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동양극장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후 경성을 대표하는 극장으

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고

, 이를 성공적으로 이어갈 후속작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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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55

는 정황도 참고할 수 있다

(물론 동양극장의 사주였던 홍순언은 <사랑에 속고 돈

에 울고

>의 후편도 실제로 준비하고 있었다)

. 이를 위해서는 관객과 부민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문화적 관람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이 필요했

, 또 그러한 세부적 설정이 요구되었다.

‘황진이’는 예로부터 조선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받은 대상이었고, 여

성의 주체적 삶을 지향하면서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텍스트로 변전하

였기에

, 이러한 동양극장의 필요에 적합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는 이태준이 관련 소설을 연재하고 있어

, 관객들의 관심 형성

에도 이로운 점이 적지 않았다

. 박진은 박종화의 단편을 원작으로 삼아 

일련의 공연 작업을 진행하면서

, 실제로는 이러한 주변 정황과 문화적 

기류를 전면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름답고 대담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관객의 흥미를 불

러일으키는 전략은 

1920~30년대 대중극단의 주요한 공연 전략이었다. 

여성 캐릭터의 매력뿐만 아니라 이를 무대에서 수행할 여배우의 면면

이 흥행 수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시절이었다

. 동양극장은 이를 전

적으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왜냐하면 동양극장에는 당대를 대

표할 수 있는 미녀 여배우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박진의 연출 방향은 황진이의 여성적

/ 육체적 매력을 발산

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 동양극장의 대표적인 여배우였고 ‘홍도’ 역으

로 대중의 사랑을 온 몸에 받고 있었던 차홍녀를 

‘황진이’ 역할로 삼지 

않고 풍만한 육체를 지닌 

‘지경순’을 황진이 역할로 낙점한 것은 유체적 

노출을 강하게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 박진 스스로 밝힌 대로 지족선

사와의 

‘에로틱한 밤’은 관객들에게도 육체적/ 감각적 자극이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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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제18호

충분해야 했다

. 상대역이었던 황철의 육체적 자극이나, 이로 인한 관객

들의 만원사례

, 혹은 뺷매일신보뺸 에 수록된 관련 내용(공연 대본)에서 ‘잠

시 간의 암전

’을 지시하는 설정 등으로 볼 때, 황진이의 지족선사 유혹

은 파격적인 신체 노출을 상상하도록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동양극장 측이 대중적 인기를 제고하기 위해

서 노력했으며 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텍스트로 

<명기 황진이>

를 선택했다는 결론을 무리 없이 이끌어낸다

.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러

한 노출과 신체미의 작품만으로 흥행 전략을 완결하지 않았다는 점이

. 여기에 동양극장 무대미술(팀)의 역량이 가미된다. 

사실 

<단종애사>는 작품 규모가 매우 큰 작품이었기 때문에, 청춘좌

의 배우들만으로 전담 출연이 불가능하여 동극좌와 희극좌의 배우들

이 총동원되었고 간부까지 찬조 출연을 감행하면서 거의 

100여 명의 

출연자가 생겨난 바 있다

. 장면 수도 15막 17장에 달했기 때문에, 심지

어는 이 작품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대본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무대 

장치를 먼저 만드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이러한 무대미술팀의 협력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거쳐 <명

기 황진이

>에서도 헌신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단종애사>→<사랑

에 속고 돈에 울고

>→<명기 황진이>를 거치는 공연 일정이 대단히 성

공적이었다고 해도

(인기와 수익 측면에서)

, 무대미술팀이 경험해야 했던 

작업은 대단히 고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럼에도 무대미술팀은 무대

에서 물을 흐르게 하고

, 이를 무대 밑에서 받아내는 모험적인 디자인에 

다시 도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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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57

결과적으로 이러한 무대 전략은 

<명기 황진이>에 대한 관객의 호응

도를 제고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모험적 전

략 이면에 숨겨진 무대미술팀의 기본 전략이었다

. 일단 무대에 세 벽을 

갖춘 공간을 설치하고 이 공간을 황진이의 집과 지족암으로 공동 사용

할 수 있는 전략을 가동했던 것이다

. 담장과 월동문 그리고 곳간을 설

치했다가 철거하는 방식으로 

‘사가(私家)’를 ‘절[寺]’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가는 다소 사가답지 못한 형태를 띠고

, 지족암은 지족암

의 무대적 규모를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구현될 수밖에 없었다

. 이것

은 분명 

2막과 4막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주요한 원인이었다. 

64

<단종애사> 청춘좌 제 이주공연(第 二週公演)」, 뺷매일신보뺸, 1936.7.19, 3쪽 참조.

65

「연예 

<단종애사>」, 뺷조선중앙일보뺸, 1936.7.19, 1쪽 참조.

66

이 두 장의 무대 사진은 동양극장의 무대 미술을 조명하기 위해서 

<춘향전>과 연관하여 

논의된 바 있는 자료이다

(김남석, 「동양극장 <춘향전> 무대미술에 나타난 관습적 재활

용과 독창적 면모에 대한 양면적 고찰-

1936년 1~9월 <춘향전>의 공연을 중심으로」, 

뺷현대문학이론연구뺸 66집, 현대문학이론학회, 2016, 45면 참조).

뺷매일신보뺸 수록 <단종애사> 무대 사진

64

뺷조선중앙일보뺸 수록 <단종애사> 무대 사진

65

<그림 19> 현재 남아 있는 <단종애사>의 무대 사진(일부)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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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제18호

하지만 그 대신 확보하는 효과도 있었다

. 그것은 무대배치의 빠른 전환

과 경제성 그리고 전체적인 안정감으로 요약된다

. 이처럼 <명기 황진

>의 무대 배치에는 다소 간 약점도 분명 존재했지만,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강점도 동시에 확보되었다

. 그것은 무대 하수에 배치된/ 되어야 

하는 폭포의 숨김

/ 드러냄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장치와 관련하여 서막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 서막의 ‘병부교’

와 그 밑을 

‘흐르는 물’은, ‘폭포’라는 기물을 무대에 설치하면서 얻게 되

는 자연스러운 부대 효과였다

. 이 폭포의 물줄기를 외부, 그러니까 무

대 표면으로 유도할 수만 있다면 자연스러운 물길을 만들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아리랑고개>부터 오프닝 씬(scene)의 적격으로 손꼽히던 빨

래하는 처녀들의 인상을 참신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

무엇보다 흐르는 물은 무대에서의 실감을 더했고

, 공간의 자연스러

운 분할과 관객들의 시각적

/ 청각적 자극을 유도할 수 있었다. 물론 기

존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이미지도 생성시킬 수 있었다

. 이러

한 물줄기를 무대 위에서 무대 밑으로 유도할 수만 있다면―고설봉이 

증언한 대로 무대 밑에 출구를 설치하여 스태프들이 퍼낼 수 있다면―

이것은 아담하지만 상징적인 폭포가 될 수 있었다

.

현재 남아 있는 

뺷매일신보뺸 수록 공연 대본(개요)을 참조한다면, <명기 

황진이

>에서 황진이의 남성 편력은 ‘지족선사’의 파계로 일단락되었을 가

능성이 높다

. 그렇다면 지족선사 이후 ‘화담’과 만나는 장면은 무대화 가

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 따라서 ‘송도삼절’이라는 시대적 표상을 무대

에서 환기시키고

, 적어도 적극적으로 구현되지 않았을 화담 관련 사건을 

암시하기 위해서라도

, 박연폭포의 무대화는 필요한 장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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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59

무대 내에 폭포는 서막에서는 병부교로

, 2막에서는 황진이의 집(담

)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 적어도 4막에서는 지족암을 구현하면서 그대

로 노출되었고

, 관객들에게 폭포의 상징성을 4막 내내 전달했다고 보

아야 한다

. 이러한 구도와 상징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명기 황진이>

에서 황진이의 뇌쇄적인 연기 못지않게 동양극장이 깊게 침윤했던 관

(극적)

 요소가 폭포의 등장과 소개였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결

국 동양극장을 찾아 

<명기 황진이>를 관람한 관객들은 황진이 설화가 

지니는 오래된 호기심과

, 당대의 문화(문학) 환경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형성하는 유행

, 황진이 역을 맡은 여배우의 대담한 연기와 신체적 매력, 

그리고 더운 여름날을 청량하게 가라앉혀주면서 연극적 상징성마저 

담보하고 있었던 폭포의 위용에 감탄했다고 보아야 한다

. 하지만 안타

깝게도 이러한 진실은 기록의 오류와 잘못된 판단 그리고 착각과 착오

에 의해 구룡폭포로 오인되어 연극사에 기재되는 풍파를 겪어야 했다

이제라도 그 실체와 진위

(眞僞)가 조금이라도 제자리를 찾고 그 참다운 

의의가 명확하게 가려지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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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제18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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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사진을 통해 본 <명기 황진이> 공연 상황과 무대장치에 관한 진의(眞義)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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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B 자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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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18호

Abstract

The Performing Situation of Meonggi Hwankjinyi through Stage 

Pictures and The True Meaning of Stage Setting

Kim, Nam-seok Pukyong National University

In  August  1936,  Cheongchunjwa  of  Dongyang  theater  showed  Meonggi 

Hwankjinyi directed by Park Jin, played by Park Jonghwa and adapted by Chol 
Doggyeon. This performance at racted a great popularity for the audience, and the 
reason  was  said  to  be  due  to  Gooryong  Waterfal   in  the  stage  equipment. 
However, ‘Gooryong Waterfal  of Mt. Geumgang’ appears in Meonggi Hwankjinyi 
does  not  match  the  dramatic  situation.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Go 
seolgbong who claimed Gooryong Waterfal , Meonggi Hwankjinyi was recorded 
in the history of Korean theater as a work that was an unprecedented theater 
performance.  However,  collecting  related  photographic  materials,  conducting 
comparative  work  with  the  original,  and  compiling  the  contemporary 
retrospective and testimonials, it is possible to confirm the fact that the waterfal  
set up in this work is not Gooryong Waterfal . It is also necessary to confirm the 
aesthetic effect of the stage equipment related to the waterfall and to reexamine 
the stage where these stage aesthetics merge with the magnificent aesthetics and 
appear in the performance aesthetical y. In this research, we started from the 
question of such a stage device and searched for the performance aspects and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Meonggi Hwankjinyi and searched for the reason why 
these aesthetic properties are being developed throughout the performance.

Keywords  Dongyang  theater,  Cheongchunjwa,  Bark  Jin,  Bark  Jonghwa,  

Meonggi Hwankjinyi, Samjeolboo, Gooryong Fal , Barkyeon Fal

논문 투고일 : 2016.10.30   심사 완료일 : 2016.11.29   게재 확정일 :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