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찰 건 축
1. 불 교 의 전 래
2. 삼국시대의 불교건축
3. 고려시대의 불교건축
4. 조선시대의 불교건축
목
차
1. 불교의 전래
● 가람
(伽藍;Sangharama)-승가람마의 준말로 승가(僧伽)란 중(衆), 람마(藍摩)는
동산(園)이라는 뜻으 로 중원(衆園), 즉 여러 승려(僧侶)들이 한 데 모여서 수도(修道)
하고 생활하던 곳으로 이것이 후세의 절(寺刹)로 명칭 변화
● 중국의 최초 사찰-동한(東漢)의 영평(永平) 10년(67)에 건립된 낙양(洛陽)의 백마사
(白馬寺) - 빈객을 접대하던 관서로 이용되었던 홍려사(鴻臚寺)를 개건하여 세운 곳
● 나한(奈漢) 때 착융(笮融)이 서주(西州)에 인도양식으로 된 부도사(浮屠寺)를 건립하
였다고 하나 실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이 건물 아래층은 중루(重樓)이고 위에는 금반
(金盤)을 쌓았다고 하니 중국 누각식(樓閣式) 목탑의 시발점
● 가람배치 : 중국 문묘, 도교 사원과 유사한 형식
– 일탑식, 쌍탑식, 사합원배치 등
; 중국 고유의 주거건축배치인 4합원(四合院)에 근원을 둔 유교(儒敎)의 문묘(文廟)나
도교(道敎)의 사원(寺院)의 배치와 융화되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동양의 한문화식가
람(漢文化式伽藍)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 -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 영향
● 중국의 가람(伽藍)은 초기에는 불전(佛殿)과 탑(塔)을 중심축 선상(中心軸 線上)
에 배치한 1탑식(一塔式) 가람이었으나, 수․당시대(隋唐時代)에는 쌍탑가람배치
(雙塔伽藍配置)가 있었다고 전하나 실제 이렇게 오래된 수․당대 쌍탑가람이 전하
는 예가 없고, 또 발굴조사에서도 쌍탑가람배치가 명확하게 밝혀진 유적도 없다.
<陝西岐山風雛村西周建築遺址>
<四川出土 的漢 畵像塼>
4합원(四合院)
● 불탑(佛塔)과 불상(佛像)을 봉안(奉安)한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강당(講堂), 승방
(僧房), 중문(中門), 종루(鐘樓) 등을 비롯한 많은 대소전각(大小殿閣)이 마련됨에
따라, 육조시대(六朝時代) 이래로 기본적인 가람배치형식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
되며, 이러한 가람배치는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永寧寺 伽藍配置圖>
남문(南門)
금당(金堂)
불탑(佛塔)
<南禪寺 伽藍配置圖>
<남선사 대전;782년>
<남선사 대전 귀공포>
<하남성가형토기>
山西 應縣 遙 佛宮寺 釋迦塔
山西 應縣 遙 佛宮寺 釋迦塔(1056年)
江蘇 蘇州 南宋 報恩寺塔(1131年 再建;塼木塔)
2. 삼국시대의 불교건축
● 불교 수용의 의미 ;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 통치이념 확립, 왕권확보 수단 활용
● 왕권이 강화된 6세기 이후 ; 삼국 적극적인 불사행위, 중국 가람배치기법 도입,
중국 선진 건축기술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와 일본으로 전파
2-1) 고구려 사찰
● 소수림왕(小獸林王)2년(372) ; 진왕(秦王) 부견(符堅) -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교를 전함
● 소수림왕 5년(375) ; 이불난사(伊弗蘭寺)와 초문사(肖門寺)를 국내성에 창건
● 문자왕(文咨王) 7년(498) ; 금강사(金剛寺) 창건
● 영유왕(榮留王) ; 중대사(中臺寺), 진구사(珍丘寺), 유마사(維摩寺), 연구사(燕口寺), 대승사
(大乘寺), 대원사(大原寺), 금강사(金剛寺), 개원사(開原寺) 등이 개창(開創)
●보장왕(寶藏王) ; 연복사(延福寺), 백녹원사(白鹿園寺),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寺)가
건립<삼국사기 기록; 영탑사에는 8면7층석탑 유존>
● 광개토왕(393) ; 평양 9사를 건립(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된 고구려 사원터 ; 원오리사지,
상오리사지, 정릉사지, 청암리사지) – 원오리사지; 훼손이 심하여 배치상태
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 나머지 세 곳은 중심부에 팔각형 건물을 배치
<史記> <天官書>에 나타나는 오성좌(五星座)를 바탕으로 한 천문사상(天文思想)에 기
인하였다는 학설, 중심 곽의 규모-100여m, 남북 약 150m 정도의 대규모 사찰이며,
<금강사터>로 추정
<청암리사지>
<금강사지(청암리사지) 가람배치>
<오성좌도>
● 평양 역포 구역 왕릉동(王陵洞)에 위치 - 고구려 평양으로 천도 후(427년)
창건 된 사찰 가운데 하나 - 광개토왕이 창건한 평양 9사 중 하나인 <정림
사>로 추정
● 규모 ; 동서 약 200m, 남북 약 130m - 중앙구역 좌우로 2개구역이 더 해져
전부 5개구역으로 구성- 중앙구역은 8각목탑지를 중심, 좌우와 북편에 금당
이 자리하는 3금당 일탑식 가람배치,북금당지 좌우로 종루와 경루로 추정되
는 건물이 위치
● 출토유물과 유적의 성격으로 보아 금강사지보다는 앞서지만 375년 세운 초
문사나 이불난사보다는 후대에 건립되었으며 백제 미륵사지(彌勒寺址), 군
수리사지(軍守里寺址), 황룡사지 및 고려(高麗) 흥왕사(興王寺)까지도 그 영
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론
● 횡(橫)으로 여러 구(區)를 병립시키는 가람의 시초는 우리나라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까지도 흔히 사용된 배치방법이다.
<정릉사지>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및 팔각목탑지>
2-2) 백제 사찰
● 침류왕(枕流王) 원년(384) ; 호승(胡僧) 마라난타(摩蘿難陀)가 동진(東晋)
에서 올 때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전으로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경배하
였고 이듬해 한산성(漢山城)에 최초로 불사를 창건하고 승려 열사람을
상주
● 성왕에 의하여 불교가 번창 - 성왕 19년(541) 양(梁)으로부터 공장(工
匠), 화사(畵師)를 초빙하여 불사의 건물을 장엄하게 건축
● 왕흥사, 칠악사(漆岳寺), 오함사(烏含寺), 천왕사(天王寺), 도양사(道讓
寺), 백석사(白石寺), 미륵사(彌勒寺), 호암사(虎岩寺), 사자사(獅子寺),
북부 수덕사(修德寺), 전주 보광사(普光寺), 전주 경복사(景福寺), 익산
오금사(五金寺) 등
● 7세기초 창건 - 탑과 금당으로 이루어진 서탑원, 동탑원, 중탑원 3개의 탑원
으로 이루어진 3원병렬식 가람배치
● 중탑원은 목탑이 중심이고 동서탑원은 석탑을 건립
● 후편에 3원을 아우르는 공간을 두고 강당을 배치
● 전체적으로 3원으로 구성되어있으나 각원은 팁과 금당으로 구성된 일탑식
가람배치법을 적용
● 동서 회랑의 기단 외단까지 172m, 남단에서 강당북단까지가 148m 정도로
동서축이 남북축보다 긴 장방형구조이며 목탑과 석탑은 모두 9층으로 구성
된 것으로 추정
<미륵사>
<미륵사지 가람배치도>
<복원조감도>
<치미>
● 583년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옮긴 직후 창건
된 것으로 추정
● 발굴시 ‘太平八年戊辰
定林寺 大藏 當草’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定林寺>임을 확인
● 가람의 배치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축선상에
배치된 一塔式伽藍配置
임을 1942년 조사에서
확인
● 현재의 석탑양식으로
보아 초창 때 탑이 아니
라 초창시 木塔에서 重
創시 석탑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
<정림사>
중문
탑
금당
강당
● 2007년 발굴된 목
탑 지 에 서 ‘ 정 유 년
(577) 2월 죽은 왕자
를 위해 백제왕 昌(威
德王)이 刹柱를 세웠
다’라는 명문을 발견
한 바 있어 건립년대
를 확인
● 무왕 32년(634)
절을 강에 인접하게
만들고 채색하여 장
식하였다고 기록
● 가람의 형식;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자리하는
일탑식가람형식
<왕흥사>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복원 조감도>
<왕흥사 가람배치도>
<왕흥사 사리장구>
<왕흥사 출토유물>
● 백제의 가람배치; 각각의 절터는 건물배치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南北 直線軸
에 따라 門, 塔, 金堂, 講堂이 배치되고 ,문 좌,우로 연결된 回廊이 남북으로 긴장방형을
이루면서 탑과 금당을 둘러싸고 강당 좌우로 연결되는 一塔式伽藍配置(대부분 백제의
사지가 ; 금강사지, 정림사지, 능사지, 군수리사지 등)
● 특히 부여로 천도한 후 왕권이 비교적 안정을 찾은 시기로서 왕권이 귀족세력을 제압
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도성주변에 건립된 사찰들은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왕
사(王寺)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 이러한 기반조성은 왕의 개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뛰어난 건축기술자의 창의력
확보가 요구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건축환경이 백제 불사건축의 새로운 형태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고구려 가람과의 차이점은 고구려의 탑이 8각형인데 반해 백제는 방형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가람배치법도 고구려의 3금당식과 달리 일금당식을 취하고 있으며 가람도 남
북방향이 동서 방향보다 길어 공간의 깊이 감을 더해 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차별성은 문화의 전래국가에 따른 차이에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능사 가람배치도>
< 군수리사지 가람배치도>
<정림사지 가람 배치도>
● 백제의 1탑식 가람배치-
일본 전래; ‘백제양 칠당 가
람배치(百濟樣 七堂 伽藍配
置)
’로 연결
● 백제 장인에 의해 조영 ;
일본 초기 사찰인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는 전
형적인 일탑식 가람배치법
● <법륭사(東殿西塔)>, <법
기사(西殿東塔)>로 발전되고
일본 비조시대(飛鳥時代)의
가람은 백제 1탑식가람배치
를 기본으로 한 것으로 추정
<일본 법륭사 가람배치도>
<일본 사천왕사 가람배치도>
2-3) 신라사찰
● 눌지왕(訥祗王) 때 불승 아도(阿道)가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들어와 포교한 것이
시초- 양(梁)의 사승(師僧)인 원표(元表)에 의해 신라왕실에 불교가 소개 - 이차
돈(異次頓)의 순교로 법흥왕(法興王) 14년(527) 국교로 받아 들여졌으며, 이 후로
신라왕실은 적극적으로 불사에 전념
● 경주에는 영흥사지(永興寺), 흥륜사지, 황룡사지, 삼랑사지, 영묘사지(靈廟寺),
분황사(芬皇寺), 천주사지, 사천왕사지, 감은사지(感恩寺), 망덕사지(望德寺), 천
관사지 등 수많은 사지(寺址)들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유지(遺址)와 사명
(寺名)이 일치하는 사지만도 50여개소 ; 신라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와 영흥사
● 목탑(木塔) ; 흥륜사, 황룡사, 영묘사, 천주사, 사천왕사, 망덕사, 보문사
석탑(石塔) ; 분황사, 감은사, 고선사
삼국시대 사찰 - 목조 단탑(單塔), 통일신라시대-목조와 석조 쌍탑(雙塔)이 출현
탑 평면형태 - 4각형이 대부분, 영묘사는 고구려의 목탑과 같이 8각형 평면으로
추정
● 고신라(古新羅) 가람은 황룡사지와 분황사뿐이며 두 사찰은 모두 고구려 가람배
치에 기본을 둔 신라식 1탑 3금당 가람배치법
● <삼국유사> 및 <황룡사사찰주본기> - 황룡사 구층목탑은 백제의 장인(工匠) 아비지
(阿非知)를 초청하여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김용춘(金龍春)이 小匠(소장) 200
명을 거느리고 그 역사(役事)를 주관
● 황룡사 구층목탑은 백제의 건축기술이 도입된 가람 - 가람배치는 1탑식 백제가람과 상
통하며, 또 창건가람에 있어서 동서 3구역으로 공간을 분리한 것은 익산 미륵사 가람배
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추정
● 고구려의 평양 <정릉사>와 평양 <금강사>의 탑을 바라보고 있는 동․서금당을 북금당
의 양쪽으로 옮겨서 병렬로 늘어놓은 가람배치이다. 즉 고구려 가람배치는 동․서․북 3
금당 이 모두 탑을 바라보고 있는 ‘品’자형 1탑 3금당가람배치이고, 신라 황룡사 가람
배치는 1탑 3금당식이나 배치방법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창건 사지 ; 백제식 일탑가람배치
● 584년 2차 중건 사지 ; 좌우 2개 단랑(單廊)이 생략되면서 큰 규모의 금당이 재건되고 그 전면에
목조 9층탑이 선덕왕 14년(645)에 완공되면서 가람배치가 일탑삼금당식으로 확대되면서 모습을
일신
● 경덕왕 13년(754) ; 종(鐘)이 주성(鑄成)된 다음 목탑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가 건립되면
고 중문(中門)과 남회랑(南回廊)이 전면 쪽으로 이축 되었을 것으로 추정
<고려 몽고란(1238)에 의해 전부 소실>
< 황 룡 사 >
<황룡사 창건 및 중건 가람배치>
<황룡사 최종가람배치도>
<황룡사 금당 복원안>
<황룡사 강당 복원안>
<황룡사 중문 복원안>
<황룡사 9층목탑 복원안>
황룡사 출토 치미
● 초창 ; 선덕왕 3년(634)
- 동경잡기에 <三寶之一>
로서 9층탑이었으나 임란
때 그 반이 훼손, 그 후 개
축으로 의해 현재의 모습
유지
● 창건 ; 북쪽에 3개의 금
당이 品字形을 이루고 그
가운데 탑이 위치한 일탑
삼금당식 배치법
● 1차 중건 ; 3개의 금당
이 하나의 규모가 큰 금당
으로 변화
● 2차 중건 ; 보광전과 그
동편에 금당이 서향으로
건축되었으며 현재의 보광
전은 3차 중건때 건립
< 분 황 사 >
● 신라는 왕들이 불사에 적극 참여하여 5~7세기 중반사이에 불사는 왕의
지원을 받는 호국사찰로 조성
● 불교의 도입은 백제나 고구려보다 다소 늦었지만 적극적 수용과 창건활
동으로 건축술은 빠르게 성장
● 사찰의 배치방법은 1탑3금당식 가람배치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와는 그 조성방법에서 상이성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입되면서 조성된 삼국시대 가람은 모두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구성되고 탑의 위치 및 평면형태가 가람배치의 중
심을 이루고 있다. 삼국의 가람은 대부분 일탑 가람배치이고 탑의 평
면은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가 대부분 8각평면이
고, 백제와 신라는 방형평면이다.
2-4) 통일신라시대 불사
신라는 고구려의 선진불교문화를 받아들여서 초기에는 1탑 3금당 가람배치였으나, 통일
신라에 들어오면서 쌍탑가람과 양원가람으로 변화
(1) 쌍탑가람(雙塔伽藍)
● 회랑내곽 - 정방형평면, 강당좌우 - 건물이 배치, 금당 좌우 – 익랑 ; 단탑가람과 동일,
다만 불국사 금당의 회랑은 남북으로 장방형 평면을 이루며, 강당 좌우에는 건물이 아
닌 회랑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이것은 쌍탑가람의 특징이 아니고 지형적인 차이로 추정
● 쌍탑가람에 있어서 탑 ; 목탑과 석탑 혼용
● 목조쌍탑(木造雙塔) ; 통일신라 초기에 집중 - <사천왕사(679)>를 시원(始源)으로
<망덕사(692)>, <보문리사> 등
● 석조쌍탑(石造雙塔) ; 통일신라 전반 - <감은사(682)>를 시원으로 <천군리사(千軍里
寺)>, <불국사(佛國寺)>, <원원사(願遠寺)>, <전 인용사지(傳 仁容寺址)>, <숭복사
지(崇福寺址)>, 산청 <단속사(斷俗寺)> 등의 8세기 가람과, 9세기에 들어 와서는 <남
산리사지(南山里寺址)>, 남원 <실상사(實相寺)>, 장흥 <보림사(寶林寺)>등
● 쌍탑가람배치는 9세기까지 크게 유행
<사천왕사지 가람 배치도 >
<사천왕사 출토 >
<사천왕사 출토 >
<사천왕사 출토 >
<사천왕사 출토 >
<사천왕사 출토 >
<감은사 배치도>
<전 인용사지 배치도>
<기초, 지반>
(2) 양원가람(兩院伽藍) ; 탑과 금당이 각각 별도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이원화된 가람
- 고선사지(高仙寺址), 나원사지(羅原寺址), 황복사지(皇福寺址), 창림사지(昌林寺址)
- 후일 일본 국분사(國分寺)로 전파
● 탑과 금당의 위치에 따라서 좌전우탑(左殿右塔), 우전좌탑(右殿左塔),또는 전당후탑
(前堂後塔)으로 가람형식을 분류
● 전당후탑 가람배치 - 경주 나원사지, 경주 황복사지는 동향이고, 경주 창림사지는 서
향, 특히 황복사지는 귀부와 당간지주 등 사찰과 관련된 석물들이 남쪽에 있음으로 보
아 좌전우탑으로 분류
● 양원가람에 있어서 탑의 위치는 방향보다 지형을 더 중요시 한 것으로 생각 - 좌전(左
殿)에서도 우전(右殿)에서도 탑은 항상 금당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양원
가람의 특징
<불국사 가람 배치도 >
<고선사 가람 배치도 >
●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들어오면 금당 앞에 세워진 단탑(單塔)이
동서로 나누어져서 쌍탑(雙塔)으로 바뀌어 2탑 1금당식(二塔一金堂式) 가
람배치로 변화 -9세기까지 크게 유행한다.
● 단탑식 가람(單塔式伽藍) ; 경주 고선사(高仙寺, 7세기말), 경주 나원사
(羅原寺, 7세기말), 경주 황복사(皇福寺, 692), 경주 창림사 , 문경 봉암사
(鳳巖寺, 879) 등
통일신라시대의 가람형식은 적어도 8세기까지는 중문과 강당을 둘
러싼 회랑 외에 불국사(佛國寺)와 같이 금당 좌우에 익랑(翼廊)이 생
겨나지만, 9세기 이후부터는 산지가람이 많이 건립되면서 경영문제
나 지세(地勢)의 제약 등으로 회랑이 없어지기도 하면서 엄격한 가
람배치는 점점 흐트러지고 가람 형식도 자유롭게 변화
<일탑식 가람 배치도 비교도>
<쌍탑식 가람 배치도 비교도>
<청암리사지>
<망덕사지>
<법기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
<부여 군수리사지>
<일본 비조사지>
<감은사지>
<불국사 금당원>
<천군리사지>
<사천왕사지>
<일본 동대사>
3. 고려시대의 불교건축
● 통일신라시대부터 계승된 불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가장 융성
고려 태조는 궁궐의 건설과 때를 같이하여 개경 안에 법왕(法王), 자운(慈雲), 내재석(內
帝釋), 사나(舍那), 천선(天禪), 신흥(新興), 문수(文殊), 원통(圓通), 지장(地藏)의 10개
불사(佛舍)를 창건
● 고려의 숭불정책 - 고려왕들에게 계승되었고 원찰의 경영이 성행
<송사> ; “고려 왕성안에 불사가 70구가 있다”라고 기록
<고려도경-잡속시수조> ; “왕성의 장랑에는 매 10간 마다 막을 치고 불상을 모셔 놓았
다”라고 기록 - 당시 왕성은 가는 곳마다 불사의 경역과 같은 면모를 가졌음을 짐작
● 3대 정종(定宗)은 개국사(開國寺), 4대 광종(光宗)은 불일사(佛日寺), 11대 문종(文宗)
은 흥왕사(興王寺)를 창건
제16대 예종이 건설한 안화사(安和寺)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건축구
조와 단청장식이 해동에서 제일이라 하고, 보제사(普濟寺)의 5층탑은 200척이 넘었다
고 한다.
● 사찰 경영은 국외까지 진출하여 중국 항주(杭州)에 고려사(高麗寺), 흥안주(興安州)의
신라사(新羅寺), 통주(通州)에 광복사(廣福寺) 등을 창건한 바 있다.
●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에 사용된 2탑식 가람배치가 계승되었고 삼국시대
1탑식 가람배치도 활용된 듯하다.
● <흥왕사>와 <불일사>는 주요한 당우(堂宇)가 있는 중심 건물의 좌우에 동원과 서
원이 부속해 인접되어 건축된 것으로서 고려가람의 특징.
<불일사>는 1탑식 가람배치형식의 사찰로 중앙, 동, 서구로 구획
● 개성 <연복사> ; 동전서탑의 배치, 남원 <만복사> ; 서전동탑식의 배치 - 일본의
<법륭사(法隆寺)>와 <법기사(法起寺)>의 배치와 유사
● 고려시대의 불교의 융성은 그 이면에서 불교신앙에 잡다성을 내포
점차 한국 재래의 민간신앙에 대한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혼합 - 교율적인 것보다
밀교적신앙이 일반적으로 성행 - 종래의 정제된 가람배치제도 - 잡연한 배치로 변화
● 금당의 명칭이 대웅전(大雄殿), 능인보전(能仁寶殿), 나한보전(羅漢寶殿), 칠성각(七
星閣), 응진전(應眞殿), 영산전(靈山殿), 산신각(山神閣) 등 잡다한 건축물들이 조성
<불일사 배치도>
<중문>
<강당>
<금당>
<탑지>
● 고려중기 이후 - 평지가람도 자유로운 배치
- 산지가람(山地伽藍)이 많이 창건 - 지세에 따라 자유로운 배치 -중심건물은 남면하
는 원칙은 고수
● 건물이 자리하는 대지가 높아짐에 따라 중문이 누하진입형식(樓下進入形式)으로 변하
고 누각 밑에서 계단을 거쳐 대지에 이르는 형식이 많이 사용
<남원 만복사 배치도>
< 흥 왕 사 >
● 문종 10년(1056) 착공하여 문종
21년(1067) 완공 ; 2탑식가람배치
형식의 사찰(건물 간수가 2,800간)
문종 24년 3층 자씨전(慈氏殿)을
건립하고 사찰주변에 성벽을 구축
문종 32년 금탑을 조성하고 34년
금탑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에 석
탑을 조성 또한 속장경(續藏經)을
주조한 사찰이며 몽고난 때 병화
<흥왕사 가람 배치도>
● 고려시대 때 건립 또는 중창 건물이 남아있는 사찰 ; <부석사> ,
<봉정사>, <수덕사>, <통도사> 등
● 확실한 건립년대를 알 수 있는 건물로는 <수덕사 대웅전>이 유일하
나 상량문 등 기록에 의해 추정된 건물들도 있다. 건물은 존재하나
가람배치가 건립 당시의 법식으로 존재한다고는 확언하기 어렵다.
다만 고려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려시대 때 건립된 건축물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 <심원사 보광전> 등이 보존되고
있다.
<수덕사 배치도>
<수덕사 대웅전>
<실상사 배치도>
<실상사 전경>
<실상사 목탑지 발굴>
<실상사 삼층탑 및 부도>
<실상사 출토 귀면와>
<실상사 목탑 복원도>
<부석사 배치도>
<부석사 범종루>
<부석사 조사당>
<부석사 석단>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
<봉정사 배치도>
<봉정사 복원 전 극락전>
<봉정사 복원 후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 보수공사>
<통도사 배치도>
<통도사 대웅전>
<통도사 봉발>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 삼층탑>
<동화사 배치도>
<화엄사 배치도>
<화엄사 사진>
4. 조선시대 불사건축
●
조선 건국 후 건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유학자들은 불교를 배척(斥佛論)하고
유교를 통치이념화
● <抑佛崇儒政策> 실시 - 불교의 교세 위축, 불교건축 역시 쇠퇴하거나 발전이 정체
● 태조 - 승려와 사찰의 증가 억제, 불교세력 확대 금지 정책을 수립
● 태종 - 국사(國師), 왕사 제도 폐지, 전국 242개 사찰 제외한 나머지 사찰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폐사 조치
● 세종 - 불교 7교파를 통합 ; 禪宗(曹溪, 天台, 摠南)과 敎宗(華嚴, 慈恩, 中神, 始興)
으로 축소 - <흥천사(興天寺);선종 대본사>, <흥덕사(興德寺);교종 대본사>,
본산 36사만 인정
● 성종 – 억불정책 ; 사찰 건립과 승려가 되는 길 제도적으로 차단 - 승려수가 급감
● 연산군 - <원각사>, <흥천사>, <흥덕사>마저 폐사 조치
● 중종 - 승과제도 폐지 ; 불교가 국가와의 관계성이 단절
이중적 성향
● 태조 - <흥천사(興天寺)> ; 개창(開創)하고 조계선종(曹溪禪宗)의 본사(本寺)
● 세종 - <원각사(圓覺寺)> 창건, 궁궐 내에 내원당(內願堂) 건립, <석보상절(釋譜詳節
)> 저술
● 세조 -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한 <월인석보(月印釋譜)>
간행, 흥복사터에다 1464년 <대원각사(大圓覺寺)> 창건, 다층탑(13층)을 완성,
<해인사, 월정사, 청학사, 화엄사, 도갑사, 신륵사, 쌍봉사> 등 보수, 중수
<복천사>, 오대산, 금강산의 각 사찰과 양양 <낙산사>등 명찰을 찾아 공양하는
등 불교의 중흥
● 명종 - 문정황후의 섭정으로 승 보우를 중용 - 불교 장려, <봉은사(奉恩寺-선종 본산
>, <봉선사(奉先寺)-교종 본산>-선, 교 양종을 복원
● 문정황후 사후 ; 승과(僧科)와 도첩제(度牒制) 폐지, 지속적으로 배척 - 도심지의 사찰
대부분 폐사, 심산유곡에 자리한 사찰들만 명맥 유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나마 존속하던 통일신라, 고려시대 때 건립된 사찰마저
도 대부분 병화에 소실.
●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잠재력은 그대로 명맥을 유지 ;
불교건물의 중수와 보수활동은 계속 - 임란 이전의 사찰 복원은 무리
●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 김제 <금산사>, 해남
<대흥사>, 예천 <용문사>, 구례 <화엄사>, 하동 <쌍계사>, 영암 <도갑사>, 안변 <석
왕사>, <실상사>, 오대산 <월정사> 등 사찰이 당시의 모습 다소 간직
● 1592년 임란 이후 서산대사와 사명당(惟政)의 승병활동으로 선, 교 양종이 조계종(曹
溪宗)으로 일원화
● 조선 중, 후기에 들어 사찰은 권력가의 유람처(遊覽處)로 전락 - 누(樓)는 접대기능도
수행하였고 요사나 선방은 사대부들의 숙식기능까지도 수행
● 17세기 이후 - 선수(禪修), 강학(講學), 염불(念佛) 삼문(三門)으로 분리 - 사찰 내에
좌선당(坐禪堂), 강당, 염불당(念佛堂)을 설치 - 불교의 대중화
<흥국사 대방평면도>
<흥천사 대방평면도>
● 일반 신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방건축(大房建築) 탄생 ; 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공
간이 요구 - 염불당이 건립, 기존 강당 - 루를 대방으로 전용
●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찰 ; 큰방과 루를 동시에 수용하는 건축물이 탄생하면서 <
흥국사(興國寺) 대방>, <흥천사 대방>, 인법당(人法堂) 등과 같이 불당(佛堂), 승방(僧
房), 요사(寮舍)의 기능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용도의 건축이 탄생
● 조선 후기 고종조 - 서울, 경기 일원에서 누각 대신 대방이라는 건물이 사찰 내에 건립
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두드러지게 성행하면서 <흥천사>, <원각사>와 같은 남북축선
에 따른 대칭적 배치인 평지가람(平地伽藍)보다 산지(山地)를 이용하여 다소 자유로운
배치방법을 취한 <봉은사>, <청평사(淸平寺)>와 같은 산지가람이 많이 출현 -
<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가람배치방법이 주류
<봉정사 배치도>
<환성사 배치도>
● 임란 이후 사찰 복구 ; 대부분 승려들에 의해 수행 - 왜군의 침입 경로에 있었던 <통도
사>, <직지사>, <해인사>, 등 경상도 사찰과 정유재란 때 피해를 입은 금산사, 화엄사
등 사찰은 복구를 위하여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력 신도 확보에 노력
● 임금의 능 주변에 위치한 사찰은 제사기능을 도우며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능찰(
陵刹), 왕세자의 태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 사찰 내 왕의 초상이나 명복을 비는 願
堂(<고운사>, <부석사>, <불국사> 등) 건립
● 문중이나 유림(儒林)에서 사찰을 강탈하여 재사(齋舍)나 주택으로 전용하는 사례도 발
생(청송 심씨종택, 안동지역 재실)
<의성 고운사 연수전>
● 승장(僧匠)의 활동 ; <직지사 대웅전> 중건시 본사 승장, 동래, 창원 승려들이 참가,
<불국사 대웅전> 중건에는 지리산 화엄사 승장(쾌연-불갑사공사도 참여)이 참여,
<동화사 대웅전> 중건에는 평안도 승장 참여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현종실록(顯宗實錄)> ; 성벽, 궁전, 서원복구 등에도 참
여 - 승장의 기술력, 건축활동이 당시에 매우 광범위
● 사찰의 건축물들은 예불대상에 따라 각기 개별적 불전을 갖던 초기의 방식에서 대웅전
중심으로 불전으로 통합되는 경향 ; 건축물 내에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신중단, 명부기
능까지 복수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용도의 건축물이 탄생
● 17세기 이후 ; 신도들의 실내 수용을 위한 큰 실내공간이 요구 - 규모의 확대 및 실내
공간의 장식화 - 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변경 -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외관을 중시한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 실내공간의 확대 및 장식화가 수행되었을 것으로 추정
● 18세기 이후; 실내공간의 확대 및 장식화가 동양삼국에서 동시적으로 발생 – 조선은 사
찰건축만 유독 장식화경향 증가 - 실내환경 완화(조명, 일조, 채광고려)를 위한 창호의
변화(들어열개방식, 고창의 설치, 꽃살창, 특히 서해안지역 사찰에서 집중적 분포)
● 불전 건립시 자연곡재(自然曲材)사용(직지사, 동화사, 청룡사 등) 증가, 실내에 후불탱
화, 내부조각 장식, 천장, 벽화 및 별지화 등 과도한 장식
결론적으로 조선후기 불사건축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과장된 표현방법이나 뛰어난 예술
적 기지 발휘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조형예술로 승화시킨 점은 주목
<동화사 대웅전 창호>
<성혈사 나한전 창호>
<내소사 대웅보전>
● 가람배치 ;
● 고려시대의 선종가람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
● 태조 창건한 <흥천사>(태조 6년, 1397)와 <흥복사>(세조 때 <원각사>로 개칭) ;
<연복사>와 유사한 평지가람 - 회랑으로 둘려 있는 가람배치형식
● 특성 - 불전 전면 좌우에 요사배치, 불전과 마주하여 누각이나 문을 배치하여 가운데
중정이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口형으로 향교나 서원, 사묘(祠廟)의 배치와 유사
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금산사 배치도>
<관룡사배치도>
<관음현상기 중 상원사>
<송광사 배치도>
<숭림사 배치도>
<화암사 배치도>
<위봉사 배치도>
● 사찰 내 예불의례에 의해 건물위계의 기준이 반영되어 3단으로 형성하였다는
배치론
●
如來壇(상단;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미륵전, 루각 등),
●
菩薩壇(중단;나한전, 명부전, 문수전, 불이문),
●
神衆壇(하단;산신각, 삼성각, 천왕문)
<해인사 배치도>
<부석사 배치도>
● 신라문화권으로 분류하는 지역(경상도 중심 ; <봉정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
전>, <율곡사 대웅전>)의 공포양식 ; 제공 외부에 쇠서(牛舌)를 만들지 않고
살미(山彌)첨차 끝 밑부분이 교두형(翹頭形)으로 처리되고, 공포의 결구수법이
첨차(檐遮)들이 십자형으로 결구되어 중첩되는 특징
● 백제문화권으로 분류되는 지역(동남부지역과 서남부지역 ; <개암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 <숭림사 보광전>, <불갑사 대웅전>) ; 포
작수법에서 제공 외부에 쇠서가 사용되고 주두에 연꽃조각, 첨차에 연꽃줄기
를 초각, 첨차의 공안형을 깊게 만든 것, 내부 쪽으로 살미에 연꽃봉오리 초각,
한대에 용두(龍頭)와 봉두(鳳頭) 등 장식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특징
● 지역에 따라 양식적으로 다소 차별성
● 불전건축의 특징
<율곡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개암사 대웅보전>
<숭림사 보광전>
<내소사 대웅보전>
● 불전 종류 ;
금당(金人=부처님), 종파에 따라 주존불(主尊佛)을 달리함.(화엄종(華嚴經)-비로자나불
(대적광전), 정토종(阿彌陀經, 무량수경)-아미타불(극락전), 천태종(妙法蓮華經)- 석가모
니불(대웅전)
1.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 ; 석가모니불을 주불 좌우협시에 문수, 보현보살을 모실 경우 대웅전, 협
시로 아미타불, 약사여래 - 대우보전(상격), 삼세불(석가모니, 미륵보살, 갈라보살), 삼신불(법신-비로자나불,
보신-아미타불과 약사여래, 화신-석가모니불), 선종 삼신불(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 영산회상의
장소, 반야용선의 선실을 상징, 석가모니불이 임하는 장소
2. 비로전(毘盧殿),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전(華嚴殿) ; 삼신불(비로자나불이 주불) 봉안-연화장세계 의미 - 비
로자나불, 아미타불(노사나불), 석가모니불-<해인사 대적광전>, <화엄사 각황전>
3. 극락전(極樂殿), 아미타전(阿彌陀殿), 무량수전(無量壽殿) ; 서방극락정토를 의미(불교의 이상향)-아미타불 주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협시불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안양(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
4. 천불전(千佛殿) ; 대승불교-천불(과거, 현재, 미래 삼겁에 각기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을 의미
5. 보광전(普光殿), 보광명전(普光明殿) ; 석가모니불이 주불 - 화엄경 여래명호품(화엄경 여래명호품)에 이름 연유
6. 적멸보궁(寂滅寶宮) ;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 - 양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중대>, 인제 설악
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자장율사에 의해 가져온 불사리(佛舍利)와 정골(정골)-<정암사>
는 통도사 불사리를 나누어 봉안, 비슬산 <용연사>(통도사 사리 분리 보관 사찰)
7.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 석가모니불과 팔상탱화 봉안 - 영산불국(영축산정은 부처가 묘법연화경을 설
법한 곳)-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불로 봉안-<법주사 팔상전>, <송광사 영산전>
8. 약사전(藥師殿), 유리광전(琉璃光殿) ; 약사여래(동방유리광세계교주) 주불,-질병과 재액이 소멸-일명(만월보전)
가. 불전(佛殿)
대도(大道)를 구하는 마음을 가진 자의 의미(도심중생(道心衆生), 도중생(道衆生), 대각유
정(大覺有情)-다음 생에 부처가 될 보살을 일생보처(一生補處) ;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
아미타불의 보처보살(補處菩薩), 일광보살, 월광보살 - 약사여래 보처보살, 미륵보살 - 석
가모니불의 보처보살 - 대승불교의 사상
소승불교 - 부처는 석가모니불이 유일, 보처보살은 미륵보살 한 분,
우리나라- 보현보살, 문수보살, 허공장보살, 지장보살, 약왕보살 등 수가 많지 않다.
1.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 ;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 일명, 원통전-원통교주
2. 미륵전(彌勒殿), 용화전(龍華殿) ; 미륵보살을 봉안- 금산사 미륵전
(1층-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용화지회(龍華之會), 3층-미륵전)
3. 문수전(文殊殿 ); 문수보살(지혜)
4. 응진전(應眞殿 );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 16나한
상, 끝부분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
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
나. 보살전(菩薩殿)
<금산사 미륵전 >
1. 문루 ; 일주문(一柱門), 불이문(不二門)(解脫門), 사천왕문(護法神像),
2. 조사당(祖師堂), 국사전(國師殿),
3.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北斗七星)
4. 산신각(山神閣) - 산신령
5. 독성각(獨聖閣) - 나반존자(말세 중생에게 복을 베푸는)
6. 삼성각(三聖閣) - 칠성, 독성, 산신
7. 승당(僧堂) - 선방(禪房) ; 수선당, 적묵당, 심검당, 선불장, 장경각, 범종각, 사물고,
무설전(講堂)
다. 기타
<도갑사 해탈문 >
<범어사 일주문 >
5. 불교건축 양식
5-1.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 ;
● 여러 단의 제공이 중첩되고 외목도리를 받추기 위하여 출목이 둘, 셋 뻗어나고 천장이
생략된 연등천정으로 마감되는 특성
●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은 외관이 화려하지 않지만 비용이 적게 들면서 격식을 갖출 수
있어 관아건축이나 산간 사찰건축에 많이 채택
● 여러 개의 살미를 수평방향으로 밖으로 길게 빼내어 규모가 큰 건축물에 적합하고 처마
를 받치기 위하여 비교적 긴재목이 요구되는 기법
● 항아리형 단면이나 우미량은 대형목재공급이 충분한 여건에서 가능한 목구조수법이나
16세기 이후 목재공급의 여건이 나빠질 때는 사용하기가 힘든 건축수법으로 당시의 사
회여건에서는 채택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
● 조선시대 불전건축의 주심포양식은 고려 말 <수덕사 대웅전>의 헛첨차와 보아지로
구성된 공포양식을 계승하면서 공포부재의 세부에 있어 점차 변화를 보여준다.
● 대표적 건축물 ;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거조암 영산전,
무위사 극락전, 송광사 국사전, 정수사 법당, 청평사 회전문, 도갑사 해탈문 등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 공포>
<부석사 무량수전 주심포>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 주심포>
<무위사 극락보전 >
<중국 남선사 대전 공포>
5-2. 다포양식(多包樣式) ;
● 공포가 처마하부를 가득 장식하고 포를 여러 겹으로 중첩시키므로 화려한 외관을 형성
내부에 천장이 설치, 처마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효과 - 당당한 외관을 갖는 궁전건축
이나 사찰건축 가운데서도 주불전에 많이 채택
● 고려 말의 <심원사 보광전> 공포양식을 계승하면서 중기 이후 다양하게 변화
● 조선시대중기 이후 출목수가 증가하며, 외출목수보다 내출목수가 1개 더 많아진다.
살미첨차의 외단은 대부분 쇠서형이며 초기의 것은 강직하나, 중기 이후부터 섬약진다.
말기의 쇠서는 연봉, 봉두를 조각하는 등 극히 장식적으로 변화
● 16~7세기에 들면서 살미의 일체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진행된다.
● 대표적 건축물 ; 개암사 대웅보전, 봉정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위봉사 보광명전,
숭림사 보광전, 환성사 대웅전, 쌍게사 대웅전, 율곡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 화암사
극락전 등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내소사 대웅보전>
● 기둥머리에서 주두와 밀착된 쇠서를 내밀어 기둥머리 부분을 구조적으로 보강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는 출목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치는 공포 본래의 기능까지 수용하는 형태
로 발전한 건축양식
● 17세기 이후 널리 확산되어 고유의 조선건축양식으로 정착되었고, 사찰건축에서는 부
전건축에 많이 사용
● 익공 ;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입공(立工), 엽공(葉工), 초입공, 이입공 >
1770년경부터 익공으로 통일, 무입공(無立工) - 쇠서의 끝이 둥글게 조각된 것(몰익공)
초기형태 ; 강릉 해운정과 오죽헌(烏竹軒)
● 익공양식과 유사한 결구방식으로 <해인사 대장경판고>나 <개목사 원통전>을 들 수 있
으나 이 건물은 내부가구방식이 주심포형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쇠서의 모양도 주
심포식을 따르고 있어 완전한 익공형식으로 정착하기전의 과도기적 형태로 분류
● <청평사 회전문>인 경우 기둥머리는 초익공 결구와 유사한 모습이지만 내부가구형식
은 주심포식을 따르고 있다. 기둥머리부분의 결구는 익공양식과 동일하나 상부가구는
주심포식을 따르는 건축물들은 절충적 시도에서 나타난 현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주심포양식에서 축척된 기법은 다른 양식으로 변용되거나 절충되어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창출된 양식이 익공양식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5-3. 익공양식(翼工樣式)
<화성성역의궤 익공도양>
● 초기에는 순수한 초익공(初翼工)과 이익공(二翼工), 중기 이후에는 몰익공으로 변화
● 주두의 높이가 낮아지고, 쇠서의 상면에 연봉과 같은 장식이 가미되며, 익공의 양면이
초각되기도 한다.
● 출목익공은 하나의 부재로 이루어진 초익공 부재가 밑면이 초각되고, 쇠서 하나로 마무
리되다가 점차 아래에 앙서(仰舌), 위에 수서(垂舌)로 마무리되고 또 앙서의 윗면에는
연봉과 같은 꽃모양으로 장식하고, 위의 수서뿌리는 날카롭게 마무리한다.
<해인사 대장경판고>
● 다포식과 주심포식이 적절히 혼합된 양식으로 <개심사 대웅전>이 대표적이다.
● 공포는 다포식을 따르고 개방된 천장과 장식이 있는 대공 등은 주심포양식을 따름.
● 조선후기 부불전(副佛殿) 또는 원당건물에 채택
5-4. 절충양식(折衷樣式)
<개심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 하앙은 지붕하중을 공포에 전달하는 긴 경사재로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수법
● <화암사 극락전> ; 내부 중도리 아래서 길게 뻗은 경사재가 처마 아래로 내려가 처마
도리의 하중을 지탱하는 하앙의 기능을 수행하고 단부는 용두로 장식
● 금산사 금강문 등 호서지역에는 하앙을 갖춘 다포식 건물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
는 흔적들이 발견되고 일본이나 일본의 고식 사찰건축물에서 많이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있다.
5-5. 하앙양식(下仰樣式)
<화암사 극락전 공포>
<화암사 극락전>
<화암사 극락전 공포>
<중국 下仰구조 대목작제도>
<일본 하앙구조 개념도>
5-6. 구 조
<천두식 구조>
<대량식 구조>
<전당식 구조>
<천두식 구조>
<청당식 구조>
<조적식, 대량식 구조>
<천두식 구조; 정양교>
<법주사 팔상전 중층 구조>
<씽봉사 대웅전 중층 구조>
<일본 다이호온지(大報恩寺本堂)목구조>
<일본 중층구조>
<일본 목구조>
<일본 누키구조>
●
대량식구조 ;
● 중국에서 대량식의 목가구는 춘추시대에 완성되었으며 그 후 계속 발전하여 하나의 완
전한 작법이 되었다.
● 기둥 위에 보를 설치하고 다시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를 혼용하여 한조의 목구조를 이
루게 된다. 평행한 두 개의 목구조 사이에는 횡으로 된 방을 사용하여 기둥의 상단에 연
결함으로써 여러 형태의 목구조를 이루게 되는 구조형식
감 사 합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