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문서한국전통문화연구18_3_김종수_15~19세기 의림지의 관개 수리시설 연구.pdf

닫기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01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김종수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객원연구원

Ⅰ. 서론
Ⅱ. 의림지의 제원(諸元)과

수원(水源)․수문(水門)

1. 의림지의 제원
2. 수원 제공과 저수량․제방
3. 수문시설

Ⅲ. 친지(親池)-자지형(子池型) 수리체계

1. 15세기 중․후반의 경우
2. 18~19세기의 수리체계

Ⅳ. 결론

국문초록

충북 제천의 의림지는 국내 최고

(最古)의 저수지로서 농경문화의 자취를 잘 간직

하고 있다

. 의림지는 인접한 용두산․청전들과 하나의 벨트를 형성하고도 있는데, 이

러한 지형학적 여건은 관개․수리시설을 운용하는 문제와도 직접 연관되어 있다

. 그

런데 의림지 수리사에서 수문과 연계된 수리시설을 규명하는 연구는 극히 일천한 편

이다

. 이에 각종 읍지류․문집들을 원용하는 연구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의림지 관

개․수리시설의 전모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규명하게 되었다

. 실제 금번 논의는 저수


background image

102 

 

  제18호

지의 필수적인 요건인 수원의 제공과 저수량 비축

, 제방의 축조와 수문 장치, 그리고 

‘친지-자지형’ 수리체계라는 제 범주를 아우르는 폭넓은 차원의 연구를 진행하였다.

의림지의 수원은 용두산에서 유입되는 계곡수와 저수지 자체의 기층 부위에서 

샘솟는 천원이라는 두 인자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 전자는 의림지를 산곡형 저수지

로 분류하는 이유와 직결되어 있으며

, 또 전․후자 공히 청정한 수질과 한랭한 수온

을 유지해 온 비결과도 연관되어 있다

. 이처럼 두 종류의 수원이 연중 제공됨에 따

라 의림지는 깊은 수심과 막대한 저수량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 반면에 

이 같은 장점은 건실한 제방의 건립 요청과 함께

, 토사․퇴적물을 수시로 관리해야 

하는 난제를 동시에 수반하게 된다

.

한편 학고 김이만이 남긴 「의림지기문」에는 정인지가 

‘선지(鐥池)’를 구축한 사실

이 기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 이는 15세기 중․후반부터 의림지에 친지-자지형 수

리체계가 운용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 또한 이 기문은 당시 의림지의 수문이 누석형 

시설이었다는 점도 아울러 확인시켜 준다

. 즉, 어미 못[親池]인 의림지의 아래 지점

에 별도로 작은 못

[子池]인 ‘선지’를 구축하는 방식을 취한 수리체계가 누석형 수문시

설과 병행되어 운용되었던 것이다

. 특히 친지-자지형 수리체계는 의림지가 봉착한 

큰 낙차 문제와 한랭한 수온 조건이라는 두 난제에 대해 과학적인 해법이 제시된 결

과라는 점에서

, 대단히 중요한 수리사적 의의를 지닌다. 차후 누석형 수문은 수통형 

수문시설로의 전환이 이뤄진 가운데

, 친지-자지형 수리체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

도록 그대로 전승되었다

. 특히 18~19세기의 대야지제․퇴제 등은 자식 못의 실상

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 결과적으로 15~19세기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운용되어 온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는 의림지의 수리사에서 준 원형에 상응하는 위상을 줄곧 

향유해 왔음이 확인되었다

.

주제어

 의림지, 관개․수리시설, 수원, 제방, 수문, 친지, 자지, 15~19세기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03

Ⅰ.서론

충북

(忠北)

 제천시(堤川市) 모산동(茅山洞) 241번지에 위치한 의림지(義林

)는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저수지로서

, 제천을 상징해 주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정착하였다

. 의림지는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와 밀양(密陽)

의 수산제

(水山堤)

, 그리고 상주(尙州)의 공검지(恭儉池) 등과 함께 한반도

의 유구한 농경문화의 전통을 잘 전시해 주는 저수지다

. 특히 산곡형(山

谷型

)

 저수지로 분류되는 의림지는 벽골제나 수산제․공검제 등에 비해

, 이 저수지가 축조(築造)된 이후의 원래의 모습인 고형(古型)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한편 의림지는 바로 이웃한 용두산

(龍頭山)과 청전(靑田)

 들판과 하나

의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이는 의림지

가 처한 지형학적․생태학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 금번 

논제인 관개․수리시설을 운용하는 사안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이번의 연구에서는 면면한 농경문화

의 전통을 간직한 저수지로서의 의림지가 발휘해 온 관개․수리시설의 

원형을 관련 고문헌

(古文獻)들을 두루 참조하는 방식을 통해서 집중적으

로 탐구하고자 한다

. 이에 본 논문에서는 원형(archetype) 개념을 ‘고대(古

)의 흔적

’으로 정의한 융(C.G. Jung, 1875~1961)의 설명 방식을 부분적으

로 도입하게 되었다

.1 다시 말해서 서구(西歐)의 신문명과 그에 따른 자

본주의의 상업문화에 전이․감염되기 이전 무렵인 

19세기까지의 의림

1

C.G. 융 외, 권오석 역, 뺷무의식의 분석뺸, 홍신문화사, 2007, 112쪽. 


background image

104 

 

  제18호

지는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었고

,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로 한 의림

지의 관개․수리시설을 준

(準)

 원형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취한 것이다. 

이처럼 

15세기에서 19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의림지 관개․수리

시설의 옛 모습을 면밀하게 추적․분석하기 위한 연구 목적을 실현하

기 위한 방법으로

,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제작된 각종 읍지류(邑誌類)를 중

심 텍스트로 적극 활용하였다

. 이와 동시에 김이만(金履萬)․오상렴(吳尙

)․조석윤(趙錫胤)․최석정(崔錫鼎)

 등과 같은 조선조 사대부(士大夫)들이 

남긴 문집

(文集)들을 보조 텍스트로써 충분히 활용하였다

. 이처럼 문집

과 읍지류 등과 같은 고문헌 자료들을 두루 원용하는 차원의 연구 방법

을 채택하게 된 이면에는

, 의림지의 관개․수리 시설을 연찬한 선행 연

구들의 경우 주로 읍지류에 한정된 연구를 수행한 결과

, 극히 단층적인 

논의에 머무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 따른 것이다

. 즉, 기존의 

연구 성과는 관개․수리시설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 

측면과 특정한 시기에만 집중함으로써

, 보다 포괄적이고도 입체적인 

논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각종 읍지류와 다양한 문집 등을 모두 망라하여 

15~19세기

에 이르기까지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의 전모와 수리사적

(水理史的)

 

흐름을 아울러 추적․검토하는 것을 지향하는 금번 연구는

, 이 방면에

서 나름의 연구사적 의의

(意義)를 획득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 그리하

여 이번의 연구가 향후 의림지가 국가 중요 농업유산으로 지정되는 단

계에서 뿐만 아니라

, 나아가 장차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위한

2

 필수 불가결한 요건인 원형의 보전과 활용이라는 긴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연구 성과로 반추되기를 기대해 본다

.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05

Ⅱ. 의림지의 제원(諸元)과 수원(水源)․수문(水門)

1. 

의림지의 제원

서두에서 언급한 사실처럼

, “제천현(堤川縣)의 북쪽 수리(數里) 즈음에 

소재하여

, 그 크기는 네모난 모양의 배와 같고, 그 깊이는 미루어 헤아

리기 어려운

” 의림지3는 바로 이웃한 청전들․용두산과 하나의 벨트(a 

belt)를 형성하고 있다

. 따라서 의림지 관개․수리시설의 원형을 탐구

하고 이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 또한 이러한 지형학적․생태학적 여건

을 충분히 감안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 기실 지난 2013년도

에 의림지가 국가 농업유산으로 선정되지 못하고 탈락한 주요 원인 중

에는 생태학적 지속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18세기 남인(南人) 계열의 지식인이었던 학고(鶴皐) 김이만(金履

, 1683~1758)은 의림지가 

“멀리 울창한 산세가 높고도 높은 용두산(龍頭

)

”과 “큰 들판 가운데 점점이 산재한 논고동[螺]을 머금고 있는” 청전들

과 하나의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는 지형학적 여건을 포착해 둔 사실이 

2

제천시는 

2016년에 이르러 의림지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 이형수, 「제천 의림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뺷충북일보뺸, 

2016.2.11, 3쪽.

3

崔錫鼎

, 「臨沼亭記」, 뺷明谷集뺸 권9(한국문집총간 154),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0, 11쪽. 

“義林池在堤川縣北數里許, 其大方舟, 其深不測.” 


background image

106 

 

  제18호

있다

.4 18세기 당시에 쪽빛 전답을 뜻하는 “남전(藍田)으로도 불렸던 청

(靑田)

” 들녘5은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

, 또한 의림지의 수원 형성은 해발 871m 높이의 용두산에서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 김이만은 18세기 당시의 조선의 명산․대첩을 두루 유

(遊覽)한 후에 남긴 지극히 실증적․사실적인 양식의 기문(記文)인 

뺷산

(山史)

뺸를 통해서 의림지와 청전들, 그리고 용두산을 한 다발로 묶어서 

묘사한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벨트

[區․境]

 개념에 입각해서였다.

A : (의림지는 제천[堤]의 커다란 저수지이다 (…중략…) 그 (의림지 아래

) 바깥쪽으로는 평평한 들녘이 책상처럼 펼쳐져 있고 (…중략…) 또 그 

(위쪽) 주변에는 푸르른 뫼와 비취색의 높은 산들이, 무리지어 가파르게 

늘어서서 하늘을 찌르는 듯하니

, 곧 용두산(龍頭山)이니, 의림지[池]의 대략

(大略)이 이와 같다.6

“의림지[池]의 대략”을 묘사해 보인 위의 인용문은 의림지가 터한 천혜

(天惠)의 지형학적 여건이 잘 서술되어 있다

. 때문에 의림지는 소론(少論) 

계열로 영의정

(領議政)을 역임한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1646~1715)에 의

해서

, “하늘이 짓고 땅이 베푼” 빼어난 자연 공간으로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 또한 그 수승한 경관(景觀)에 대해 “진실로 승구(勝區)며 영경(靈境)

4

金履萬

, 「詠堤川風土(1首)」, 뺷鶴皐集뺸 권2(한국문집총간 續65), 한국고전번역원, 2007, 46쪽. 

“龍頭遠世鬱嵯峨, 大野中含點點螺.”

5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6, 「哭進士姪慶錫」의 제5구인 “藍田草綠迷歸櫬”에 대한 주해, 135쪽. “自

檀谷來靑田奴家

, 半日㬥逝, 靑田亦謂之藍田.”

6

金履萬

, 「山史」, 뺷鶴皐集뺸 권9, 195~196쪽. “義林池, 堤之巨浸也 (…中略…) 其外平郊案衍 (…

中略…

) 又其外蒼巒翠嶂, 羣峭摩天, 乃龍頭山也, 池之大略如此.”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07

이다

!”는 예찬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7 그 연장선에서 의림지는 지난 

역사 속의 어느 순간부터 기존의 저수지 기능에 호수

(湖水)로서의 용도

가 추가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끝에

, 저수지와 호수를 합성한 

‘호지(湖池)’ 개념의 한 전형을 제시하기에 이른다.8 결과적으로 의림지

의 생태적 문제 또한 적시된 지형학적 조건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 사

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따라서 2013년에 평가단에 의해 지적된 

생태학적 지속성을 확보하는 문제는 청전들․용두산과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는 의림지의 지형학적 여건을 충분히 고려한 차원에서만이 

실현 가능한 일이다

.

한편 의림지의 생태적 지속성을 확보하는 과제는 모종의 선행 모델

이 요청된다

. 그런 점에서 고문헌 속에 간헐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18, 

19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의 의림지 생태계 현황을 파악하는 일은 대단

히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9 이와 동시에 지난 시절에는 존재

했으나

, 지금은 완전히 자취마저 민멸된 관개․수리시설의 현황을 파

악하는 일도 의림지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긴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

. 이에 일단 고문헌 속에 묘사된 의림지의 제원(諸元)에 관한 사항부

터 우선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김이만은 “제천현(堤川縣)의 북쪽 수리

(數里)

 즈음에 자리한 의림지”10의 전모를 아래처럼 입체적인 기법으로 

포착해 두었다

.

7

崔錫鼎

, 「記臨沼亭記」, 뺷明谷集뺸 권9, 11쪽. “惟堤地勢稍平遠 (…中略…) 又有斯池爲之藪澤, 寔

勝區靈境也 

(…中略…) 況此義林之勝, 天作地設, 以待人爲之致飾.”

8

金鍾秀

, 「18세기 堤川 義林池의 樓亭文化」, 뺷洌上古典硏究뺸44, 열상고전연구회, 2015, 46~50쪽.

9

金鍾秀

, 「鶴皐 金履萬의 18세기 의림지 생태환경 묘사」, 뺷충북학뺸 17, 2015, 52~64쪽.

10

崔錫鼎

, 「臨沼亭記」, 뺷明谷集뺸 권9, 11쪽. “義林池在堤川縣北數里許, 其大方舟, 其深不測.”


background image

108 

 

  제18호

B : 대개 일찍이 우륵당(于勒堂)에 노닐면서 호수의 둘레[圓]를 알았고, 

연자암

(燕子巖)에 노니면서는 호수의 면적[廣]을 알아차렸으며, 후선각(候

仙閣

)에서 노닐면서 호수의 고도[敞]를 알게 되었다. (또한) 진섭헌(振屧軒)

에 노닐면서 호수가 가려진 정도를 알았으며

, 홍류동(紅流洞)에 노니면서 

호수의 기관

[奇]도 알게 되었다.11

위의  인용문에서  우륵당․연자암․후선각․진섭헌․홍류동  등과 

같은 의림지의 부속 공간 및 역사적 상관물들을 통해서 묘사된 의림지

의 둘레․면적․고도․가려진 정도․기관

(奇觀)

 따위를 둘러싼 정보는 

일종의 의림지의 

‘제원’에 해당하는 요소들에 해당한다. 김이만은 위의 

인용문에서 누락된 수심

(水深)과 관련하여

, “긴 끈을 던져서 깊이를 재

었으나

, 일찍이 그 최저점[極]을 알지 못했다”는 말로써,12 풍부한 저수

량에 대한 감탄을 아울러 표하였다

. 또한 김이만은 “물길을 따라 내려

가노라니 맑고 얕은 정도가 순주

(蓴洲)에 기록된다

”라는 관찰 결과도 남

겨 두었다

.13 과거 의림지의 특산물이었던 순채(蓴菜)를 작명의 소재로 

삼은 

‘순주’는 의림지 북동쪽 모통이에 위치한 소규모의 인조섬을 가리

킨다

. 김이만이 남긴 시작(詩作) 중에서 「추회(秋懷)」는 이 순주의 용도가 

수심과 청정도를 가늠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음을 밝힌 귀중한 

문헌적 기록에 해당한다

. 이에 추가하여 김이만의 지기(知己)였으나 요

절한 남인 계열의 지식인 연초재

(燕超齋)

 오상렴(吳尙濂, 1680~1707)은 이 

11

金履萬

, 「山史」, 뺷鶴皐集뺸 권9, 196쪽. “蓋嘗遊於于勒堂, 而得湖之圓, 遊於燕子巖, 而得湖之廣, 遊

於於候仙閣

, 而得湖之敞, 遊於振屧軒, 而得湖之幽, 遊於紅流洞, 而得湖之奇.”

12

金履萬

, 「林湖賦」, 뺷鶴皐集뺸 권1, 19쪽. “投장紘而測深, 曾莫知其所極.” 

13

金履萬

, 「秋懷(2首)」, 뺷鶴皐集뺸 권6, 143쪽. “天地東南浩蕩遊...沿流淸淺記蓴洲.”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09

순주가 

1696년에 전(前) 제천 현감(縣監)인 홍중우(洪重禹, 1661~1726)에 의

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기도 했다

.14 오상렴의 이 기록은 의

림지 내의 인조섬인 순주에 관한 유일한 기록물이다

. 덕분에 지금까지 

밝혀지지 못했던 순주의 축조 시기와 그 주체를 둘러싼 매우 소중한 정

보를 발굴하게 되었다

.

한편 김이만이 적시해 둔 상기

(上記)

 인용문 속의 의림지의 제원은 오

늘날에 이르러 호반 둘레가 약 

1.8km, 호수 면적은 151, 470m2, 저수량 

6, 611, 891m3, 수심 8~13m로 측정되었다. 또한 의림지로부터 물을 공

급받는 인근의 몽리

(蒙利)

 면적은 약 2.87km2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

.15 따라서 김이만이 언급한 의림지의 제원과 관련된 사항들은 시대

적 여건상 불가피하게 수치상의 기록이 누락된 점을 제외하면

, 의림지

의 제원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두루 충족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의

림지는 

2006년 12월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0호로 지정된 상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하나의 저수지가 관개․수리시설로서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수원 형성에 따른 저수량

(貯水量)

 비축과 제

(堤防)(제언(堤堰))의 축조

, 그리고 수문(水門) 시설 구축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 기실 이와 같은 조건들은 

의림지 수리학

(水理學, hydraulics)을 구성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에 해당

14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소장본, K4-6278 2), 「滄浪翁茅山別業

十六景小識․銑池」

, 40쪽. “中作小嶼, 植以嘉卉.” 이 구절은 “(전 사군 홍중우가 의림지 관

개․수리시설을 공사하던

) 도중에 작은 섬(小嶼, 순주)을 만들고, 아름다운 초목을 심었

”라고 의역할 수 있다. 본관이 풍산(豊山)인 홍중우의 자는 천석(天錫)이며, 호는 만향

(晩香堂)임. 1696년에 제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동년 12월에 이임하였다.

15

梁起錫

, 「제천 의림지의 역사성과 가치」,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12쪽.


background image

110 

 

  제18호

한다

. 자연히 의림지의 경우 적시된 세 종류의 조건을 제대로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 처음 수축된 이후로부터 2016년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

지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제 과거 각종 고문헌 속에 기술된 이상의 세 가지 조건들을 수원의 제

공과 수문 시설

, 그리고 관개․수리 시설이라는 세 측면으로 나눠서 순

차적인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 다만 애초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했

던 

‘제방(제언)’ 조항은 해당 자료 자체가 극히 불충분할 상태이므로, 이 

사안은 저수량을 논급하는 과정에서 간략하게 취급하도록 하겠다

.

2. 

수원 제공과 저수량, 제방

의림지의 수원은 용두산의 자락 가운데 남사면

(南斜面)의 계곡인 피재

골에서 직접 유입되는 막대한 수량

(水量)의 계곡수와 더불어

, 또한 이 저

수지 맨 밑바닥의 기층

(基層)

 부위에서 샘솟는 샘물 수원이라는 두 종류

의 인자

(因子)에 의해 제공되어 왔다

. 특히 전자의 경우는 의림지의 유

형을 산곡형

(山谷型)

 저수지로 분류하는 이유와 직결되어 있으며, 후자

는 의림지가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서 비교적 청정

(淸淨)한 수질을 유지

해 올 수 있었던 비결과도 연관되어 있다

. 그리하여 의림지는 계곡수와 

샘물 수원이라는 두 인자에 의해 풍부한 저수량을 연중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천혜의 장점을 지속적으로 향유해 왔던 것이다

.

이에 추가하여 전․후자 공히 의림지의 수온

(水溫)이 한랭(寒冷)한 상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11

태를 유지하게 된 이유와도 동시에 계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참고할 필

요가 있다

.  지금 현재에 비해서 훨씬 청정한 수질 상태를 유지했던 

1960년도 무렵에는 여름철의 평균 수온이 섭씨 13도에, 물밑의 수저(水

)

 온도는 섭씨 6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6 이처럼 사시사철 한

랭한 의림지의 수온 상태는 후론될 관개․수리시설을 운용하는 문제에

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미리 지적해 둔다

. 뿐만 아니라 

의림지의 한랭한 수온은 과거 의림지 생태환경의 지표였던 순채의 서

식 여건을 뒷받침해 주기도 했는데

, 1972년 대홍수 이후로는 거의 자취

를 감추고 말았다고 전한다

.

한편 김이만은 극히 실증적인 유람기인 

뺷산사뺸를 통해서, 당시 의림

지의 현황과 관련해서도 매우 귀중한 기록들을 남겨 두었다

. 일단 김이

만은 의림지의 주수원

(主水源)이 형성되는 경위와 관련하여

, “치악산(雉嶽

)이 내달려 남쪽 자락을 이룬

” 용두산 계곡으로부터 수원을 공급받는 

의림지가 터한 천혜의 입지적 조건을 적시해 두었다

.17 나아가 김이만

은 좀 더 세부적 차원에서 제천현의 북쪽 

20여 리 지점에 위치한 “용두

산의 남쪽 줄기인 직치

(稷峙)(피재골)

”18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려 온 (계

)물들이 휘어서 꺾이어 저수지로 유입한다

”고 기술해 두었다.19 이 

16

堤川郡誌編纂委員會

(編), 뺷堤川郡誌뺸, 上黨出版社, 1969, 518쪽.

17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2, 「龍頭山」, 59쪽. “雉嶽走南支 (…中略…) 列壑下逶迆 (…中略…) 純浸百

頃池

.”

18

忠淸北道鄕土史硏究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山川」, 修書院, 1997, 251쪽. 

“稷峙在縣北二十里, 由茅山坪, 走原州之一路, 龍頭山之南枝也.” 뺷충청북도각군읍지뺸는 “한말
(韓末)인 1890년대 이후에 각 군읍(郡邑)에서 작성한 읍지류를 일제하(日帝下)에서 일본
인들에 의해 필사

(筆寫)하여 엮어 놓은 뺷충청북도 각군읍지뺸”를 정도(定道) 100년을 기념

하기 위해 

1997년에 영인(影印)한 것이다.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編), 위의 책, 1997, 

刊行辭」

, 3~4쪽.


background image

112 

 

  제18호

기록은 의림지가 풍부한 수량 확보가 가능한 산곡형 저수지에 해당한

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해 둔 것이다

. 이처럼 자연의 경사면을 이용한 

산곡형 저수지는 해안가 주변의 충적지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

조된 방조제

(防潮堤)와는 다르게

, 수심이 깊고 면적 또한 넓어 풍부한 수

량을 확보할 있는 장점을 확보하게 된다

.20 

반면에 산곡형 저수지는 풍부한 저수량을 감당할 만한 건실한 제방

을 축조해야 하고

, 또한 건립된 제방을 상시적으로 관리해야만 하는 부

수적인 난제가 동시에 뒤따르게 된다

. 뿐만 아니라 산골짜기로부터 경

사면을 타고 퇴적하는 토사

(土砂)를 수시로 준설(浚渫)해야만 하는 관리

상의 어려움도 수반될 수밖에 없다

. 예컨대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 시

절에 토지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제천시의 장락면

(長樂面)에 위치한 두고

(頭高山)

 자락에 축조되었던 세칭 두고산제(頭高山堤)도 의림지와 유사

한 입지 조건을 확보한 제언이었다

. 그러나 두고산제의 경우 두 계곡으

로부터 유입되는 토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뺷제천군읍지

(堤川郡邑誌)

뺸는 아래처럼 전언하고 있다.

C : 두고산제는 제천현[縣]에서 동쪽으로 5리(里)에 있으며, 둘레가 99척

이다

. 두 골짜기 사이에 위치하여,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곧 토사[沙]가 흘러

들어 못 안에 

(가득) 채워지면서, 제언[堤]의 평지를 트이게 뚫을 수 없었기

, 농민들이 관개(灌漑)의 혜택을 입을 수가 없었다.21

19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196쪽. “池北亂樹如麻 (…중략…) 澗水屈折流入于池.”

20

梁起錫

, 앞의 논문, 2010, 12쪽.

21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堤堰」, 254~255쪽. “頭高

山堤在縣東五里

, 周九十九尺, 在兩谷間, 小雨則流沙塡於內, 與堤平不能疏鑿, 民不能蒙灌漑之利.”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13

위의 두고산제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 산곡형 저수지의 경

우 상시적으로 토사를 처리하는 토목 공법의 마련과 건실한 제방의 건

, 그리고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할 만한 수문 시설의 구축 등과 같은 

제반 사항을 충족시켜야만 영구적인 수명을 보장받을 수 있다

. 김이만

이 의림지에서 노닐면서 

“제방[堤]이 넓어서 새로 벌창한 물들을 수용하

기에 적합하다

”고 만족감을 표현한 이면에는,22 이처럼 넘쳐나는 유입

수를 감당할 만한 건실한 제방이 축조된 데 따른 안도감을 반영해 준다

.

한편 의림지의 저수량 제공에 기여한 두 번째 인자로는 이 저수지의 

기층 부위에서 솟아나는 샘물 수원인 이른바 

‘천원(泉源)’을 지목할 수 

있겠다

. 17세기 중후반의 지식인으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낙

정재

(樂靜齋)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은 「의림지에 기대어[倚林池]」라는 

제하의 고시

(古詩)를 남긴 바가 있다

. 조석윤은 이 시를 통해서 중국(中

)의 창랑(滄浪)에 비견한 의림지 자체의 엄청난 

“샘물 수원이 용솟음쳐 

마르지 않아

, 가득 차서 넘쳐 못 둑을 넘실거린다”는 정황을 포착해 둔 

사실이 눈에 띈다

.23 조석윤에 뒤이어 18세기의 오상렴 역시 의림지 밑

바닥에서 놀라울 정도의 샘물 수원이 샘솟고 있었다는 당시의 전언

(傳

)을 사실감 있게 채록(採錄)해 두었다

. 즉, 오상렴이 남긴 문집인 뺷연초

재집

(燕超齋集)

뺸 중의 「의림지」 항목에는 “대개 엄청난 샘물 수원[泉源]이 

용솟음쳐 올라서

, 샘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우러러 살피는 자도, 그 

(천원이)

 몇 곳인지를 알 수 없었다고들 운운한다”24는 당시의 정황이 수

22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2, 「遊林湖」, 47쪽. “堤闊恰容新漲水, 壑深猶有後開花.”

23

趙錫胤

, 뺷樂靜集뺸 권5(한국문집총간 106), 「倚林池」,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95, 331쪽. “有

池如滄浪

, 泉原湧不竭, 泛濫溢陂塘.”

24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義林池」,  38~39쪽.  “其深不可測 


background image

114 

 

  제18호

록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 그런데 오상렴이 채록해 둔 의림지의 천원

을 둘러싼 문헌 자료는 조선 초기의 학역재

(學易齋)

 정인지(鄭麟趾, 1396~

1478)가 읊조린 시 속의 해당 내용과도 정히 부합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정인지는 세조

(世祖)

 3년인 1457년에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는 일

부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체찰사

(體察使)

 자격으로 제천에 한동안 체

류한 적이 있었다

. 당시 정인지가 제천에 체류하면서 읊은 시인 「제천

객관

(堤川客官)」 중에는 의림지의 샘물 수원에 대한 묘사

, 즉 “샘물은 밑

도 없는 구덩이에서 흘러나와

, 용솟음쳐 올라 저절로 못을 이루네!”라

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상태다

.25

더 나아가 이상에서 소개한 정인지․조석윤․오상렴 등과 같은 조

선조 사대부들에 의해 기술된 의림지의 샘물 수원과 관련된 기록들은

1972년 대홍수 때에 의림지 제방에 무너지고 바닥이 드러나면서 채록

된 목격담과도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잠시 유의해 본다

. 당시 증언

자에 의하면

, “저수지 바닥에서 큰 경우는 보트를 엎어 놓은 것만큼, 작

은 것은 동이를 엎어 놓은 만큼의 물이 샘솟아 오르고 있었다

”고 전언

하였기 때문이다

.26 이 같은 목격자의 증언은 앞서 오상렴이 남긴 기록 

중에서

, “샘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우러러 살피는 자도, 그 (천원이) 몇 

곳인지를 알 수 없었다

”고 한 대목과도 정히 부합된다. 따라서 선초(鮮

)의 정인지 이후로 

17~19세기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의림

(…中略…) 盖泉源觱勃, 仰出者, 不知其幾處云.”

25

민족문화추진위원회

, 뺷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뺸 권14, 「충청도․제천현․제영」, 景仁文

化社

, 1985. “泉從無底竇, 觱沸自成塘.”

26

구완회

, 「제천 의림지에 관한 역사적 검토」, 뺷인문사회과학연구뺸 7, 세명대 인문사회과

학연구소

, 1999, 276쪽 각주 44)를 재인용하였음. 이 증언은 당시 충북 제천시 세명고교 

교사인 김정우 씨의 제보를 채록한 것이다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15

지 지층 부위에 연원한 샘물 수원인 천원은 의림지라는 저수지의 원형

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는 핵심적 인자로 평할 수 있다

. 더불어 의림지 

바닥의 샘물 수원에 관한 기록들은 의림지가 제방의 형식을 갖추기 이

전 단계의 모습이 늪지 혹은 천연적인 연못 형태를 취했을 것이라는 추

적을 동시에 가능케도 해준다

.

이에 반해 

“제천현[縣]에서 동쪽으로 10리” 지점에 축조되었던 서채평

(鋤蔡坪堤)의 경우

, “모래며 돌들로 이뤄진 바닥[地]으로 물이 스며들어 

새어나가기 때문에

, 폐(廢)해진 지도 이미 오래된” 사연을 간직했던 제

언이었다

.27 이처럼 물이 새어나갈 정도로 지층 부위가 열악했던 서채

평제의 사례에 비하면

, 의림지는 정반대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

. 결국 제천의 현좌면(縣左面)에 소재한 서채평제는 백성들이 제기한 

(訴)로 인하여 폐기되고야 말았다

.28 반면에 계곡수와 샘물 수원이라

는 상이한 두 종류의 수원을 확보해 왔던 의림지의 경우

, 제방이 축조

되기 이전 시기에서는 일정한 늪지대를 형성한 가운데 천연적인 연못

의 모습을 띄고 있었을 것임이 유추된다

.

이상에서 논급한 사실처럼 의림지는 

“용두산의 남쪽 줄기인 피재골” 

골짜기로부터 연중 유입되는 엄청난 양의 계곡수와 더불어

, 또한 이 저

수지의 기층 부위에서 제공되는 맑고 찬 샘물 수원을 동시에 제공받게 

됨으로써

, 2006년 당시에 무려 6, 611, 891m3에 달하는 막대한 저수량

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 조석윤이 “비록 7년 가뭄을 만났어도, 

27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堤堰」, 255쪽. “鋤蔡坪堤在

縣東十里

, 周八百九十八尺, 以沙石之地滲漏, 廢已久, 壬辰報營懸頙.” 

28

柳今烈 譯註

, 뺷堤川鄕土史料集-조선시대 堤川邑誌類를 중심으로뺸, 제천문화원, 2008, 486

. “鋤蔡坪堤縣左, 因民訴廢棄.” 단, 이 글의 원전 출처가 누락된 상태다.


background image

116 

 

  제18호

일찍이 기황

(飢荒)을 근심하지 않았다

”는 감탄조의 말로써,29 의림지의 

넉넉한 저수량에 놀라워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 그럼

과 동시에 이처럼 풍부한 저수량의 확보가 가능한 산곡형 저수지로서

의 의림지의 장점은

, 비축된 저수량과 그 압력을 동시에 감당할 만한 

건실한 제방의 축조를 요하는 난점을 수반하게 된다

. 실제 이 사안은 

그간 학계에서 의림지와 관련하여 가장 주된 이슈로 취급되어 온 사안

이기도 하다

.

특히 

18세기 당시까지 ‘대제(大堤)’30로 지칭되었던 의림지의 제방을 

최초로 수축

(修築)한 시기의 상한선을 과연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 하는, 

곧 이른바 의림지 시축설의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최대의 논점을 

형성해 왔다

. 다만 이 사안 자체는 본 논문의 주된 연구 목적이 아니므

, 더 이상 자세하게 취급하지는 않겠다.31 이처럼 다양한 의림지 시

축설 논의와는 무관하게

, 의림지는 넓고 튼튼한 제방 덕분에 “그 깊이

를 헤아리기 어려운

” 저수량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32 

실제 건실한 제방의 모습은 

18세기 후반 무렵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

되는 화공

(畵工)

 이방운(李肪運, 1761~?)의 「의림지도(義林池圖)」를 통해서

도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33

29

趙錫胤

, 뺷樂靜集뺸 권5, 「倚林池」, 331쪽. “雖遭七年旱, 不曾憂飢荒.”

30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大堤」, 39쪽. “堤之設, 盖起於羅代...

今所稱古堤

, 卽其蹟也.”; 金履萬,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我朝鄭河東麟趾, 體察湖西嶺南

關東三路

, 調其丁壯浚治之, 築大堤于池南.”

31

의림지 시축설은 크게 ①  이병도의 삼한시대

(三韓時代) 축조설, ② 6세기 중반 신라(新羅) 

진흥왕대

(眞興王代)의 우륵(于勒)에 의한 축조설, ③ 조선 초기 정인지에 의한 축조설이라

는 세 가지 견해로 정리된다

. 충북대박물관․제천시, 뺷의림지정밀기초조사뺸, 조사보고 

69책, 2000, 156~162쪽.

32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義林池, 堤之巨浸也. 其周十里, 其深不測.”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17

이상에서 논급한 의림지의 수원 제공에 따른 저수량 형성과 제방을 

축조하는 문제는

, 저수(貯水)된 못물을 바깥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일차

적 시설인 수문 설비에 대한 후속 논의를 촉발하게 된다

. 수문 시설은 의

림지의 

“그 물길이 멀리 흘러서, 넉넉히 전답 수천(數千) 경(頃)에 물을 관

(灌漑)하는

” 관개․수리시설의 1차적 설비에 해당한다. 다만 고문헌 자

료가 극히 빈약한 수문시설에 대한 논의는 이번 제Ⅱ장의 

3절에서 다루

도록 하겠다

. 대신에 의림지 관개․수리시설을 둘러싼 본격적인 연구에 

해당하는 이른바 친지

(親池)

-자지형(子池型) 수리체계의 구조를 둘러싼 논

의는 다음 제Ⅲ장의 지면을 통해서 좀 더 상세하게 개진하도록 하겠다

.

3. 

수문시설

의림지에 저장된 못물이 무논인 수전

(水田)을 위한 농업용수로 전환

하기 위해서는 제방의 안팎을 연결해 주는 수문시설의 정상적인 가동

33

李肪運

(1761~?), 「義林池圖」. 종이와 먹을 이용한 엷은 채색의 그림임.

<그림 1> 이방운의 <의림지도>


background image

118 

 

  제18호

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요청된다

. 또한 의림지의 수문시설은 저수량과 

제방 및 관개․수리시설이라는 세 요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

는 중요한 저수지 시설의 일환에 해당한다

. 의림지의 경우 두 부류의 

수원 제공에 따른 저수량 형성의 지리적․자연적 조건은 매우 양호한 

편이다

. 그러나 저장된 못물을 제방(곧 ‘大堤’) 바깥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배수

(配水)나 유출(流出)

 조건은 극히 까다로운 난공사(難工事)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의림지의 배수 시설

, 곧 수통․수문 등과 같은 

시설들에 대한 확인 작업 및 연구 성과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 이

처럼 수문시설에 대한 연구 부재는 관개․수리 시설로서의 의림지의 

기능을 규명하는 작업을 더디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해 왔

.34 심지어 기존 연구에서는 의림지에는 아예 수통(水桶)이 부재했다

는 설이 정설처럼 굳혀지고 있기조차 하다

. 이처럼 오도된 결론 앞에 

당도하게 된 이면에는

, 무엇보다도 뺷여지도서(輿地圖書)뺸나 뺷제천현지(堤

川縣誌

)

뺸 등과 같은 읍지류에 국한된 연구 경향이 크게 한 몫을 한 것으

로 분석된다

. 왜냐하면 읍지류에는 수통․수문시설에 대한 언급이 누

락되었기 때문이다

. 물론 여타의 고문헌 자료 속에도 의림지의 수문시

설을 단일한 항목으로 선정하여 자세히 묘사해 둔 기록은 발견하기 어

려웠다

. 그나마 수문시설을 취급한 문헌들의 경우도 극히 간략하게 이 

사안을 기술해 두고 있기에

, 극히 체계적이면서도 상세한 수준의 논의

를 펼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비록 간략한 기록물에 불과하지만

, 추적된 해당 자료들은 과

34

김재호

, 「제천 義林池의 水理史的 특징과 의의」, 뺷민속학연구뺸32, 한국민속학회, 2013, 69쪽.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19

거 의림지의 수문시설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담지하고 있

음이 확인되었다

. 그 중에서 고문헌 자료상으로 확인이 가능한 의림지 

수문시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전술한 체찰사 정인지에 의해 제공되

고 있었다

. 정인지에 의한 가칭 의림지 수축설로도 지칭되는 해당 기록

을 김이만의 「의림지기문

(義林池記文)」

35은 아래처럼 비교적 자세하게 

전언해 주고 있다

.

D : (체찰사 정인지가) 그 병사들을 조율하여 의림지를 준치(浚治)하도

록 하고

, 또 저수지 남쪽에 큰 제방[大堤]을 수축[築]하게 하였으나, (따로) 

수문

[閘]은 설치하지는 않았다.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

끔 하였다

.36 

김이만이 기술해 둔 윗 인용문 속에는 정인지에 의한 의림지 수축․

보수설 외에도

, 의림지의 수문시설과 관련하여 매우 귀중한 정보가 담

겨져 있음이 주목된다

. 특히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

게끔

” 조치한, 곧 누석형(壘石型) 수문 설비를 언급한 대목은 매우 중요

한 문헌 기록에 해당한다

. 왜냐하면 윗 기록은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의

림지 수문시설을 취급한 최초의 기록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

. 짐작컨대 15세기 중․후반 무렵에 설치된 누석형 수문은 크고 작은 

35

규장각 소장본

(奎 10387)인 「義林池記文」의 내용은 김이만이 남긴 유기류(遊記類)의 저술

인 

뺷산사뺸 중의 ‘의림지(義林池)’ 항목과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해당 쪽수 

표시는 

뺷鶴皐集뺸 권9, 「山史」에 표기된 그것을 따르기로 한다. 이 기문은 뺷제천군지(堤川

郡誌

)뺸에도 등재되어 있다.

36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我朝鄭河東麟趾, 體察湖西嶺南關東三路, 調其丁壯浚治

, 築大堤于池南, 不設閘, 壘石而滲出之.”


background image

120 

 

  제18호

돌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층층이 쌓아서 못물이 새어 나갈 만한 틈새나 

공백을 장치함으로써

, 만수위(滿水位) 정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

는 시설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중․후반 무렵에 정인지에 의해 설치된 누석형 수문과 동일

한 여수토

(餘水吐)

 기법을 적용한 현재 의림지의 여수문(餘水門) 수문시설 

또한 저수지의 수위 상승에 따라 제방이 붕괴될 가능성에 대비한 설비

에 해당한다

. 다시 말해서 의림지의 여수문 시설은 제방의 서쪽 모퉁이 

부위에 미리 물길을 내어서

, 만수위 이상의 물이 자연스럽게 넘쳐흐르

도록 만든 상시 배수 수문이라는 큰 장점을 발휘하고 있다

.37 현재 의

림지 서쪽 끝에는 약 

20미터 길이의 여수토가 조성되어 있는 상태다. 

다만 지금의 의림지 여수토 수문 위에 덮여져 있는 시멘트는 의림지의 

역사성 보전과 여수토의 원상 회복이라는 두 측면에서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일리 있는 주장이 제기된 상태다

.38 아무튼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끔

” 조처한 15세기 당시의 누석형 수문 역

시 의림지의 저수량 문제를 충분히 고려한 여수토 기법을 적용한 시설

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

한편 상기 인용문 속에 표기된 누석형 

‘수문[閘]’은 이후의 문헌들 속

에는 

‘수통(水筒)’이라거나,39 혹은 ‘수통(水桶)’으로 변경되어 표기된 사실

이 확인되고 있다

.40 물론 농서(農書)에서는 수통(水筒)과 수통(水桶)이 상

37

成正鏞

, 「고대 수리시설의 발달과정으로 본 의림지의 특징과 그 의의」,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214쪽의 각주 1) 참조. 

38

成正鏞

, 「제천 의림지의 특징과 수리사적 의의」, 뺷의림지유산과 농경문화뺸, 제천문화원, 

2013, 215쪽.

39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銑池」, 40쪽. “池在林湖水筒之外, 所

以承其流節蓄洩之宜者也

, 舊廢不修, 前使君洪重禹浚治, 遂復其舊.”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21

호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 기능상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으

로 판단된다

. 다만 전자인 ‘수통(水筒)’의 경우는 “전(前) 사군(使君)(현감) 

홍중우

(洪重禹)가 준치(浚治)하여

, 마침내 그 옛 모습[舊]을 복원하였다”는 

이어지는 기록으로 미뤄 보건대

, 1696년 무렵에 시도된 공사 때에 설치

된 것으로 보인다

. 이에 비해 후자인 ‘수통(水桶)’은 19세기 말인 1890년

에 편저

(編著)된 

뺷제천군읍지뺸의 기록이므로, 전․후자 간에는 다소 시

기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기해 둔다

. 보다 중요한 사실은 15

세기에 돌들을 포개서 설치한 누석형 수문이 

17~19세기에 이르러 보

다 정교한 형식을 갖춘 수통형 수문 시설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특히 앞에서 소개한 “전(前) 사군(使君) 

홍중우

(洪重禹)가 준치(浚治)하여

, 마침내 그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는 구

절을 참고해 볼 때에

, 17세기 이전 시기에도 수통형 수문시설이 그대로 

전승되어 왔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 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문헌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며

, 해당 자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듯 수통형 수문시설에 관한 추가적인 기록이 부재한 까닭으로 

인하여

, 이 시설의 구조나 설비 방식 등을 대상으로 한 더 이상의 자세

한 추적은 불가능한 상태다

.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못물이 흘러서 

나가는 물길이 불규칙했을 누석형 수문에 비해서

, 상대적으로 수통형 

수문시설은 보다 원할한 배수와 유출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 또

한 여수토 기법이 적용된 누석형․수통형 수문시설 공히 만수위를 자

동적으로 조절하여 배수하는 기능을 주로 수행하였을 것이므로

, 전답

40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堤堰」, 255쪽. “在義林池水

桶外

, 卽承林池水, 爲操縱蓄洩之處也.”


background image

122 

 

  제18호

(田畓)으로 못물을 관수(灌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관개․수리시설이 필

요했을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

겸하여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 본 수문시설이 위치한 서쪽 공간은 의

림지의 

“못물이 넘쳐 폭포(瀑布)가 되어, 거꾸로 저 아래 깊숙이 박힌 돌

덩이까지 수십 길이나 떨어지는

” 용추폭포(龍湫瀑布)와,41 또한 이 용추

폭포로 인해 

“산맥(山脈)이 중간에 끊긴” 곳, 곧 폭포의 좌우 지대를 일컫

는 홍류동

(紅流洞)

 일대라는 사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홍류동 일대는 

의림지 쪽에서 멀리 청전들과 제천시를 한 눈에 전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해당한다

. 또한 의림지에서 흘러넘치는 못물이 형성한 용추폭

포로 인해 홍류정

(紅流亭)

42․청폭정(聽瀑亭)43․망폭정(望瀑亭)44

 등을 비

롯한 숱한 정자

(亭子)들이 이름을 바꿔가며 건립된 공간이기도 했다

.45 

김이만은 「홍류동

(紅流洞)」이라는 시(詩)를 통해서 

18세기 당시 홍류동의 

용추폭포 위를 가로 지르는 교량을 동양의 이상향에 빗대어 

“무릉교(武

陵橋

)

”로 불렀다는 사실도 채록해 두었다.46 이렇듯 훌륭한 조망권과 수

려한 자연 경관까지 아우른 용추폭포 주변 공간은 현재 경호루

(鏡湖樓)

가 소재한 부근과 함께

, 과거 조선조 사대부들이 누각(樓閣)과 정자를 건

립하기를 가장 선호했던 지점이었다

.47 이병연(李炳延)에 의해 1932년에 

41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池水溢爲瀑布, 倒下穹石可十數仞.”

42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樓亭」, 371쪽. “在義林池瀑

布傍

, 今無.”

43

堤川郡誌編纂委員會

(編), 뺷堤川郡誌뺸, 521쪽. 

44

李秉延

, 뺷朝鮮寰輿勝覽뺸, 「忠淸道․堤川郡․樓亭條」, 普門社, 1932, 144쪽. “望瀑亭在義林池北

畔瀑布上今廢

, 只有礎石.” 다만 원문 인용과 쪽수 표시는 제천문화원에서 1999년에 간행한 

뺷국역 조선환여승람․제천뺸의 뒤편에 수록된 것을 참조하였다.

45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樓亭」, 371쪽. “在義林池瀑

布傍

, 今無.” 

46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5, 「紅流亭」, 116쪽. “武陵橋畔崔仙洞...請看三字楣間額.”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23

간행된 

뺷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뺸에서는 특별히 용추폭포의 장관(壯

)을 아래처럼 자세하게 묘사해 두었이 눈에 띈다

.

E : 의림지[池]의 서쪽에는 물이 넘칠 때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출구(出

)가 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천척(千尺)이나 된다. 이 때문에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나르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용폭

(龍瀑)이라 한 

것이다

.48

곧장 이어서 이병연은 이른바 송도

(松都)(개성)

 삼절(三絶)의 하나인 “박

연폭포

[朴淵]와 (금강산의)

 구룡폭포[九龍]와도 견줄만 한 것이 용추폭포다”

는 부연설명도 추가해 두었다

. 이병연이 “깎아지른 절벽이 천척(千尺)”

이라 표현한 것처럼

, 실제 용추폭포가 아래 지점으로 직하(直下)하는 거

리는 무려 약 

300m에 달할 정도로 크나큰 낙차(落差)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 의림지의 여수문이 해발 약 

320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정황 등을 

고려해 볼 때 엄청난 낙차 혹은 표고

(標高)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자연

히 의림지 수문에서 넘쳐흐른 못물이 

“거꾸로 저 아래 깊숙이 박힌 돌

덩이까지 수십 길이나 떨어지는

” 용추폭포로 대변되는 크나큰 낙차 문

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을 설비하는 과정

에서 최상의 난제로 부상해 왔던 것이다

. 김이만의 경우 「임호관폭(林湖

觀瀑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 “거꾸로 쏟아지는 물줄기 지금까지 여전히 

47

김종수

, 앞의 논문, 2015, 68쪽. 의림지 서편에 위치한 경호루는 1948년에 정면 3칸에 측

면 

2칸, 2층 누각을 갖춘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48

李炳延

, 뺷朝鮮寰輿勝覽․堤川郡뺸, 「名所」, 148쪽. “池之西部, 溢口下, 斷崖千尺, 因成飛瀑, 謂之

龍瀑

. 朴淵九龍相等.”


background image

124 

 

  제18호

마르질 않았으니

, 의림지에 저수량[水]이 많음을 비로소 알았도다!”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49 용추폭포로 상징되는 큰 낙차 문제는 상시적인 해

결을 요하는 수리사적 과제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었다

. 게다가 앞서 논

급한 의림지의 한랭한 수온까지를 감안하자면

, 이곳의 관개․수리시

설은 큰 낙차와 한랭한 수온이라는 두 가지 난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특수한 유형의 성질의 것이어만 했다

. 그런 점에서 제Ⅲ장에서 본

격적으로 취급할 친지

-자지형 관개․수리시설을 둘러싼 논의는, 의림

지 수리사

(水理史)에서 해명을 고대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겨져 있

는 상태다

.

Ⅲ. 친지(親池)-자지형(子池型) 수리체계

1. 15

세기 중․후반의 경우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 홍류동 부근에 위치한 의림지의 수문 부위

로부터 약 

300여 미터 아래 지점으로 직하하는 큰 낙차를 해결하는 문

제는 이곳에서 관개․수리시설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난제로 부

상해 왔다

. 즉, 의림지에 비축된 못물이 아래 지역의 청전들로 온전하

49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1, 「林湖觀瀑」, 38쪽. “一道飛流萬頃波, 倒瀉至今猶未涸, 義林池水始知多.”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25

게 관개

(灌漑)되기 위해서는 

“한 길로 세차게 흘러 내려가 만경(萬頃)의 

물결을 이룬다

”50고 묘사된 큰 낙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토

목․수리공학적 장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한

랭한 수온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의림지 못물의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

하여 전답에 공급하는 대안도 동시에 마련되어야 했다는 점은 앞서 언

급한 그대로다

.

이상에서 적기한 관개․수리시설 방면의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 방식이 바로 친지

(親池)와 자지(子池)

, 곧 어미(부모) 못

과 자식 못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수리체계 구조에 관한 논의이다

. 다시 

말하여 의림지는 친지인 어미 못에 해당하고

, 그 직하 지점 아래에는 

자식 못에 상응하는 별도의 관개․수리시설을 설비

(設備)하는 방식을 

통해서 큰 낙차와 한랭한 수온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 

틀인 것이다

. 이처럼 의림지의 친지-자지형 수리체계에 관한 설명 방식

은 고야마다 고이치

(小山田宏一)가 일본식 협산지(狹山池)

 아래의 제언인 

소지

(小池)(곧 子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한 개념적 틀을 원용한 결

과인 것으로 분석된다

.51 또한 지금까지 의림지의 친지-자지형 관개․

수리시설을 기술한 고문헌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학계에 전혀 보

고된 사실이 없다는 엄연한 지적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52 여하간 의림

지의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에 관한 설명 방식은 관련 고문헌들에 대한 

분석 작업과 의림지 주변의 유지

(遺址)를 대상으로 한 동시적인 검증이 

가능하므로

,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정착될 전망이다. 이렇듯 한

50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1, 「林湖觀瀑」, 38쪽. “危亭落日倚嵯峨, 一道飛流萬頃波.”

51

小山田宏一

, 「狹山池の堤の構造」, 뺷大阪府立狹山池博物館硏究報告뺸 3, 2006, 5~12쪽.

52

김재호

, 앞의 논문, 2013, 153쪽.


background image

126 

 

  제18호

국수리사 방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친지

-자지형

의 수리체계 구조와 관련해서도 김이만은 매우 귀중한 기록을 남겨 두

었음이 주목된다

. 김이만은 앞서 소개한 실증적 기문인 「의림지기문」

을 통해서

, 체찰사 정인지(1457)가 시도한 의림지 수축설 기사를 인용하

는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

F : (정인지가) 그 병사들을 조율하여 의림지를 준설[浚]․수리[治]하도록 

하고

, 또 저수지 남쪽에 ‘큰 제방’을 수축[築]케 하였으나 (…중략…)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끔 하였고

, 그 아래 작은 연못[小池]이 

이 물길을 받게끔 해서

, 저장[蓄]․배수[洩]가 적절하도록 조절하였으니, 이

름하여 가로되 

‘선지(鐥池)’라고 하였다.53

김이만이 채록해 둔 윗 인용문 속에는 앞서 논급한 

“여러 돌들을 포

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끔

” 조처한 누석형 수문 시설 외에도, 보다 

중요한 수리체계 구조에 대한 묘사가 첨가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 즉, 

그것은 누석형 수문이 장치된 홍류동의 아래 지점에 별도로 

‘작은 못[小

]

’인 ‘선지(鐥池)’를 가설하였고, 이 작은 못은 의림지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받게끔 해서, 저장[蓄]․배수[洩]가 적절하도록 조절하는” 식의 

53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我朝鄭河東麟趾, 體察湖西嶺南關東三路, 調其丁壯浚治

, 築大堤于池南, 不設閘, 壘石而滲出之, 其下小池受之, 以節蓄洩之宜, 名曰鐥池也.” 언급된 ‘축

(蓄洩)’의 자전적 의미는 ‘모으기도 하고 흐트러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자지에 의

해 의림지 수문에서 배출된 못물을 

‘저장[蓄]․배수[洩]’하는 두 가지 기능을 아울러 수행

한다는 의미다

. 한편 國史編纂委員會(編), 뺷輿地圖書(上)뺸의 「山川」에는 용두산 “정상에 소

(小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96쪽) : “龍頭山, 紺岩之幹也...山頂有小池.” 그러나 

이 기록은 논의 중인 자지와는 전혀 무관하다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27

수리적 기능을 동시에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 물론 여기서 의림지는 어

미 못인 친지에 해당하며

, 작은 못으로 표현한 ‘선지’는 자식 못인 자지

에 해당하는 수리시설임이 명백하다

. 굳이 술․기름 등을 담아 두는 작

은 접시인 복자를 뜻하는 

‘선(鐥)’ 자(字)라는 단어를 간택한 이면에는, 이

처럼 작은 못인 자지를 형상화하기 위한 의도가 투영된 결과일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아무튼 김이만의 「의림지기문」에 서술된 내용을 따르자면

, 친지-자

지형 수리체계의 상한선은 최소한 

15세기 중․후반 무렵으로까지 소급

하여 적용될 수 있음이 확인된다

. 이는 주로 조선후기 무렵에 편찬된 

읍지류를 대상으로 한 논의를 진행한 끝에

, 친지-자지형 수리체계가 1

8~19세기 즈음에서야 출현한 것으로 분석한 기존의 연구 성들과 사뭇 

대비되는 중대한 사실사실

(史實)인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의림지에 설비

된 친지

-자지형 수리시설의 기원 혹은 상한선은 기존의 18~19세기보

다 약 

4세기 가량 선행된 시점, 즉 정인지에 의해 보수가 시도된 15세기 

중․후반 무렵으로 앞당겨 설정할 수 있음을 「의림지기문」은 입증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 또한 15세기 중․후반 당시 의림지는 누석형 수문 

시설을 운용하였으므로

, 친지-자지형 수리체계도 이 수문시설과 함께 

출발하였다는 또 다른 사실도 아울러 확인하게 된다

.

뿐만 아니라 위의 「의림지기문」은 작은 못․자식 못인 

‘선지’가 의림

지의 누석형 수문에서 쏟아져 내리는 못물을 일차적으로 저장

[蓄]하기 

위한 용도로 시설되었음과 더불어

, 또한 비축된 저수지 물들을 다시 전

답에 배수

[洩]하는 이차적인 기능도 아울러 발휘하였음을 확인시켜 주

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 자식 못이 일차적으로 수행하는 저장[蓄] 


background image

128 

 

  제18호

기능의 발휘란

, 곧 직하 300m 거리에 이르는 큰 낙차 문제를 해결하였

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또한 후자인 자식 못에 의한 재(再) 배수[洩] 기

능은 의림지의 한랭한 수온이 수전 농업에 적합한 온도 조건으로 조절

되는 효과로도 이어졌을 것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 따라서 김이만이 

채록해 둔 상기 인용문은 

15세기 중․후반 무렵에서의 의림지 관개․

수리시설 현황과 그 안에 깃든 과학적 고심의 일단을 잘 전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문헌 자료로 평가된다

. 다만 김이만과 

동시대 인물인 오상렴이 남긴 기록물 속에는 자식 못을 

‘선(鐥)’ 자가 아

닌 

‘선(銑)’자, 곧 ‘선지(銑池)’54로 표기해 둔 차이가 발견된다. 대신에 김

이만․오상렴 두 사람이 남긴 기록 모두 우리말로 

‘선지’로 발음이 되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 그러나 오상렴이 굳이 ‘선(銑)’자를 간택한 이유에 대

해서는 더 이상의 자료 추적과 문헌적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

2. 18~19

세기의 수리체계

한편 김이만의 「의림지기문」에 기록된 

15세기 중․후반 무렵의 친

-자지형 수리체계 구조에 대한 서술은 18세기로까지 연속되고 있었

다는 중요한 사실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 왜냐하면 「의림지기문」

에 기록된 정인지에 의한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의 설비는, 차후로 오상

54

각주 

55) 참조.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29

렴이 남긴 

18세기의 기록물인 「선지(銑池)」 중의 해당 내용과도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 이 사안과 관련하여 오상렴은 “선지(銑池)는 의림호

[林湖]의 수통(水筒)

 바깥에 위치하여, 그 물길을 받아들여 저장[蓄]․배수

[洩]가 적절하도록 조절하는 시설[所以]이다

”55라고 기록해 두었다. 이처

럼 오상렴이 남긴 기록물에 의해 의림지의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 구조

가 

18세기 초엽 무렵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

는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오삼렴의 「선지」는 의림지의 수리사와 관련하

여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

그런데 오상렴은 상기 인용문에 곧바로 이어서 의림지 수문의 

“물길

을 받아들여 저장

[蓄]․배수[洩]가 적절하도록 조절하는 시설

”인 이 선지

가 

“오랫동안 폐해져 수리되지 않았으나, 전(前) 현감[使君] 홍중우가 준

[浚]․수리[治]하여

, 마침내 그 옛 모습[舊]을 회복하였다”는 정황도 아

울러 적기해 둔 부분도 눈에 띈다

.56 물론 “오랫동안 폐해져 수리되지 

않았던

” 기간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누락된 상태다. 

그러나 제천 현감을 역임한 홍중우에 의해 

1696년 경에 비교적 무난한 

준설․수리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미뤄 보건대

, 그렇게 긴 세월 동

안의 공백기를 감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왜냐하면 관개․

수리시설의 폐지는 곧 수전 농업의 중단을 의미하게 되며

, 이는 곧 관

(官衙)나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큰 원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55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銑池」, 40쪽. “池在林湖水筒之外, 所

以承其流節蓄洩之宜者也

.” 류금렬은 이 구절에 대해 “선지는 林湖의 水筒 밖에 있는 곳인데, 

이어진 그 유수를 절수하여 모았다가 흘러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고 잘못 국역하였다. 柳

今烈 譯註

, 앞의 책, 2008, 486쪽 참조.

56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銑池」, 40쪽. “舊廢不修, 前洪使君重

禹浚治之

, 遂復其舊.”


background image

130 

 

  제18호

민원

(民怨)

 사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상렴은 “진섭헌[屧

]의 주인(主人)(오상렴)이 (수리시설의)

 복구를 (적극) 찬성(贊成)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 수리

(水利)를 받게 되었다

”는 사실적 정황을 추가로 덧붙여 

두었다

.57 이 같은 오상렴의 전언은 “오랫동안 폐해져 수리되지 않았

” 의림지 수리시설이 그다지 긴 공백기를 거치지는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

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오랫동안 폐해져 수리되지 않았다”는 

구절은

, 역설적으로 1696년 이전 무렵인 17세기에도 친지-자지형 수리

시설이 그대로 전승․운용되어 왔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 짐작컨대 제천 현감 홍중우에 의한 복구공사도 17

세기 초․중 무렵까지 전승․유지되어 온 수리체계를 선행 모델로 삼

았을 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의림지의 수리시설을 취급한 

고문헌 자료가 부재한 

16~17세기의 경우에도 친지-자지형 수리체계 

구조가 그대로 존속되어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처럼 홍중우에 의해 옛 모습이 복구된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는 ‘수

(水筒)

’으로 표기한 수통형 수문시설과 병행된 상태였음을 윗글은 아

울러 확인시켜 주고도 있다

. 즉,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

오게끔

” 장치한 15세기 중․후반의 누석형 수문 시설이 수통형 수문으

로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 그런데 오상렴이 남긴 기록물의 경우 대나

57

吳尙濂

, 뺷燕超齋集(坤)뺸 권5, 「滄浪翁茅山別業十六景小識․銑池」, 40쪽. “屧軒主人贊成之, 邑人

受其利

.” 운위된 ‘섭헌(屧軒)’이란 18세기에 의림지 호반에 세워진 누정의 일환인 진섭헌

(振屧軒)의 새 주인인 오상렴 자신을 지칭한 표현이다. 애초 진섭헌은 밀양(密陽) 부사(府
使

)를 지낸 남인계인 김봉지(金鳳至, 1649~1675)의 별장이었으나, 이를 오삼렴이 비싼 

값으로 매입하였다

. 金鍾秀, 앞의 논문, 2015, 55~57쪽.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31

무로 제작한 대롱이나 도구 따위를 뜻하는 

‘통(筒)’자로 대체하였으나, 

실제로는 죽재

(竹材)로 수통을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 왜

냐하면 한겨울 온도가 무려 영하 

20도씨를 오르내리는 제천 권역의 기

후 조건상

, 굵은 통나무 형태의 대나무는 제대로 생장하지도 못하기 때

문이다

.

한편 차후인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뺷충청북도군읍지(忠淸北道各郡邑

)

뺸 중의 뺷제천군읍지(堤川郡邑誌)뺸에는 다수의 제언들이 등재되어 있음

이 확인된다

. 특히 이들 제언(제방) 중에는 “제천현[縣]에서 북쪽으로 10

리에 위치하며

, 둘레가 5,805尺이고, 수심[深]은 헤아릴 수 없다”고 기술

된 의림지제

(義林池堤)와

,58 또 의림지와 같은 북쪽 방향으로 유등제(柳等

)․퇴제(退堤)․대야지제(大也池堤)

 등과 같은 3개의 제언이 더 분포되어 

있었음을 기술해 둔 부분에도 잠시 주목해 본다

특히 이들 제언 중에서 

“제천현[縣]에서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위치

한 

‘퇴제’의 경우, “의림지 남쪽에 수로(水路)가 연계한 연못으로 일명 ‘퇴

수둑

’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관련 사료집(史料集)의 설명이 엿보인다.59 

다만 아쉽게도 퇴제를 보다 상세히 취급한 고문헌 자료는 더 이상 발견

되지 않는다

. 대신에 읍지류에 등재된 「제천현도(堤川縣圖)」에는 의림지 

아래 지점에 두 개의 제언이 더 그려져 있는데

,60 이들 중에 하나가 퇴

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 만약 퇴제가 후론될 대야지제보다 더 아래 위치

에 터한 제언이었다면

, 고야마다 고이치(小山田宏一)가 명명한 손자 연못

58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堤堰」, 255쪽. “義林池堤在

縣北十里

, 周五千八百五尺, 深不可測.”

59

柳今烈 譯註

, 앞의 책, 2008, 95쪽의 각주 241) 참조. 

60

<그림 2>와 <그림 3>을 참조할 것.


background image

132 

 

  제18호

을 뜻하는 

‘손지(孫池)’와 동일한 유형의 제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1 

, 의림지 수문에서 용추폭포를 경유한 못물을 저장․배수하는 기능

을 발휘한다는 점에서는 자지

(곧 대야지제)와 같은 유형의 제언이지만

자지보다 더 아래 지점에 위치했기에 

‘손지’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

. 만약 그렇다면 손지는 자지의 기능을 보조하는 용도에 충실했을 것

임에 분명하다

. ‘물이 빠져 나가거나 밀려남’을 뜻하는 ‘퇴수(退水)’라는 

단어로 둑의 이름으로 삼았다든가

, 혹은 ‘(대야지제의) 수로가 연계한 연

’으로 퇴수둑인 퇴제를 설명한 정황 등은 손지로서의 퇴제가 수행한 

기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

이렇듯 작은 못인 소지

(小池)가 자지․손지 등과 같이 두 개의 제언으

로 순차적으로 나뉘어져 설치된 이유로는

, 의림지 수문에서 배출되는 

엄청난 수량을 단계적으로 조절하여 감당하기 위한 장치의 일환으로 

가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따라서 의림지 수문에서 흘러내리는 못물

의 배출량이 차츰 감소하는 추세였다면

, 자연히 손지인 퇴제의 활용도

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이 사안과 관련된 사료집에 의하면, 

지난 

2008년도 당시에도 웅덩이에는 여전히 습지가 존재하였던 것으

로 전한다

.62 이 습지는 퇴제의 기능이 중단된 이면에 대한 그 어떤 정

보를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여타의 제언들 중에서 

‘유등제’의 경우 제방의 성격이 퇴제와는 다소 

구분되는  유형으로  분석된다

.  예컨대  의림지의  남쪽  방향으로  약 

61

小山田宏一

, 「일본에 있어서 고대 水利遺蹟의 보존과 활용사례: 狹山池 土木遺産의 보존․

계승과 그 활용」

,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6~7쪽.

62

柳今烈 譯註

, 앞의 책, 2008, 95쪽의 각주 241) 참조.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33

1.5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소재한 유등제는 유등지․솔방죽 등과 같은 

별명을 대동한 제언으로

, 청전 들판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지금도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상태이다

. 관련 사료집에 의하면, 유등제는 

“북쪽 수로로부터 유입되는 물을 가두었다가, 유등지 남쪽으로 펼쳐진 

농경지에 농업용 용수를 공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고 설명한다.63 다

시 말해서 작은 못인 자지․손지로부터 공급된 못물이 수로를 통해서 

유등제에 유입되어 저수가 되는 식의 과정을 경유하기 위한 용도의 제

언이었던 것이다

.

뺷제천군읍지뺸에 등재된 나머지 제방들인 동방제(東坊堤)․두고산제

(頭高山堤)․서채평제(鋤蔡坪堤)․소갈야제(小葛也堤)․대갈야제(大葛也

)․갈치제(葛峙堤)

 등과 같은 제언들은 방위가 모두 의림지와는 다른 

남동쪽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 다시 말해서 두고산제와 서

채평제는 각기 

“제천현[縣]의 동쪽 5리․10리” 지점에,64 그리고 동방

65와 소갈야제66․대갈야제67

  및 갈치제68의 경우는 “제천현[縣]의 

남쪽

” 몇몇 리 지점에 소재했던 제언들이었다. 따라서 두고산제․서채

63

柳今烈 譯註

, 위의 책, 2008, 95쪽의 각주 239) 참조. 「제천유등지시굴조사」에 의하면, 유

등제의 크기는 동서 

220m, 남북 80~100m로 담수 면적은 약 28,000m2인 것으로 측정되

었다

.

64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堤堰」, 254~255쪽. “頭高

山堤在縣東五里

, 周九十九尺.”; “鋤蔡坪堤在縣東十里, 周八百九十八尺.”

65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254~255쪽. “東坊堤在縣南

五里

, 周一千二百二十六尺.”

66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254~255쪽. “小葛也堤在縣

南十里

, 周六百五十尺.”

67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254~255쪽. “大葛也堤在縣

南十里

, 周一千四百十五尺.”

68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254~255쪽. “葛峙堤在縣南

五里

, 周一千四百八十八尺.”


background image

134 

 

  제18호

평제 및 동방제․소갈야제․대갈야제․갈치제의 경우는 지금 논의 중

인 자식 못․작은 못과는 전혀 무관한 유형의 제언이었던 것으로 판단

된다

. 다만 이들 일곱 제언과는 다르게 “제천현[縣]에서 북쪽으로 위치

” 앞의 4개 제방 중에 하나인 대야지제(大也池堤)의 기능과 용도와 관련

하여

, 뺷제천군읍지뺸는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설명을 덧붙여 두었음

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G : ‘대야지제’는 의림지의 수통(水桶) 밖에 있으니, 곧 의림지[林池]에서 

(흘러나온)  못물[水]을 받아들여 저장[蓄]․배수[洩]하게끔 조종(操縱)하는 

곳이다

.69

위 인용문 속에 드러난 문헌적 기록을 토대로 삼아 대야지제가 어미 

못인 의림지 아래에 위치하는 자식 못

[子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최근 

김재호

(2013)에 의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 상태다

.70 그런데 상기 

인용문은 이와 같은 기존의 주장에 추가하여 새로운 사실에 대한 추정

을 동시에 가능케도 해준다

. 그것은 바로 15세기 중․후반에 선보인 친

-자지형 수리체계 구조가 19세기 후반 무렵에 이르도록 그대로 전

69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堤川郡邑誌뺸, 255쪽. “在義林池水桶外, 卽承

林池水爲操縱蓄洩之處也

.” 그런데 류금렬, 앞의 책, 2008에는 뺷제천군읍지뺸에 게재된 이 구

절의 뒷부분을 

“蓄洩之所也”로 잘못 표기했다(95쪽). 또한 이 구절에 대해 “대야지제는 의림

지의 수통

(水桶) 밖에 있다. 즉, 임지(林池)에서 받아들인 저수(貯水)를 조종(操縱)하기 위하

여 모았다가 흐르게 하는 곳이다

”라고 국역했는데, 밑줄 친 부분은 명백한 오역이다.

70

김재호

, 앞의 논문, 75~76쪽. 그런데 필자는 대야지제에 관한 기록을 “在義林池水桶外, 卽

永林池水爲操縱蓄洩之可也

”로 잘못 인용하였다. 또한 두 번째 구절에 대해서, 멀리 “임지

(林池)의 물이 이리저리 흘러 새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국역했으나, 이 또한 명백히 잘못
된 번역이다

(72쪽).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35

승․운영되고 있었다는 엄연한 정보에 관한 것이다

. 또한 19세기 후반

의 수문 유형은 기존 

15세기의 누석형 시설이 아닌, 곧 ‘수통(水桶)’으로 

표기한 수통형 시설로 전환된 사실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 물론 이처

럼 수문시설이 변경된 정황과는 무관하게

, 친지-자지형 수리체계는 최

소한 

4세기 이상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었음을 거듭 확인하

게 된다

. 따라서 우리는 19세기 후반 무렵을 하한선의 기준으로 설정하

더라도

, 의림지의 친지-자지형 수리체계 구조는 관개․수리시설에 관

한 한 준

(準)

 원형에 상응하는 긴 역사를 향유해 왔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당도하게 된다

.  참고로 뺷여지도서뺸와 뺷충청북도각군읍지뺸에 수록된 

제천현도」를 제시하면 각각 다음 

<그림 2>, <그림 3>와 같다.71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의림지 아랫 지점에서 좌우로 분기되는 

두 갈래의 하천인 동쪽의 용두산과 서쪽의 하소천

(下所川)

 중에서, 용두

천은 근대화에 따른 개발 바람을 탄 나머지

, 현재 그 자취가 모호해진 

상황이다

. 대신에 용두천길과 용두천로로 불리는 도로명이 신설되면

, 지난 날 용두천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환기시켜 주고 있을 뿐이

. 퇴제와 대야지제로 추정되는 두 제언이 위치했던 곳이 바로 용두천 

방면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 특히 뺷제천군읍지뺸에서 “의림지

에서 

(흘러나온)

 못물[水]을 받아들여 저장․배수하게끔 조종하는 곳”으

로 특정

(特定)한 대야지제의 경우

, 그 유허(遺墟)마저도 민멸된 상황에 처

해진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

71

인용된 

<그림 2> 및 <그림 3>의 「제천현도」는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편), 뺷의림지 유산

과 농경문화

뺸, 제천문화원, 2013, 147쪽에 김재호가 게재한 <그림 1>과 <그림 2>를 재인

용한 것임


background image

136 

 

  제18호

<그림 2> 「제천현도」 의림지 지역 부분 확대

<그림 3> 

뺷충청북도각군읍지뺸 「제천현도」 부분 확대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37

그러나 위의 고지도에 적기된 대야지제가 동시적으로 수행한 저

장․배수 기능 덕분에

, 과거 의림지는 그 아래 지대에 위치한 제천현의 

여러 들녘에 충분한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었다

. 세인들이 왕왕 의림

지를 제천의 생명수로 비유했던 이면에는

, 이상에서 논급한 친지-자지

형 수리체계 구조라는 독특한 유형의 관개․수리시설이 지속적으로 작

동한 결과였던 것이다

. 이에 김이만은 의림지가 제천민의 삶에 기여한 

실상에 대해

, “그 물길이 멀리 흘러서, 넉넉히 전답 수천(數千) 경(頃)에 

물을 관개

(灌漑)할 만하니

, 그 덕(德)의 신령스럽기가, 족히 구름과 비를 

일게 하여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

”라는 찬탄어린 말투로써,72 그 모성적 

덕성을 극구 예찬해 두었던 것이다

.

Ⅳ. 결론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15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후반 무렵에 이

르기까지의 제천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의 현황과 그 전승 양상 등

을 개괄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 특히 금번 논의에서는 하나의 저수지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인 수원의 제공에 따

른 저수량의 형성

, 제방 축조와 수문의 구축, 그리고 관개․수리시설의 

72

金履萬

, 뺷鶴皐集뺸 권9, 「山史」, 195쪽. “義林池, 堤之巨浸 (…중략…) 其流之遠, 足以灌田數千頃, 

其德之靈

, 足以興雲雨澤萬物, 歲旱必檮焉.” 


background image

138 

 

  제18호

운용 등과 같은 제반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다

. 이를 위해 제천

과 연고가 있는 조선조 사대부들이 남긴 문집들과 함께 각종 읍지류 등

을 동시에 원용하는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 그 결과 지금까지 간과

되어 온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과 관련된 다수의 자료들을 발굴해 

내게 되었고

, 또한 기존의 단편적인 논의를 초극하는 차원에서 보다 포

괄적인 논의를 개진할 수 있었다

. 이하에서는 앞서 본론에서 개진한 내

용들을 간략히 정리하고 음미하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

의림지는 근대적 개발 여파가 미치기 이전 시기인 

19세기 후반 무렵

까지는 비교적 전래의 구관

(舊觀)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 이 같은 양상

은 의림지 권역의 생태환경 뿐만 아니라

, 이 저수지를 모태(母胎)로 하여 

운용되었던 일련의 관개․수리시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이에 금

번 논의에서는 과거 의림지의 관개․수리시설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 

모두를 포함시키는 보다 종합적이고도 포괄적인 차원의 연구를 진행

하게 되었다

. 특히 의림지의 제원에 상응하는 요소들을 포착해 둔 김이

만의 

뺷학고집뺸을 비롯한 다양한 문집들을 활용하게 된 것은, 금번 논의

의 지평을 크게 확장하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

무엇보다도 의림지 수원의 제공을 둘러싼 논의는 이곳의 관개․수

리시설 연구에 대한 시발점이 되기에

, 인접한 용두산․청전들과 하나

의 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의림지의 지형학적․생태학적 여건에 유념하

면서 이 사안을 우선적으로 다루었다

. 그 결과 용두산 자락의 피재골로

부터 유입되는 계곡수와 의림지 자체의 기층 부위에서 샘솟는 천원은 

오랜 세월에 걸친 양대 수원을 형성해 왔음을 확인하였다

. 특히 전자는 

의림지를 산곡형 저수지로 분류하는 이유와 직결되어 있고

, 전․후자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39

공히 이 저수지가 가뭄을 이겨 내면서 한랭한 수온을 유지하게 된 경위

와도 맞닿아 있기도 했다

. 한편 8~13m에 달하는 깊은 수심과 그에 따

른 강한 수압

(水壓)의 문제는 극히 건실한 제방을 요구하게 된다

. 더욱

이 산곡형 저수가 감당해야만 하는 토사․퇴적물 등을 처리하는 문제

는 제방의 건립과 수문시설에 대한 추가적인 난제를 덤으로 부과하게 

된다

. 과거 ‘대제(大堤)’로 지칭되었던 의림지 제방은 이러한 요청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의 제시였다

.

한편 의림지 관개․수리시설의 두 번째 국면인 수문에 관한 논의는 

그 동안 학계에서 전혀 취급되지 못한 사안이었다

. 그런데 고문헌 자료

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 이미 15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의림지에 누

석형 수문시설이 가설되었음을 밝혀내었다

. 또한 차후 이 누석형 수문

은 수통

(水筒)․수통(水桶)

 등으로 표기된 수통형 수문시설로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사실도 새롭게 규명하였다

. 기실 친지-자지형 수리체계 구

조도 여수토 기법을 적용한 이 같은 수문시설들과 줄곧 병행되어 왔음

을 밝힌 점도 금번 연구의 중요한 성과의 일환에 해당한다

.

의림지 관개․수리시설의 마지막 순서인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 구

조에 관한 논의는 앞서 적시한 제 조건들과 긴밀히 연계된 사안이면서

의림지 수리사 상의 핵심적 주제이기도 하다

. 특히 친지-자지형 수리시

설은 의림지 수문에서 아래 지점까지의 큰 낙차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

, 또한 연중 한랭한 수온 상태를 유지하는 의림지의 못물을 농업용수

에 적합한 온도로 조절하는 두 가지 난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에 해당

한다

.73 이에 각종 고문헌 자료들을 정밀하게 조사해 본 결과, 이미 15

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가 개발․적용되었다는 


background image

140 

 

  제18호

사실을 최초로 확인하게 되었다

. 이에 추가하여 친지-자지형 수리시설

이 

16~17세기를 거쳐서 19세기 후반 무렵까지 전승․운용된 사실도 

아울러 규명하였다

. 즉, 친지․어미 못인 의림지에 대해 선지(鐥池)․선

(銑池)로 표기된 작은 못․자지형 시설이 

18~19세기에 제작된 읍지

류를 통해서도 제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 다만, 의림지와 같은 방향에 

터한 대야지제․퇴제 중에서 대야지제가 자지형임에 명백한 제언이라

, 퇴제의 경우 손지형 제언일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의림지 

수리사에서 준 원형의 위상을 향유했던 친지

-자지형 수리체계 덕분에, 

제천의 들녘은 원활한 수전 농업이 가능했고

, 자연히 의림지는 제천의 

생명수로 굳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제 마지막으로 이미 자취마저 민멸될 상황에 처한 과거 친지

-자지

형 수리시설과 관련한 대안적 전망을 제안해 두고자 한다

. 이는 장차 

의림지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한 대안과도 직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현재로서는 얽혀진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로 인

하여

, 의림지 관개․수리시설의 원형을 온전히 복원해 내는 일이란 거

의 불가능한 일처럼 되어 있다

. 그렇다면 과연 실현 가능한 대안은 무

엇일까

? 그것은 일차적으로 관련 수리시설들을 취급한 고문헌 자료를 

보다 정밀하게 추적하는 가운데

, 또한 이 시설들이 위치했던 용두천 주

변에 대한 치밀한 현장 검증 작업을 병행해서 퇴제․대야지제를 유적

(遺跡化)하는 방안을 차선의 대안으로 신중하게 검토하는 일일 것이

. 물론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외국 농경유적들의 경우 원형이 매우 잘 

보전되어 있고

, 또한 원래의 기능까지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73

김재호

, 앞의 논문, 75쪽 참조.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41

면 용두천 변의 해당 지점을 제천시가 직접 매입해서

, 친지-자지형 수

리체계의 원형을 복원해 내는 일이야말로 진정 최선의 방안일 것으로 

사료된다

.


background image

142 

 

  제18호

참고문헌

1. 자료

金履萬

, 뺷鶴皐集뺸(한국문집총간 續65집), 한국고전번역원, 2007.

______, 뺷鶴皐遺稿뺸(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古朝46-가1765)
______, 「義林池記文」(규장각 소장본, 奎10387)
吳尙濂

, 뺷燕超齋集뺸(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소장본, K4-6278 2)

趙錫胤

, 뺷樂靜集뺸(한국문집총간 106집),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95.

崔錫鼎

, 뺷明谷集뺸(한국문집총간 154집),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0.

國史編纂委員會

(編), 뺷輿地圖書(上)뺸, 探求堂, 1973.

李秉延

, 뺷朝鮮寰輿勝覽뺸(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古朝62-112-7) 

義林池記文 

(규장각 소장본, 奎 10387)

堤川郡誌編纂委員會

(編), 뺷堤川郡誌뺸, 上黨出版社, 1969.

忠淸北道鄕土史硏究協議會

(編), 뺷忠淸北道各郡邑誌뺸, 修書院, 1997.

2. 단행본

柳今烈 譯註

, 뺷堤川鄕土史料集-조선시대 堤川邑誌類를 중심으로뺸, 제천문화원, 2008.

민족문화추진위원회

, 뺷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뺸, 景仁文化社, 1985.

충북대박물관․제천시

, 뺷의림지정밀기초조사뺸, 조사보고 제69책, 2000.

C.G. 융 외, 권오석 역, 뺷무의식의 분석뺸, 홍신문화사, 2007.
이형수

, 「제천 의림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뺷충북일보뺸, 2016.2.

3. 논문

구완희

, 「제천 의림지에 관한 역사적 검토」, 뺷인문사회과학연구뺸 7, 세명대 인문사회과

학연구소

, 1999.

김재호

, 「제천 의림지의 수리사적 특징과 의의」, 뺷민속학연구뺸 32, 2013.

金鍾秀

, 「18세기 堤川 義林池의 樓亭文化」, 뺷열상고전연구뺸 44, 열상고전연구회, 2015.

______, 「鶴皐 金履萬의 18세기 의림지 생태환경 묘사」, 뺷충북학뺸 17, 충북학연구소, 

2015.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43

成正鏞

, 「고대 수리시설의 발달과정으로 본 의림지의 특징과 그 의의」,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______, 「제천 의림지의 특징과 수리사적 의의」, 뺷의림지유산과 농경문화뺸, 제천문화원, 

2013.

梁起錫

, 「제천 의림지의 역사성과 가치」,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小山田宏一

, 「일본에 있어서 고대 水利遺蹟의 보존과 활용사례-狹山池 土木遺産의 보

존․계승과 그 활용」

, 뺷중원문화연구뺸 14,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_________, 「狹山池の堤の構造」, 뺷大阪府立狹山池博物館硏究報告뺸 3, 2006.


background image

144 

 

  제18호

Abstract

A Study on the Irrigation and Water Facilities of Euirimji 

Reservoir(義林池) during 15

~19 Centuries

Kim, Jong-soo Woo Ahm Research Center,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As  the  oldest  reservoir  in  Korea,  Euirimji  Reservoir  in  Jecheon(堤川), 

Chungcheongbuk-do(忠淸北道)  is  well  retaining  original  form  of  ancient 
agricultural culture of Korea. Euirimji Reservoir is forming a belt with neighboring 
Yongdusan  Mountain(龍頭山)  and  green  rice  paddy  and  field(淸田),  and  such 
topographic conditions are also associated with an issue of operating irrigation 
and water facilities. Thus, this study was conducted at the comprehensive level of 
citing various town chronicles(邑誌) and col ection of nobility’s works(文集) etc., 
which were manufactured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朝鮮時代).

First of al , fountainhead of Euirimji Reservoir is formed by the val ey water 

flowing from Yongdusan Mountain and huge amounts of spring water gushing out 
from the reservoir’s own substratum. For the foregoing reason, Euirimji Reservoir 
was able to secure clear and cold pondage throughout the year, but asked for a 
solid embankment which was called ‘Daejae’ (大堤, a large dam) at the same time. 
Meanwhile,  the  fact  that  the  structure  so-called  parent  reservoir(親池)-child 
reservoir(子池) type irrigation system was operated from the middle and late of the 
15th century is recorded in Hakgo(鶴皐) Kim Yi-man(金履萬)’s 「Euirimji Reservoir 
Records(義林池記文)」. In other words,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solved 
a problem of sharp drop amounting to approximately 300 meters and cold water 
temperature through the method of building a child reservoir under the Euirimji 
Reservoir, parent reservoir. In addition, the records also show that floodgate of 
Euirimji Reservoir of those days was a stack of stones made by piling up stones. 
The gate was converted into a water bottle type floodgate afterward. 

Parent  reservoir-child  reservoir  type  irrigation  system  of  Euirimji  Reservoir 

which were combined with such constant typed floodgate facility was handed 


background image

15~19세기 의림지(義林池)의 관개(灌漑) ․ 수리시설(水利施設) 연구 

 145

down to 18th~19th century. In other words, dams such as Daeyajijae(大也池堤) 
and Toejae(退堤) in the late 19th century correspond to a child reservoir, which 
means  that  parent  reservoir-child  reservoir  type  irrigation  system  enjoyed  the 
status of the original form in the history of irrigation facilities of Euirimji Reservoir.

Keywords  Euirimji  Reservoir,  irrigation  and  water  facilities,  fountainhead, 

embankment[dam], floodgate, parent reservoir, child reservoir, 15~19 centuries

논문 투고일 : 2016.11.6    심사 완료일 : 2016.11.25    게재 확정일 : 2016.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