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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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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설지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일반대학원 무형유산융합학과 무형유산학 전공 석사과정

Ⅰ. 머리말
Ⅱ. 횃불과 제등의 종류

1. 횃불[炬火]
2. 등롱(燈籠)과 초롱[燭籠]

Ⅲ. 발인행렬과 횃불과 제등

1. 거화(炬火)와 망촉(望燭)
2. 삼색초롱과 화철초롱

Ⅳ. 맺음말

국문초록

제등

(提燈)은 휴대용 등촉기구를 총칭한다. 발인행렬을 보면 횃불과 제등이 함께 

사용되었다

. 횃불은 제등 이전부터 자주 소용되었으며 제등이 일반화되기 이전까

지 횃불과 혼용되었다

. 횃불과 제등의 장점은 휴대성이다. 이동하면서 불을 밝힐 수 

있다는 점은 왕실의 발인행렬에서 필수적이었다

. 발인은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기 

때문에

, 행렬의 모습이 화려한 횃불과 제등(提燈)의 행렬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

. 제등은 신련과 대여 주변을 집중적으로 밝혔다. 제등은 밤길을 밝히며 다닐 수 

있다는 실용성과 왕실의 장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의 기구였던 것이다

. 뺷국장

도감의궤

뺸에 수록된 

<발인반차도>는 왕실에서 왕릉까지 상여의 이동행렬을 그린 

것이다

. 이를 토대로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의 역할에 관해 고찰해보았다. 

본 연구는 첫째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 횃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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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호

거화

(炬火)와 망촉(望屬)이 확인된다. 거화는 홰에 불을 붙인 것이며, 망촉은 긴 초

에 불을 붙인 것이다

. 제등으로는 등롱과 초롱이 사용되었다. 롱(籠)에 초를 사용하

는 초롱과 등을 사용하는 등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 두 번째로는 행렬 시 소용된 

횃불과 제등의 변천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 시대에 따라 거화와 망촉의 개수는 점

차 줄어들었으며

, 초롱과 등롱은 점차 증가하였다. 이는 시대상황의 변모와 제작기

술의 발전이 밀접한 요인이 되었다

.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의 종류를 살펴

보며 그 흐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

발인행렬에 사용되는 기물은 다양하다

. 그중 횃불과 제등은 대여와 신련에 집중

되었다

. 특정 위치에 존재하였다는 것은 불을 밝힌다는 실용적 기능을 갖추는 동시

에 의물의 하나로서 여겨졌던 것을 의미한다

. 발인행렬은 단순히 장례행렬 뿐 아니

, 백성들에게 왕실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뺷실록뺸과 

뺷국장도감의궤뺸 등의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발인행렬에 사용되었던 횃불

과 제등의 종류와 변천을 파악해볼 수 있었다

.

주제어

 국장, 의궤, 발인반차도, 조선시대, 제등, 등롱, 초롱,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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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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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횃불과 제등

(提燈)의 장점은 휴대성이다

.1 이동하면서 불을 밝힐 수 

있다는 장점은 행렬에서 단연 돋보였다

. 뺷국장도감의궤뺸에 수록된 <발

인반차도

(發引班次圖)

>는 국왕이 서거한 후 왕실에서 왕릉까지의 이동행

렬을 그린 것이다

.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는 발인의 특성상 행렬의 모습

은 화려한 빛의 행렬로 보였을 것이다

. 일반적으로 횃불과 제등의 실용

적 기능이 돋보이는 공예품이지만

, 특히 발인의 경우 왕실의 장엄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였다

.

국장

(國葬)은 왕실에서 손꼽히는 중대한 일이었다

. 그중에 발인행렬

은 왕릉까지 이동하는 행렬로 국장에서도 중대히 다뤄졌다

. 발인행렬

은 숙연함과 동시에 왕실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노출시키는 일이기 때

문이다

. 자시(子時, 오후 11시∼새벽 1시) 이후에 행해지는 발인은 엄청난 

수량의 제등을 필요로 했다

. 엄숙히 이뤄지는 행렬에 ‘빛’이 활용된 것

이다

.

어두운 밤길을 오랫동안 걸어야하는 경우

, 횃불과 제등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 횃불과 제등의 변천은 불을 붙일 때 생기는 그을음과 

불의 지속성이 관건이다

. 불을 붙일 때 필요한 재료는 싸리나무와 초, 

등이 있다

. 오랜 시간 동안 불을 들고 다녀야하기 때문에 최대한 들기 

1

김삼대자 논문 「이조시대 등촉기구에 관한 소고」

(이화여대 석사논문, 1968)에서 “提灯은 

실외조명기구의 

灯籠과 휴대용 조명기구인 燭籠으로 대별된다

”(51쪽)고 하였다. 본고는 

후자에 한하여 제등을 전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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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19호

편하고

,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손에 쥐고 다녀야 하

는 횃불보다 롱

(籠)을 만든 이유도 휴대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 바람을 

피하기 위해 등롱의

(燈籠衣)

2를 만들었다

. 횃불과 제등의 발달요인을 읽

어볼 수 있다

. 이처럼 발인행렬을 중심으로 당시 횃불과 제등의 종류와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횃불과 제등에 관한 연구는 미진하다

. 현재까지 등에 관한 연구는 총 

5건이다. 유물을 토대로 통사적으로 서술한 것이 대부분이며,3 전통 등

(燈)에 관한 콘텐츠 논문은 기존의 양식사와 연구흐름을 달리하고 있어 

특징적이다

.4 허나, 불교행사에 소용된 등에 한정시켜 바라보고 있다

는 점이 아쉽다

.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횃불과 제등은 실용적 역할을 

가지고 다양한 소용범위를 갖춘 기물

(器物)이다

. 이에 대한 입체적인 연

구가 필요하다

.

본 연구는 문헌기록을 토대로 제등의 함의를 인과론적으로 보려한

. 연구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이다. 2장에서는 횃불과 제등의 종류와 

조선시대 전반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았다

. 3장에서는 발인행렬 시 사

용된 횃불과 제등의 개수와 위치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 발인행렬은 밤

에 이뤄지는 행렬이었으며

, 실용적 역할 외에도 장엄적 성격이 더해지

2

등롱의

: 천과 유리, 종이 따위로 초와 등에 둘러씌운 것. 가령 청사초롱을 보면 비단을 

둘러서 은은하게 불빛이 나오도록 한다

. 이는 장식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불이 쉽게 꺼지

지 않기 위함이다

.

3

김삼대자

, 「이조시대 등촉기구에 관한 고찰」, 이화여대 석사논문, 1968; 구방희, 「조선조 

등기에 관한 연구」

, 홍익대 석사논문, 1980; 정승은, 「우리나라 전통 등기구의 조형성에 

관한 연구」

, 상명여대 석사논문, 1994; 김수경, 「조선시대 등기에 관한 연구」, 성신여대 

석사논문

, 2005 등이 있다.

4

이윤수

, 「전통등의 현대적 활용을 위한 콘텐츠 연구」, 뺷콘텐츠문화뺸 제8호, 문화예술콘

텐츠학회

, 2016, 5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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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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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경우이다

. 문헌기록과 관련 회화작품을 중심으로 발인행렬 시 사용

된 횃불과 제등에 종류와 소용범위에 대해 파악하는 것을 연구목적으

로 삼고자 한다

.

Ⅱ. 제등의 종류와 의미

1.

횃불[炬火]

초롱과 등롱 이전에는 제등의 역할을 횃불이 하였다

. 횃불을 거화(炬

)라 하였다

. 뺷집운(集韻)뺸에서는 거(炬)를 “갈대를 엮어 불을 태운 것이

[朿葦燒也]

”라 하여 횃불의 한자어인 것을 알 수 있다. 싸리나 갈대, 노

간주나무 따위를 묶어 사용했다

. 대표적으로 싸리나무로 만들어 썼는

, 이를 축거(杻炬)라 한다. 싸리나무는 전국적으로 자생하며, 수분이 

적고 조직이 견고하여 습기가 많은 날에 불을 붙여도 잘 타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 횃불이 지니는 강한 

불길은 그을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 싸리나무의 장점으로 인해 지속

적으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

횃불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왕실에서 사용되어왔다

. 태종 시기의 기록

을 보면 혼인 시 사용가능한 횃불의 개수를 규정해두었다

. 관직이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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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9호

자는 

60개를 사용하도록 하였고, 5․6품 이하에게는 40개로 한정하였

.5 관직에 따라 사용가능한 개수를 규정해 놓았다는 점을 통해 횃불

이 실용적 역할과 더불어 의례적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횃불이 가지는 의례적 성격은 실용적 성격과 굉장히 밀접하

. 바로 불길이다. 횃불은 거센 불길을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

으며

, 강한 불길을 통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6 <그림 1>을 

보면 횃불의 규모를 통해 해당 의례의 규모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

. 이러한 이유로 왕실행사에서 횃불의 여부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왕이 사냥을 나갈 때 횃불을 올리지 못한 죄로 책임자 

신환과 부정이 

60대의 곤장을 맞았는가 하면,7 행행(行幸) 시 횃불을 설

5

뺷太宗實錄뺸 卷 35, 태종 18년(1418) 5월 3일. “一, 炬火, 官高者六十, 五六品以下四十.”

6

횃불의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에도 확인할 수 있다

. 올림픽 기간 중 주경기장까지 성화(聖

)를 들고 뛰며 개회식을 고조시키는 방식도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올림픽에서 개

회식을 고조시키는 성화 릴레이가 시작된 것은 

1936년 독일 베를린 대회 때부터이다. 나

치정권 하에 고안된 성화봉송이기에 지속 여부가 꾸준히 논의되었다

. 결국 올림픽의 하

나의 

‘전통’으로서 존속되어오고 있다.(「橄欖가지로 빠톤삼고 올림픽 聖花繼走」, 뺷동아일

뺸, 1934.12.2 참고)

<그림 1> 김홍도, <月夜船遊圖>(조선 19세기, 71

✕19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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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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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지 않아 사재감

(司宰監)

 관리 4명에게 태(笞) 50대 혹은 장(杖) 90대 등

을 벌하고 문책을 당했다

.8 궁중의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는 횃불이 소

용되었던 것이다

. 해가 지기 시작할 때부터 횃불이 항시 준비되었을 것

이다

. 즉, 임금이 이동하는 대부분 횃불이 준비되었다. 때문이 엄격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 이를 전담하는 서리의 존재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 즉, 왕실에서 횃불의 소용빈도가 높았으며, 이동에 있어서 

필수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

왕이 거둥하는 길과 장소에는 항상 횃불을 사용하게 하였다

. 거둥 중 

길이 어두워질 수도 있다는 이유도 물론 있을 것이다

. 동시에 불길로서 

백성들에게 왕의 성스러움을 가시화하였던 것이다

. 이러한 이유 때문

에 신하들의 경우

, 의례 시 사용가능한 횃불의 규모를 규정하였다. 국

왕의 경우 거둥 시 여러 개의 횃불을 필히 설치해 두도록 하였다

. 횃불

을 통해 계급의 분별을 시각화시킨 것이다

. 횃불의 사용여부 및 개수는 

계급에 따라 엄연히 달라져야 했었다

. 특히 천민의 경우, 성대한 횃불

의 사용을 규제하였다

.9 조선 중기까지 왕실에서는 실용성과 장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기물로서 횃불을 애용하였다

.

7

뺷世祖實錄뺸 卷 14, 세조 4년 10월 5일. “사재감 주부 신환과 부정 원맹수는 횃불[炬火]을 미
처 가져다 올리지 못하였으니

, 장(杖) 60대에 해당합니다[司宰注簿申渙、副正元孟穟炬火不

及齎進

, 杖六十].”

8

뺷世祖實錄뺸 卷 14, 세조 4년 12월 26일. “사재감 관리들이 성상께서 행행(行幸)하셨다가 환
궁하실 때에 횃불

[炬火]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판사 유사는 태(笞) 50대에 처하고, 주부 정

괄은 장

(杖) 60대에, 직장 김숭은 장 70대에, 부정 원맹수는 장 90대에 처하소서[司宰監官

吏行幸還宮時不設炬火

, 判事柳泗笞五十, 注簿鄭佸杖六十, 直長金嵩杖七十, 副正元孟穟杖九十].”

9

뺷成宗實錄뺸 卷 191, 성종 17년 5월 29일. “부상 대고의 천인(賤人)들이 장송(葬送)할 때에 횃

[炬火]을 성대하게 베푸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그것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입법(立法)

해서 엄히 금하도록 하라

[商賈賤人葬送之時, 盛設炬火, 甚不可, 其令禮曹立法痛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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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9호

2. 

등롱(燈籠)과 초롱[燭籠]

제등은 휴대용 등이다

. 명칭의 구분은 불을 켜는 재료에 따라 크게 등

롱과 초롱으로 나눠진다

. 등잔[燈]으로 불을 킨 것을 등롱, 초[燭]를 넣어 

불빛을 낸 것을 초롱이라 한다

. 등롱과 초롱의 거의 구조가 유사하다. 

구조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눠지는데

, 손잡이를 뜻하는 롱(籠)과 제등의 뼈

대를 뜻하는 내골

(內骨)

, 내골 안에 초나 등을 넣고, 내골 위에 깁[紗]이나 

종이를 감싸는데 이를 등롱의

(燈籠衣)라 한다

. 대롱의 재료는 주로 대나

무와 같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 내골의 경우 유기나 철 등을 이용해 만들

었다

. 뺷성호사설(星湖僿說)뺸에 보면 등롱 제도에 관한 설명이 있다. 등롱

은 대나무로 손잡이를 만들고 사롱

(紗籠)

 안에 등잔을 넣어 한 쌍으로 마

주 비치니 가히 가전

(家傳)의 법이 될 것이라 설명하였다

.10 등롱은 내골 

위에 손잡이를 달아

, 야밤에도 밝게 다니거나 걸 수 있도록 하였다. 

등롱과 초롱은 굉장히 넓은 분야에서 실용적으로 쓰였다

. 뺷계산기

11을 보면

, 황제가 새벽이나 밤에 거둥할 때나 혹은 조관들이 밤에 

다닐 때

, 시장에서 점등(點燈)을 할 때 모두 등롱을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2 어두운 밤거리를 다니기에 등롱과 초롱은 굉장히 유용하였던 

것이다

. 이외에도 등롱은 종교적 행사에서도 애용되었다. 불교가 성행

10

뺷星湖僿說뺸 14卷, 「人事門」. “余剏為燈籠、之制竹、造而紗籠、之內懸油釭䨇、設對照亦可、為
家傳之法

.”

11

계산기정

(薊山紀程) : 조선 순조(純祖) 3년(1803) 음력 10월 21일에 동지사(冬至使)가 임금

께 하직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 이때 수행한 한 이름 없는 선비가 연경(燕京)을 왕복하

면서 노정

(路程)에서의 견문과 감회를 적은 한시를 일기체로 편차한 것.

12

뺷薊山紀程뺸 5卷, 「附錄」. “皇帝曉夜動駕及朝士夜行. 市鋪點燈. 一皆用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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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15

하던 고려는 물론이고

, 조선 전기까지 등롱은 연등회와 관련하여 자주 

소용되었다

. 아래의 뺷고려사뺸 기록을 통해 이미 고려시대에 등롱의 제

도가 정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소회일 좌전

. (…중략…) 전중성(殿中省)에서는 부계의 상하 좌우에 등

(燈籠)을 진열하고, 전정(殿庭)에는 채산을 설치한다.13

이렇듯 등롱의 발전은 불교와 밀접했을 것이다

. 실용적 역할과 더불

어 불물

(佛物)로서의 의미가 강한 기물이었다

. 조선 전기까지 왕실에서 

등롱의 제작은 일상용은 물론이며

, 특히 연등회나 팔관회를 위한 연등

(燃燈)으로서 중요시 여겨졌다

. 암자의 법석(法席)을 배설하는 데 필요한 

등롱을 궁중에서 직접 준비하였다는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14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대표적인 불교행사에

서 사용되는 등롱은 화려하면서도 엄격한 제도 아래에서 마련되었다

주옥

(珠玉)으로 정교히 등롱을 만든다거나

,15 나인에게 등롱 제작 감독

을 맡기는 등 왕실에서 등롱의 제작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6 실용

적 역할만을 지녔다면 등롱의 외관을 화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불교

행사를 위해 제작되는 등롱은 여러 장식을 갖추었으며 자연히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 등롱 제작의 폐단을 불사의 혁파를 연결시켜 상서하

13

뺷高麗史뺸 卷 23, 「嘉禮雜儀」. “上元燃燈會儀. 小會日坐殿. (…中略…) 殿中省列燈籠於浮階之上
下左右

, 設彩山於殿庭.”

14

뺷世宗實錄뺸 卷 13, 세종 3년(1421) 9월 4일. “設法席于大慈庵. 凡衣鉢燈籠之具, 皆以本宮之財備之.”

15

뺷世宗實錄뺸 卷 114, 세종 28년(1446) 10월 15일. “又以珠玉爲燈籠, 極其精巧.”

16

뺷世宗實錄뺸 卷 16, 세종 4년(1422) 6월 21일. “命內人監造衣鉢燈籠, 以備讃經之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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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19호

는 등 중기에 이르러서는 호사로운 등롱 제작을 지적하는 상소가 다수 

올라오게 된 것이다

.17 불교행사를 위한 등롱의 제작은 숭유억불 정책

에 의해 점차 줄어들게 된다

.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실용적 역할로서는 

등롱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은 당연하다

.

뺷설문뺸에서는 촉(燭)을 뜰 안에 사용하는 횃불을 의미하였다.

18

 횃불

의 의미로서 초가 사용되었다가 밀랍으로 만든 초가 발명되면서 초의 

의미가 정립되었다

. 고려시대까지도 초는 여전히 귀했던 것으로 보인

. 고려 초기까지는 왕부(王府)19에서 공회(公會)를 하더라도 초를 사용

하지 못하게 하였다

.20 점차 초 제작법을 개발되기 시작하여 여러 종류

의 초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뺷사계전서뺸를 보면, 초롱에 대한 정의

를 한 것이 있다

. 초롱은 네 개 또는 두 개로 쇠사슬이나 대오리로 격자

(格子)를 만들어 아래위로 둥근 판자를 대고 붉은 비단이나 기름먹인 종

이를 씌운 다음

, 그 안에 밀초[蠟燭]를 설치한다고 하였다.21 초롱의 생산

은 점차 용이해진 것으로 보인다

. 뺷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뺸를 보면 

금홍촉

(金紅燭)

, 심홍촉(心紅燭)과 같이 색상과 관련된 초의 종류가 언급되

기도 하며

, 홍사촉(紅四燭), 홍육촉(紅六燭), 홍팔촉(紅八燭)과 같이 크기에 

17

뺷文宗實錄뺸 卷 1, 문종 즉위년(1450) 3월 5일. “신 등이 또 듣건대 채옥을 구워 만들고 등롱
은 구슬로 둘러서 화려하고 사치한 장식을 극도로 해서 부처에게 아첨을 구하니

, 다만 동

(童心)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폐단을 장차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상서(上書)

하여 정파

(停罷)하기를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윤허하지 않았다[臣等又聞燔造彩玉, 

纓絡燈籠

, 以極華侈之飾, 求媚於佛, 非特有童心, 弊將莫救矣. (…中略…) 上書請罷, 而上猶不允].”

18

뺷說文解字뺸. “庭燎火、燭也.”

19

의금부

.

20

뺷高麗圖經뺸 22卷, 「秉燭」. “王府公會, 舊不然燭. 比稍稍能造, 大者如椽, 小者亦長及二尺, 然而終
不甚明快

.”

21

뺷沙溪全書뺸 33卷, 「喪禮備要」. “四或二、鐵索或竹木、爲格上下有圓板. 衣以紅綃、或用油紙. 內
設蜜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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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17

따라 초의 명칭이 분류되고 있다

.22 초

의 명칭이 다양해진 것은 그만큼 초의 

생산이 발전되었으며

,  다양하게 소용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왕의 거둥길에는 횃불 대신 초롱이 

점차 일반화된다

. 영조 시기에 국왕의 

능행 시 횃불 대신 초롱으로 대신하는 

것이 어떠냐는 상소가 올라온다

.23 횃

불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 

횃불을 제작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 인

력을 동원하여 횃불을 설치해야 한다

이러한 공정 모두 백성들에게는 폐단과 고역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

. 짧

은 기간 내에 싸리나무를 마련하여 다량의 횃불을 만들어야하기 때문

에 해당하는 마을 내에서는 폐단이 생겨버린다

. 또한, 다량의 횃불을 

설치하기 위한 인력은 해당마을의 백성들의 노동력이 투여될 수밖에 

없다

. 특히 행행이 잦았던 영조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

이 문제점의 대안이 바로 초롱이었다

. 초롱의 장점으로는 횃불에 비

해 그을음이 적다

. 갑사로 만든 등롱의(燈籠衣) 덕분에 미적으로 아름다

22

뺷英祖定順王后嘉禮都監儀軌뺸 「一房儀軌」. “親迎動雷時, 代用畫龍燭, 金紅燭三雙, 心紅燭具, 紅四
燭五雙

, 而紅六燭四十, 紅八燭四十, 造作精細, 令義盈庫命何.”

23

뺷承政院日記뺸, 영조 4년(1728) 1월 24일. “而第臣愚意, 略加變通, 以燭籠, 代其植炬, 而間植松

, 則庶有一分除弊, 亦無火光熹微之慮矣. 竊計一炬運植之費, 較諸燭籠一隻, 則多寡相等, 而炬則

一爇之後

, 更無所用.”

<그림 2> 초롱(조선 19세기, 360

✕1,120m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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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19호

웠으며

, 무엇보다 불빛이 밝고 가벼워 들고 다니기가 용이하다. 궁극적

으로 횃불은 다량의 목재가 소용되나 값이 싸다는 장점과 재사용이 불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 초롱은 <그림 2>와 같이 갑사와 철롱, 초로 

구성되어 있다

. 재료들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에 사용했던 횃불보다 두 배의 비용이 들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인해

, 꾸준히 애용되게 된다.

민가에서 혼례와 상례 시 초롱이 필수적이었다

. 뺷목민심서뺸에서 돈

이 없어 결혼이 어려운 이들에게는 관아에서 

“관에서 돈과 포목 약간을 

내어서  도와주고

,  도포(道袍)ㆍ사모(紗帽)ㆍ띠[帶]ㆍ신[靴]ㆍ초롱[燭籠]ㆍ흑

(黑衣)

 등속은 관에서 빌려 주도록 한다”고 전한다.24 최소한의 혼례

의 경우에도 초롱은 필히 갖춰야 할 품목 중에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관아에서 빌려주었다는 것은 혼례에 필수적인 동시에 적은 돈으

로는 갖추기가 어려운 것들이다

. 도포와 사모, 띠, 신, 흑의는 혼례 시 

갖춰야 할 복식으로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아니었

. 초롱은 복식의 일종은 아니나 혼례 시 필수적인 기물 중 하나로 밀

초와 비단으로 등롱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민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되는 것이 아니었다

[紗]으로 등롱의를 만들어 등롱과 초롱을 만든 것은 청사초롱

, 홍사

등롱으로 불린다

. 내골과 등롱의를 활용하여 제등의 종류를 다양하게 

만들어 아래와 같이 품계에 따라 품등

(品燈)을 나눠 사용하도록 하였다

.

24

뺷牧民心書뺸 「愛民」 제3조 진궁(振窮). “官出錢若布若干以助之. 袍帽帶靴燭籠黑衣之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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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19

어전의 초롱은 홍사를 재질로 하고 청사로 상하에 선을 친다

. 협연촉롱

은 홍사로 한다

. (…중략…) 동궁의 촉롱은 흑사를 지질로 하고 홍사로 상

하에 선을 친다

. (…중략…) 군문의 촉롱은 청사를 지질로 하고 홍사로 상

하의 선을 친다

.25

품등의 구분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갑사의 색상을 중심으로 구분

하였다

. 복식 제도를 보면 홍색을 제일로 하였듯이, 등롱의 또한 홍색

을 제일로 쳤다

. 임금의 경우 모두 홍색으로 사용하였으며, 왕세자는 

청색을 사용하였다

.26

뺷속대전뺸에서는 왕은 홍색으로 동일하며, 왕세자의 경우는 흑색을 

사용한다고 기록되어있다

. 왕세자의 경우, 청색과 흑색으로 각기 다르

. 청색의 경우 의궤에서도 동일한 기물을 청색이라고도 하고, 흑색이

라고도 하는 경우가 있었다

. 청색과 흑색의 경계가 분명히 있었으나, 

혼용하여 사용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27 군문은 왕세자와 동일하게 

25

뺷續大典뺸 券 4, 「兵典 軍器」. “動駕時, (…中略…) 御前燭籠, 紅紗爲質, 靑紗上下緣, 挾輦燭籠紅紗, 
挾輦軍服色

, 紅號衣, 東宮燭, 籠黑紗爲質, 紅紗上下緣, 挾輿燭籠, 黑紗, 挾輿軍服色, 黑號衣, 軍門

燭籠

, 靑質紅緣, 京外同.”

26

뺷英祖實錄뺸 卷 40, 영조 11년(1735) 8월 12일. “戊寅/命御前令旗及燭籠, 皆用紅色, 世子宮用靑

. 舊制, 御前及軍門皆用靑色, 李森嘗言 : “宜用紅色 以別之.” 至是有是命.”

27

청색과 흑색을 혼용하여 사용한 것은 염색의 원리로 이해해볼 수 있다

. 흑색을 만드는 방

계급

등롱의

계급

등롱의

왕․왕후

홍색

청색

(上下)

군문

청색

홍색

왕세자

청색

/흑색

홍색

(上下)

민가

(혼례) 

청색

홍색

<표 1> 조선시대 품등에 따른 등롱의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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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19호

청색에 홍색으로 단을 댔다

. 그러나 민가에서는 특별한 날에 초롱을 사

용할 수 있었다

. 관아에 비치된 청사초롱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우리에

게 

‘청사초롱’이란 명칭이 익숙한 이유도 다른 초롱과 달리 민가에서 종

종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민가에서 제등은 흔히 쓸 수 있는 기물이 아니었다

. 다만 관혼상제와 

같이 특별한 의례가 있을 경우에는 관아에서 빌려 쓸 수 있었다

. 민가

에서는 횃불

(거화(炬火))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Ⅲ. 발인의식과 제등의 소용

1. 

거화(炬火)와 망촉(望燭)

거화는 횃불을 의미한다

. 망촉은 밀초를 활용하여 횃불처럼 들고 다

니는 것으로

, 거화와 마찬가지로 발인 시 전체행렬을 담당하였다. 뺷세

종실록

뺸에 따르면 거화와 함께 망촉이 행렬을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8 세종 시기에 발인 반차에 대한 제도를 보면, 천여 개의 횃불 중

법 중 하나는 청색을 내는 쪽

[藍]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색을 진하게 입히는 경우가 있다. 

, 청→ 흑으로 가는 색의 전개가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한 청색의 경우, 청색과 흑

색으로 명칭을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

28

뺷世宗實錄뺸 卷 134. “炬五百, 分左右列於儀仗之外. 次望燭五百, 分左右列於儀仗之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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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21

에서 

4백 80개는 권무(權務)가, 나머지 20개는 내시(內侍)가 쥐고 있다.29 

이러한 기나긴 행렬은 날이 밝으면 그치도록 하였다

.

불을 밝힌다는 의미는 망촉과 거화 모두 같았으나

, 이 둘은 조금 성

격이 달랐던 것 같다

. 뺷세종실록뺸에 따르면, 거화 5백 개는 좌우로 나누

어 의장

(儀仗)의 밖에 들어서고

, 다음에 망촉(望燭) 5백 개는 좌우(左右)로 

나누어 의장

(儀仗)

 안에 늘어세웠다.30 이는 아마 불길의 규모에 따라 나

눈 것으로 보인다

. <그림 3>에도 볼 수 있듯이 횃불의 불길은 망촉에 

비해 크다

. 망촉의 역할은 거센 횃불을 보조하는 역할로 보인다. 발인 

행렬 시 의장행렬의 바깥에 위치한 거화군들은 엄중한 책임감을 가져

야 했다

. 거여(車轝)와 의장을 드는 이들과 동일하게 하무[銜枚]31하도록 

명하였다

.32

29

뺷世宗實錄뺸 卷 134. “四百八十權務執之在先, 二十, 內侍執之在後. 凡燭炬, 皆天明而止, 侍衛如初.”

30

뺷世宗實錄뺸 卷 134. “炬五百, 分左右列於儀仗之外. 次望燭五百, 分左右列於儀仗之內.”

31

하무

[銜枚] : 행진 시 떠들지 못하도록 막대기를 물리는 행위.

<그림 3> ‘거화, 망촉’ 일부 발췌(<발인반차도>, 

뺷선의왕후국장도감의궤뺸,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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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19호

다량의 거화 및 망촉의 사용은 영조 시기부터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

. 뺷인조실록뺸에 따르면 “망촉과 횃불을 정제하지 않아서 대여의 앞뒤

는 불빛이 희미했으며 성 밖에 채 이르기도 전에 전부 꺼져 버렸으니 

지극히 놀랐다

”는 기록은 당시 왕실에서도 깨끗한 기름을 생산하는 것

이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33 거화 대신 초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영조 시기에 들어서면서이다

. 영조 4년에 왕의 거둥길에 거화[炬]가 아

닌 초롱으로 대신하기로 하였음은 횃불의 역할이 거화에서 초롱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4

‘갈대를 묶어 베로 둘러싸고 거기에 밀랍을 녹여 부었다’ 했으니 지금 납

촉과 같은 것이다

. 지금 혼례에 쓰는 자촉이라는 것이 그것이니, 예의 근본

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왔으나 쓰기에 불편하다

. 납촉은 오직 부유한 

집에서 쓰는 것이니

, 가난한 선비가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는가?35

민가에서 초롱의 사용은 거의 불가능했다

. 영조 시기의 위의 기록을 

보면

, “납촉은 오직 부유한 집에서 쓰는 것이니, 가난한 선비가 어찌 마

련할 수 있겠는가

”라 통탄하고 있다. 초를 만들 때 들어가는 밀랍은 여

전히 고가품이었다

. 횃불과 달리 등유와 초의 가격이 높았으나, 가장 

큰 장점은 집안 내부에서도 지속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32

뺷世宗實錄뺸 卷 134. “凡車轝儀仗炬火捧持者, 皆枚.”

33

뺷承政院日記뺸, 인조 10년(1632) 10월 8일. “發引時, 望燭及炬火, 不爲整齊, 大轝前後, 火光熹微, 
未及城外

, 全然滅絶, 極爲可駭.”

34

뺷英祖實錄뺸 卷 15, 영조 4년(1728) 1월 24일. “陵幸時各邑植炬, 以燭籠代之.”

35

뺷星湖僿說뺸 卷 14, 「人事門, 祭器祭服」. “禮疏云以, 葦爲中心, 以布廛之, 若令蠟燭. 令俗婚禮, 有刺
燭之

, 稍即其物, 亦不忐本之意, 然用之, 不便蠟燭. 有富貴家所需, 貧士家有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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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23

밤에 식사를 하거나

, 글을 읽기 위해서는 횃불의 존재는 초와 등을 대

체할 수 없었다

. 조선 중기에 들어서는 횃불과 등롱, 초롱의 사용이 저

변화가 된다

. 그러나 정제된 기름과 밀랍의 값어치는 여전히 일반 민가

에서는 손쉽게 구매하기가 어려운 물품이었던 것이다

.

2. 

삼색초롱과 화철초롱

세종 시기 발인의식행렬에 관한 의장 제도를 보면 제등의 사용개수

에 대해 규정해 두었다

. 여기서 등촉과 화철초롱은 제등에 속하며, 망

촉과 거화는 횃불에 속한다

. 발인 시 망촉과 거화의 행렬은 각각 5백 개

씩을 제도로 정하였다

.

등촉

(燈燭)으로는 백초롱[白燭籠]이 둘, 청초롱이 둘, 홍초롱이 둘, 망촉

(望燭)이 5백, 화철롱(火鐵籠)이 40, 거화(炬火)가 5백, 만사(挽詞)36가 55장

이다

.37

발인행렬을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서두의식

, 중심의식, 마무리

의식으로 나눠진다

. 서두의식에서는 당부(當部)의 도사(都司)가 서고, 다

36

만사

(挽詞) : 국장 시 고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글이 적은 것을 깃발[旆]처럼 장대에 묶

은 것이다

.

37

뺷世宗實錄뺸 卷 17, 세종 4년(1422) 9월 6일. “燈燭 : 白燭籠二, 靑燭籠二, 紅燭籠二, 望燭五百, 火
鐵籠四十

, 炬火五百. 挽詞五十五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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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19호

음에 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 예조판서(禮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가 선

. 그다음에 대사헌(大司憲)이 좌우로 나뉜다. 중심의식에 흉의장과 대

여가 나오며

, 마무리의식에는 종친과 모든 문관, 무관이 서고 감찰 2원

이 선 뒤

, 의금부의 당하관 2원이 좌우로 선다. 사대와 우상군사가 차례

로 뒤따르며 간다

.38

제등이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곳은 후반 부분이다

. 후반부의 유거(柳

)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 견여(肩輿)와 애책요여(哀冊腰輿), 명기요여(名器

腰輿

)

, 대여(大輿), 혼백거(魂帛車), 향정자(香亭子), 혼백여(魂帛輿), 시책보요

(諡冊寶腰輿)

 순으로 연여가 지나간다. 아래의 <표 2>는 전체 발인행렬 

중 연여가 지나가는 부분만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39

거화 

500개와 망촉 500개, 총 1,000여 개의 횃불이 연여를 둘러싸고 

있다

. 제등으로 인해 빛이 몰려있는 부분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대

38

김정진

, 「조선시대 국장도감의궤의 반차도 연구(Ⅱ)」, 뺷한국복식학회지뺸, 한국복식학

, 1996, 22쪽.

39

표에 불빛을 담당하는 부분을 음영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

<발인반차> 中 대여와 혼백거․혼백여 부분

炬 二百五十

望燭 內官 二十

望燭 權務 二百四十

黼翣 執鐸司馬 八

紅繡鞍馬

挽詞 

二十

火鐵籠

二十

三色燭籠

柳車 羽葆 …

肩輿

哀冊
腰輿

服玩
腰輿

明器
腰輿

大輿

魂魄車

香亭子

魂魄輿

諡冊寶腰輿

黼翣 執鐸司馬 八

靑繡鞍馬 十

挽詞 
二十

火鐵籠

二十

三色燭籠

望燭 內官 二十

望燭 權務 二百四十

炬 二百五十

<표 2> 

뺷세종실록오례뺸(1454), 「發引班次」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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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25

여와 혼백거

, 혼백여에 빛이 집중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대여는 왕

의 시신이 담겨져 있는 곳이며

, 혼백거와 혼백여는 왕의 정신을 담아놓

은 연여이다

. 대여와 혼백여, 혼백거에 집중되어 있는 불빛들은 전체 

발인행렬 중 핵심적인 곳에 배치되어있다

. 예부터 유교에서는 ‘생사여

(生死如一)

’이라 하여,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 보았다.40 당시 

죽음은 혼백의 분리로 보았기 때문에

, 혼을 담은 신련과 시신을 담은 

대여

(大輿)로 나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제등의 역할은 바로 발

인 시 긴 행렬 중 신련과 대여를 강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 등롱의의 

색상과 빛의 밝기와 개수에 따라 행렬 시 제등의 시각적 효과를 조절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이유로 선조들은 야밤에 행해지는 행렬에 ‘빛’을 활

용한 것이다

.

전체행렬을 담당했던 횃불과 달리

, 삼색초롱과 화철롱은 특정위치

를 담당하였다

. <그림 4>처럼 삼색초롱은 신련 주변에 백초롱 둘, 청초

롱 둘

, 홍초롱 둘이 위치하였다. 화철롱은 대여 주변에 위치하여 40부

를 두게 하였다

. 삼색초롱은 가례도감에도 등장하는 제등이다. 가례도

감의 경우 대낮에 행사가 이뤄지므로

, 제등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낮다. 

그렇다면 삼색초롱의 의미가 무엇일까

? 바로 색(色)에 있다. 이름 그대

로 삼색초롱은 세 가지 색을 갖춘 등롱의가 핵심이다

. 오방색 중 백(白)

과 청

(靑)

, 홍(紅)의 조화를 주었다. 화철롱과 달리 삼색초롱은 ‘빛’보다

는 

‘색’을 활용한 예로 볼 수 있다.

왕의 죽음이 아닌 왕세자의 죽음의 경우에는 예외가 발생한다

.41 예

40

양승이

, 뺷한국의 상례뺸, 파주: (주)도서출판 한길사, 2010, 21쪽.

41

왕과 왕비의 경우는 동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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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19호

장도감의 

<발인반차도>를 살펴보면, 삼색초롱이 아닌 긴 행렬의 오색

초롱을 확인할 수 있다

. 정조 시기에 한 번의 세자 예장과 사도세자의 추

숭사업의 일환인 천봉도감의궤가 있다

. 뺷문효세자예장도감의궤뺸(1786)

와 

뺷장헌세자영우원천봉도감의궤뺸(1789)이다. 오색초롱을 보면, 흑(黑), 

(白)

, 황(黃), 청(靑), 홍(紅)색 순서로 <그림 5>와 같이 오방색이 열거되

어 있다

. 각 색마다 좌우로 4부씩(총 8부) 들어 행렬하고 있다. 그렇다고 

삼색초롱 대신으로 오색초롱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 신련 뒤에 삼

색초롱이 각 

2부씩 있으며, 그 뒤에 오색초롱이 총 40부가 이어 행렬하

였다

. 그 뒤에 화철초롱 40부가 따라 들어온다. 이는 왕의 발인반차의 

제도와 동일하게 삼색초롱과 화철초롱이 그대로 등장하며

, 오색초롱 

40부가 추가된 것이다.

<그림 4> ‘삼색초롱’ 일부 발췌(<발인반차도>, 

뺷숙종국장도감의궤뺸,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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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27

제도를 재정비했던 영조 시기를 지나면 제등의 사용에 두드러진 변

화가 나타난다

. 명칭과 소용되는 제등의 개수가 새로이 규정된다. 전범

이 새롭게 세워진 것이다

. 거화와 망촉은 사라지며, 삼색초롱의 소용색

상은 그대로이나

, 그 위치가 변화한다. 뺷국조상례보편뺸을 보면 혼백요

(魂帛腰輿)

 주변에 홍초롱, 청초롱, 백초롱의 순서로 행렬이 이뤄진다. 

제등의 종류와 개수를 

<표 3>으로 정리하였다. 표를 보면 청초롱의 경

우 흑초롱

[黑燭籠]과 혼용하여 사용한 경우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 그러

다 재정비 이후 흑초롱이란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 청초롱으로

만 정확히 명기되고 있다

. 화철롱은 그 수가 그대로이며 대여를 중심으

로 

20부씩 좌우를 지켰다.

<그림 5> ‘오색등롱’ 일부 발췌(<발인반차도>, 

뺷문효세자예장도감의궤뺸,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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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19호

아래 

뺷일성록(日省錄)뺸의 기록을 살펴보면, 등롱의에 필요한 직물의 

종류와 양을 확인할 수 있다

. 전체적으로 깁(紗)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보통 갑사

(甲紗)라 한다

. 갑사는 지경사와 꼬임경사를 규칙적으로 배열

하여 직물 전체가 벌집과 같은 작은 무늬를 놓은 것이다

.44 등롱의 뿐

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갑사에 관한 기록은 다수 등장 할 만

큼 애용되었던 직물이다

. 갑사는 조직 특성상 잘 비치기 때문에 제등의 

특성의 불빛을 은은히 드러내는 등롱의로서 적합하였다

.

청촉롱 

1쌍의 질감인 남운사 3자 8치와 상층감인 다홍 운사 3자 8 치, 홍

촉롱 

1쌍의 질감인 다홍 운사 3자 8치와 상층감인 남운사 3자 8치, 백촉롱 1

쌍의 질감인 백운사 

3자 8치와 상층감인 남운사 3자 8치, 방촉롱 2쌍을 다시 

42

삼색초롱 중 청초롱이 아닌 흑초롱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국장도감의궤

.

43

의궤에 따라 대초롱

[大燭籠], 화철롱[火鐵籠], 홍초롱[紅燭籠]이라 쓰였으나, 화철롱이라 통

칭하였다

.

44

심연옥

, 뺷한국직물오천년뺸, 고대직물연구소 출판부, 2002, 181쪽.

종류

국장도감의궤의 종류와 개수

사용개수 사용위치

거화

(炬火)

숙종

, 경종

2

약 

500개 발인반차 

전체

인경왕후

, 인현왕후, 정순왕후, 선의왕후

4

망촉

(望燭)

효종

, 현종, 숙종, 경종

4

약 

500개 발인반차

전체

인현왕후

, 선의왕후, 명성왕후

3

삼색초롱 중

흑촉롱

(黑燭籠)

42

인조

, 효종

2

4부

혼백요여

혼백거

선의왕후

, 장렬왕후, 명성왕후

3

삼색초롱 중

삼색초롱

숙종

, 경종, 영조

3

12부

혼백요여

혼백거

인원왕후

, 선의왕후, 정선왕후

3

화철롱

(火鐵籠)

43

인조

,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5

40부

대여

인경왕후

, 인현왕후, 선의왕후, 장렬왕후, 명성왕후, 정성왕후 6

<표 3> 영조 이전에 발인행렬 시 소용된 제등의 종류와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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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29

바르는 감인 다홍 운사 

8자, 선감은 아청 갑사 1자 6치, 지석함의 안을 싸는 

홑보감인 홍화화주 

11자와 밖을 싸는 홑보감인 홍세 주 17자 5치, 지석의 격

자핫보감인 화화주 

15자, 영자감인 남모단 6자이다.-5월 29일이다.45

<그림 6>을 보면 알겠듯이 반차도를 보면 삼색초롱의 등롱의가 단

색으로만 이루어진다

. 그러나 영정조 시기부터는 <그림 7>과 같이 윗 

단이 대어져 있다

. 홍초롱은 상단에 청색이, 청초롱은 상단이 홍색으

, 백초롱은 청색으로 대어져 삼색초롱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

. 화철초롱 또한 홍색 바탕의에 상하단으로 청색이 대어져 있다. 상

하단에 다른 색을 대는 것은 공정이 두 배로 걸리는 일이다

. 이러한 변

45

뺷日省錄뺸, 정조 10년(1786) 7월4일. “靑燭籠一雙質次藍雲紗三尺八寸上層次多紅雲紗三尺八寸
紅燭籠一雙質次多紅雲紗三尺八寸上層次藍雲紗三尺八寸白 燭籠一雙質次白雲紗三尺八寸上層次藍
雲紗三尺八寸方燭籠二雙改塗次多紅雲紗八尺縇次鴉靑甲紗一尺六寸誌石函內 裹單袱次紅禾花紬十
一尺外裹單袱次紅細紬十七尺五寸誌石隔襦袱次禾花紬十五尺纓子次藍冒翕六尺五月二十九日

<그림 6> ‘화철초롱’ 일부 발췌(<발인반차도>, 

뺷순조국장도감의궤뺸, 1835) <그림 7> ‘화철초롱’(<발인반차도>, 뺷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뺸, 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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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19호

화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청사초롱의 모습으로 조성된 것이

. 화철롱(火鐵籠)은 대여를 중심으로 40부가 있다. 영조 시기 이전까지

는 화초롱

(火燭籠)

, 대초롱(大燭籠), 홍초롱(紅燭籠)으로 용어가 혼용되어 기

록되어 있다

. 영조 이후의 국장도감의궤에서는 화초롱이 아닌, 화철초

[火鐵燭籠]으로 정식명칭이 정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발인 시 소용된 제등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 의궤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 대한제국 이후와 이전 시기의 의물들이 상당수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제등 또한 이에 포함되는데, 대한제국 이후에 이뤄진 

국장은 

뺷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뺸를 꼽을 수가 있다.  국조상례보편에 

정리된 발인반차를 정리한 

<표 4>와 명성황후 발인행렬을 정리한 <표 

5>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명성황후의 장례에 관한 

의궤는 

1898년(광무 2)에 편찬된 뺷명성황후빈전혼전도감의궤뺸와 뺷명성

황후국장도감의궤

뺸가 있다. 하나는 ‘왕후’로서 치러진 것이며, 하나는 

‘황후’로써 치러진 것 주된 차이이다. 뺷명성황후빈전도감의궤뺸를 살펴

<발인반차> 中 신백요여․신백여와 대여 부분

炬 二百五十

望屬 二百五十

水晶杖

三色燭籠․三色燭籠

挽詞

24개

鐸 八 翣 火鐵籠 二十

挽詞

24개

諡冊諡寶腰輿

神帛腰輿 香亭 神帛轝

明器

腰輿

服玩

腰輿

哀冊

腰輿

肩輿 羽葆 香亭 銘旌

畵翜

黼翣

黻翣

大輿

畵翜

黼翣

黻翣

金鉞斧

三色燭籠․三色燭籠

挽詞

24개

鐸 八 翣 火鐵籠 二十

挽詞

24개

望屬 二百五十

炬 二百五十

<표 4> 

뺷국조상례보편뺸(1752), 「發引班次」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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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31

보면 조선시대의 왕후의 국장과 일맥상통으로 등장하는 초롱 종류는 

삼색초롱

, 화철초롱으로 총 두 종류이다.

그러나 

뺷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뺸를 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

로 발인행렬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발인행렬 속 복식(服飾)

과 의장

(儀仗)이 전체적으로 황금색으로 변화하였다

. 등장하는 제등은 

종류는 총 

8종류로 크게 늘었다. 기본적으로 삼색초롱과 화철초롱의 

존재는 신백요여와 신련

, 대여에 그대로 등장한다. 아래 <표 5>는 명성

황후 국장 시 대여 부분의 행렬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 제등의 위치를 

살펴보면

, 길의장 부분에 4부, 신백요여와 신련에 6부가 있다. 대여에 

홍등롱 

2,600개와 황등롱 100여 개, 대철초롱이 40개로 총 2,760개의 제

등이 행렬에 등장한다

. 제등은 길의장에 세 종류, 대여 부분에 두 종류

가 추가되었다

. 길의장 부분을 살펴보면, 청개(靑蓋) 이후에 홍사등롱 1

, 홍유지등롱 2쌍, 심등 1쌍이 연이어 등장한다. 나머지 2종류는 대여

부분에는 등장한다

.

<발인반차> 中 신백요여․신백여와 대여 부분

紅燈籠軍 千三百

黃燈籠軍 五十

立瓜 三

三色燭籠

三色燭籠

紅羅

素圓扇

大鐵燭籠 二十

紅紗燈

籠 四

紅油紙

燈籠 二

魫燈

神帛
腰輿

提爐
龍亭

香盒
香亭

神輦

鳳輿

30명

宮內府 巡檢

大輿

16명

執鐸護軍

50명

侍衛隊 兵丁

50명

警務廳 巡檢

立瓜 三

三色燭籠

三色燭籠

紅羅

素圓扇

大鐵燭籠 二十

黃燈籠軍 五十

紅燈籠軍 千三百

<표 5> 

뺷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뺸(1898), 「發引班次」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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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19호

<발인반차도>에 묘사한 것을 보면, 화철초롱과 홍등롱은 그려져 있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황등롱 100개는 보이지 않는다.(<그림 7>참고) 

“이 밖에 30명의 궁내부 순검, 50명의 시위대 병정, 16명의 집탁호군, 50

명의 경무청 순검 등이 대여의 좌우를 호위하고 있다

”46라고 추가적으

로 언급되어 있다

. 약 3,000여 개 정도의 대여 주변의 제등의 빛의 행렬

은 그야말로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 대한제국 이

후의 제등의 수가 급증했다고 결론을 짓기는 섣부르다

. 동일한 시기의 

뺷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뺸(1905)에 등장하는 제등은 총 3종류이다. 삼색

초롱 

12부와 화철초롱 40부, 그리고 대여 주변에 홍등롱 600부가 등장

한다

. 홍등롱의 등장은 명성황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전체 제

등의 규모에서 차이를 빚어낸다

. 대한제국 시기의 전체적인 의장 제도

가 바뀌었으며

, 더불어 제등의 종류와 개수가 바뀐 것은 동일하나, 명

성황후의 발인행렬이 특히 화려한 점에 대해서는 조금 유심히 바라봐

야 함에는 틀림없다

.

주목할 점은 명칭에 있다

. 대한제국 이전의 발인행렬에 소용된 제등

은 모두 초롱의 형태로 나타난다

. 대한제국 이후에 새롭게 등장하는 제

등 전부 

‘등롱(燈籠)’으로 기록되어있다. 길의장에 나타난 등롱 4쌍과 대

여 주변에 몰려있는 등롱 

2,700개는 단연 엄청난 수량을 갖추었다. 주

로 불물의 성격으로 소비된 이전의 등롱과 달리

, 많은 수량의 등롱을 

마련한 것은 바로 

20세기, 대한제국 이후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등롱은 등잔

(燈盞)에 들어가는 등유의 수급과 관련이 

46

한영우

, 뺷명성황후와 대한제국뺸, 효영출판, 2001,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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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33

있다

. 등유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 어유(魚油)를 사용했다가, 식물성 기

름을 주로 애용했었다

. 1876년 경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기 시작

하면서 등잔이 대량 보급되었다

.47

뺷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뺸 <발인반차도> 길의장 부분에 등장하는 제

등은 총 

3가지이다. 청개(靑蓋) 직후에 등장하며, 홍사등롱(紅紗燈籠) 1쌍, 

홍유지등롱

(紅油紙燈籠)

 2쌍, 심등(魫燈) 1쌍 순서로 나타난다. 총 8개로 등

롱의가 모두 홍색이다

. 그림을 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듯이, 의궤 기록

을 살펴보면 그 제작형식이 같다

. 길의장질의 심등 부분을 보면 “홍사

등롱의 제도에 맞추다

”라고 적혀있으며, 홍사등롱에 대해서는 “철등롱

은 삼색등과 같은 규격과 형태이다

. 몸체에 붉은 운문사(紅雲紋紗)를 사

용하고

, 가장 중요한 윗부분은 옥색운문사(玉色雲紋紗)를 사용한다. 붉은 

옻칠을 한 대나무 막대기를 연결한다

. 금칠이 된 나무 봉황 한 마리가 

붙어있다

”4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홍사등롱과 심등은 그 형식

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홍사등롱과 홍유지등롱, 심등의 경우 외견이 거

의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 흥미로운 점은 등롱의의 단 부분이다. 청

색으로 단을 대었던 이전까지의 제등과 달리

, 위 세 제등은 처음으로 

옥색으로 단을 대었다

.

지금까지 발인행렬에 소용되는 제등의 종류와 개수를 살펴보았다

제등은 불을 밝힌다는 기본적인 기능과 동시에

, 왕의 시신과 혼백의 존

엄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의물로 사용되어 왔다

. 각 행렬에 사용된 

47

맹인재

, 뺷한국의 민속공예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9.

48

뺷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뺸 卷 2, 「길의장질」. “鐵籠燭盤, 如三色燭籠. 制樣衣用, 紅雲紋紗, 領玉色

, 紋紗朱紅. 漆竹竿貼, 金木鳳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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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19호

제등의 종류와 개수는 크게 두 가지로 삼색초롱과 화철초롱이 있다

. 삼

색초롱은 혼백이 담긴 연여와 함께 배치되어 있다

. 화철초롱은 재궁이 

담겨진 대여와 주변에 위치하여 대여를 밝히고 있다

. 망촉과 거화가 전

체행렬을 밝혀주고 있으나

, 영조 이후에는 사라진다. 제등의 색상 명칭

이나 동일한 기물의 용어가 혼재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였으나

, 제도

의 재정비를 통해 영조 이후에는 모두 동일하게 등장한다

. 대한제국 이

후의 발인행렬을 보면 전체적으로 의장이 변화하였다

. 그중 등롱의 종

류와 개수가 압도적으로 증가하였다

.

명성황후의 국장이 이리도 성대했던 것은 고종의 광무개혁

(1897)와 

깊은 연관이 있다

. 연호의 개정은 이름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는 일이었

.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고종황제의 칭호가 제

정된 이후

, 즉 대한제국 선포와 연이어 명성황후의 국장을 시행하려는 

것이 나라의 의도였다

.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독립적 국가로서의 조선을 

다시 찾고자 하는 깊은 뜻이 대한제국 선포의 뜻과 맥을 같이 하였다

.49 

다른 어떤 발인 행렬보다도 명성황후의 발인은 단지 단순한 장례절차

가 아니었던 것이다

. 백성들뿐 아니라 일본인들, 외국인들에게 독립적

인 하나의 주체로서 일어서기 위한 시도였다

. 이러한 맥락 속에서 2,700

여 개의 제등이 가지는 빛의 규모는 시각적인 선언이었던 것이다

.

49

이에 대한 내용은 한영우

, 뺷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뺸, 효형출판, 2006을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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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35

Ⅳ. 맺음말

횃불은 제등 이전에 불을 밝혀주었으며

, 제등(提燈)은 휴대용 등(燈)을 

총칭한다

. 제등은 이동하는 동시에 불을 밝힐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움직이는 불빛은 발인행렬에서 단연 돋보인다. 화려한 불빛의 발

인행렬을 통해 온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 왕실에서 왕릉까지 상여의 

이동은 어두운 새벽에 일어난다

. 제등의 역할은 불을 밝힌다는 실용적 

성격과 함께 왕실의 장엄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기물임이 분

명하다

. 제등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눠진다. 등잔을 넣어 불을 밝혔던 

등롱과 초를 넣어 불을 밝혔던 초롱이다

.

제등의 변천을 살펴보면

,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횃불이 애용되

었다

. 왕의 거둥길에서 횃불의 사용은 필수적이었다. 횃불이 지속적으

로 사용되다가 영조 시기 횃불동원에서 생기는 민폐를 없애기 위한 조

치로 점차 초롱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 초의 사용이 저변화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 조선 후기 이후로 초의 생산이 활발해지며, 

제등의 사용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다

. 고역이 요구되는 횃불의 생산

을 줄이고

, 제등의 사용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초롱과 등롱

은 민가에서는 여전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 백성들의 경우에는 의례 시

에만 특별히 사용할 수 있었다

.

등롱은 불교의 발전과 그 흐름을 함께하였다

.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

은 주요한 불교행사를 위해 등롱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조선 중기까

지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 그러나 고려시대와 달리 유교사회였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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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제19호

시대에서는 점차 화려한 등롱의 제작을 금하도록 하였다

. 다시금 등롱

이 언급되는 것은 명성황후의 발인행렬이 그려진 

뺷명성황후국장도감

의궤

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등롱은 앞서 살펴본 등

롱과 달리

, 전적으로 ‘등잔으로 불을 밝히는’ 역할을 지닌 것이다.

국장 시 발인행렬을 살펴보면 제등은 크게 두 종류가 사용된다

. 하나

는 혼백요여 혹은 신백요여와 함께 행렬하는 삼색초롱이다

. 또 하나는 

국왕의 시신이 담긴 대여와 함께 

40여 개의 화철초롱이 등장한다. 그리

고 그 주변을 밝히는 거화와 망촉이 각각 

500여 개씩 있다. 유교사회는 

사람의 몸과 그 넋을 하나로 보았다

. 때문에 왕의 시신이 담긴 대여만

큼이나 혼백요여와 신백요여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히 여겼다

. 주변에

는 항상 제등이 곁을 지키고 있는데

, 그 넋을 불빛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발인행렬의 전범은 크게 세 번 변화한다

. 첫 번째가 세

종오례의

, 두 번째가 영조 시기의 속대전 편찬, 마지막 세 번째가 대한

제국의 선포 이후이다

. 이 시기의 발인행렬을 보면 의장의 종류나 위치

가 조금씩 변화하였다

. 삼색초롱과 화철초롱의 개수와 위치는 변함이 

없다

. 그러나 대한제국 이후를 주목해볼만하다. 제등의 규모가 크게 증

가한 것이다

. 명성황후 발인반차도를 보면 총 2,700여 개의 제등이 등

장하며 대여와 신련에 집중적으로 비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명

성황후를 기리기 위함도 물론 있겠으나

, 대한제국 반포 이후 자주적인 

국가를 꿈꾸었던 당시 고종의 결심을 시각적으로 공표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

대부분의 공예사의 전개는 유물의 분석에 주안점을 두며 단편적으

로 연구되어 오고 있다

. 그러나 공예품은 사람과 함께 변화되고 야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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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37

. 기나긴 문화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시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제등은 기나긴 시간 동안 어둠을 밝히는 기물로서 그 역할을 여전히 함

께하고 있다

. 어느 시기에는 횃불이란 이름으로, 또는 등롱, 초롱이란 

이름으로 역할을 하였다

. 제등의 역할을 상호 유기적 시각으로 바라보

는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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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호

참고문헌

1. 원전

뺷說文解字뺸
뺷高麗史뺸
뺷高麗圖經뺸
뺷朝鮮王朝實錄뺸
뺷日省錄뺸
뺷承政院日記뺸
뺷續大典뺸
뺷國朝喪禮補編뺸
뺷仁祖國葬都監儀軌뺸
뺷正祖國葬都監儀軌뺸
뺷純祖國葬都監儀軌뺸
뺷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뺸
뺷星湖僿說뺸
뺷薊山紀程뺸
뺷牧民心書뺸

2. 단행본

장동우 역

, 뺷의례 역주 七-사상례․기석례․사우례뺸, 서울 : 세창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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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뺷빛/Light-燈, 전통과 근대뺸, 서울 : (주)디자인사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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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뺷명성황후와 대한제국뺸, 서울 : 효영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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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뺷불의 민속뺸, 서울 : 국립민속박물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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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뺷한국의 민속공예뺸, 서울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9.

정래혁

, 뺷韓國의 古燈器뺸, 서울 : 한국전력주식회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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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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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이윤수

, 「전통등의 현대적 활용을 위한 콘텐츠 연구」, 뺷콘텐츠문화뺸 제8호, 문화예술콘

텐츠학회

, 2016, 51∼91쪽.

김삼대자

, 「일상생활에서의 불」, 뺷불의 민속뺸, 국립민속박물관, 1996, 171∼178쪽.

______, 「이조시대 등촉기구에 관한 고찰」, 이화여대 석사논문, 1968.
김정진

, 「조선시대 국장도감의궤의 반차도 연구(Ⅱ)」, 뺷한국복식학회지뺸, 한국복식학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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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19호

Abstarct
Study on the changes of the traditional torch and handing 

lantern

-in the coffin parade of royal family in Joseon dynasty

Seol, Jihee The master’s course in Major of Intangilbe heritage, Dept. of Convergence Cultural Heritage, 

Graduate School of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Cultural Heritage

Funeral lanterns include al  kinds of hand-held lights. The characteristic that the 

funeral lantern can light its neighborhood while it is moving can be used most of in 
royal parades. “Barinbanchado”(Drawing of Starting of a funeral procession) listed 
in  뺷Kukjangdogameuigwe뺸(Il ustrated  Book  of  State  Funeral  Protocols)  shows 
procession of funeral biers from the royal court to the royal tomb. Because funeral 
procession started in early morning which was stil  dark, the procession looked 
like a splendid and festive lantern parade. In the ritual, lanterns were ritual things 
to show magnificence of royal family and sacredness of fire as well as to light 
neighborhoods.

In this paper, it was studied in two ways. First, types and meaning of funeral 

lanterns were reviewed. Second, the number of lanterns in the procession and the 
places that lanterns were used were identified. Funeral lanterns used in royal 
family were torches, hanging lanterns and candles. By the middle of JoseonDynasty, 
torches were mostly used. When King proceeded outside the palace, torches were 
required.  If  they  were  not  prepared,  retainers  might  be  reprimanded.  In  late 
Joseon, hanging lanterns and candles were used. Up to then, hanging lanterns 
were  mainly  used  in  Buddhism  and  they  were  produced  for  Yeondeunghoe(the 
Lantern Procession) or Palgwanhoe. 

A funeral procession was to show magnitude of royal family in addition to its 

original function as moving coffin to the royal tomb. This characteristic made 
funeral  lanterns  more  necessary.  For  the  procession  from  11  p.m.  to  1  a.m. 
enormous number of funeral lanterns was needed. The procession of hundreds 
lanterns at racted people’s attention easily even from the distance. Sinbaekyoye and 
Shinyew

 here the body and spirit of a king were placed were ornamented with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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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인행렬 시 사용된 횃불과 제등(提燈)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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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colored candles and Daeyeo was highlighted with 40 Hwacheolchorong. To 
add  Geohwaand Mangchok  around  it,  you  can  easily  imagine  the  procession 
surrounded by 1,000 lanterns. To emphasize the solemn procession, ‘light’was 
used.  In  particular,  Emperor  Kojong  executed  funeral  procession  of  Queen 
Myungseong

 right after the proclamation of Korean Empire, which was postponed. 

2,700 funeral lanterns were used to decorate Daeyeo. It is the look of Daehan 
Empire that Emperor Kojong tried to show to the public and the Japanese military 
who dreamed of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state rather than being coerced by 
the Japanese imperialists. In this paper, funeral lanterns were researched through 
literature. Funeral lanterns can be understood as devices for restoration.

Keywords  funeral  of  Royal  family,  Uiqwe,  Barinbanchado,  Joseon  dynasty, 

Je-deung

, hand-held lights, torchlight

논문 투고일 : 2017.4.3    심사 완료일 : 2017.5.17    게재 확정일 : 2017.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