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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1

김환희**2

목차
I. 머리말
II. 고대 도시 관련 쟁점과 유적 검토

1. 고대 도시 관련 연구쟁점 검토
2. 고대 도시 유적 구성요소 검토

III.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IV. 맺음말

국문초록

고대 도시의 구조와 경관을 복원하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

한 부분이다. 본고에서는 고고자료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고대 도시를 구성하는 여

러 요소들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 도시 대부분에서 중심건물, 의례시설, 

공방시설, 창고, 도로 등이 갖추어졌음을 파악하였다. 다만 도성의 경우 성벽의 존

재가 확인되고 있어서, 성벽 없이 구를 이용한 공간을 구분하는 지방 도시와 차이점

이 있다. 또한 그 규모나 규격성에서도 중앙과 지방은 큰 차이가 있다.

고대 도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외곽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였다. 현재까지 고대 

도시유적에서 외곽이 축조되는 곳은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뿐이다. 이 2곳

은 여러 공통점이 보이는데, 6세기에 진행된 계획 천도라는 점과 규모가 확대된 도

시에 곽을 두르고 그 내부에 격자형 구획과 백성들의 거주역을 마련하였다는 점 등

이다. 이처럼 국가가 다른 2곳에서 유사한 양상이 관찰된다는 점은, 이 시기에 공유

* 이 논문은 “백제왕도 핵심유적 국제학술대회(2020.8)”의 발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

임을 밝혀둔다

.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panie1010@korea.kr.

이 연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책임운영기관 연구과제 「백제 고도 익산지구 운영
체계 연구

(NRICH-1805-A20F-1)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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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던 도성의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된다. 다만 그 등장요인에 대해서는 이

견이 존재하는데, 사비도성의 경우에는 자체적인 필요에 따라 발생하였다고 보는 

반면, 장안성의 경우에는 북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대외정세와 도성 구조의 유사성을 살펴본 결과, 북조와 고구려, 고구려와 백제의 관

계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외곽의 축조 시점이 고구려보

다 백제가 빠르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천도는 

사전에 충분한 계획 아래 진행된다는 점과 사비기에 고구려 요소가 다수 확인된다

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외곽의 축조는 도성의 도시화라는 변화 속에서 백성들을 수용하기 위한 필요성

이 대두됨에 따라, 북조의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지형 및 상황에 맞게 받아들인 것

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외곽은 방어기능뿐만이 아니라 도시 경계까지 설정

하는 당시 도시 범위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주제어 

고대, 도시, 외곽, 등장,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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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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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정치․사회․경제 활동의 중심지인 도시의 일반적인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 주변 도시들과의 통폐합을 거치면서 거점 도시로 성장하거

나 소도시로 전락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도시의 발

전은 고대 국가의 성립과정에서 보다 선명하게 관찰되는데

, 연맹왕국

단계에서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며 나타나는 도성의 존재가 바로 그

것이다

. 도성은 고대 국가의 수도로 기능하며, 지방 도시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가장 핵심적인 중앙 도시라 할 수 있다

고대 도성에 대한 연구는 주로 천도를 중심으로 도성사를 검토1하거

나 각 도성을 중심으로 도시 구조 및 경관을 복원2하려는 시도가 이루

어지고 있다

. 이외에도 기존의 도성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양식인 외

곽의 등장에 대한 검토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 일반적으로 새로

1

全德在

,「韓國 古代의 王京과 都城, 地方都市」,뺷歷史學報뺸207, 2010; 김희선,「고대 동아시아

의 천도와 도성 

-계획 천도와 좌북조남석 도성구조를 중심으로-」,뺷동아시아 문화연

구뺸

63,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5.

2

기경량

,「고구려 왕도․도성의 공간과 경관」, 뺷고대도성과 월성의 공간구조와 경관뺸, 국

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19b; 박순발,「백제 도성의 경관」,뺷동아시아 문화의 정수, 백제

왕도뺸

,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2019; 서정석,「웅진 왕도 경관

의 시론적 탐색」

,뺷동아시아 도성경관의 상징, 백제왕도뺸,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

존관리사업추진단

, 2019; 이상준,「신라왕경의 개발과정과 고고학적 경계」,뺷신라 왕경

과 월성의 공간과 기능뺸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9; 이현숙,「최신 조사성과를 통해 

본 공산성과 웅진왕도의 경관」

,뺷동아시아 도성경관의 상징, 백제왕도뺸, 문화재청 백제

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

, 2019; 전용호,「고대 익산 지역의 왕도 경관 성립과 

변천」

,뺷동아시아 도성경관의 상징, 백제왕도뺸, 문화재청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

업추진단

, 2019; 심상육,「발굴자료를 통해 본 사비도성의 변천과 경관」,뺷百濟文化뺸6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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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양식의 등장에 대해서는 자체 발생 또는 외부 요인으로 인한 전파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 이러한 등장 요인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사

회상을 추정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인식된다

. 후술하겠지만 고대 도시

에서 도시 외곽의 축조는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에서만 확인

되고 있는데

, 2곳의 도성에서 시기, 정치, 구조, 공간적인 부분까지 여

러 유사한 점이 관찰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 아마도 당시 천도 계획 단

계부터 유사한 도성의 구조를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추정되며

, 더 나

아가 당시 사회적 인식 확대에 따는 규모의 확대와 백성들의 포용이라

는 부분까지 해석해볼 수 있다

. 즉, 외곽은 당시 사회 변화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등장 요인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본고에서는 고대 도시들

, 그중에서도 발굴조사가 상당 부분 진행되

었거나 관련 연구가 진행되어 구조가 어느 정도 밝혀진 도성 유적을 중

심으로 구조적 특징을 정리하고

, 이를 토대로 고대 도시의 핵심 구성요

소를 파악하고자 한다

. 다음으로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에서 

등장하는 외곽의 축조와 관련하여

, 그 등장 요인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

II. 고대 도시 관련 쟁점과 유적 검토

도시를 크게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하곤 하지만

, 시대의 변화 흐름에 

따라 그 경계는 분명해지기도 또는 모호해지기도 한다

. 물론 고대 도시

의 경우에는 왕이 거주하는 곳을 중앙으로

, 그 외 지역을 지방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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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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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고 있지만

, 천도가 단행되면서 선정되는 지역의 이동에 따라 중앙

과 지방의 설정은 변화해왔다

.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왕이 있는 곳이 

중앙 도시이고

, 왕도이며, 도성이라 불리는 국가의 수도라는 사실이다. 

한편

, 이러한 용어들은 연구자 간의 인식에 따라 선택되어 사용되고 있

는데

, 최근 고대사 자료에서 고구려 용례 검토를 통해 도성보다 보편적

으로 사용된 용어는 왕도였던 것으로 파악한 견해3가 주목된다

. 또한 

와 郭

, 그리고 京을 중심으로 도성 관련 용어의 검토도 진행된 바 있

.4

들어가기에 앞서 도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여러 연구자들이 도시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

의 접근으로 시도하였지만 아직까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답을 찾아

내지는 못하였다

. 아마도 도시라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나타

나는 여러 현상들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 이를 정의하

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 실제로 도시의 개념은 시대

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 이에 따라 먼저 도시가 어떤 의미인지

를 고려해보고자 한다

. 우선 도시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국립국

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특정 시설물

과 계층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는다

. 기존 연구에서는 도시 요건으로

서 시민들의 기능적 전문화와 노동의 분화가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5가 

3

기경량

,「한국 고대사에서 왕도(王都)와 도성(都城)의 개념 -고구려의 용례를 중심으로

-」,뺷역사와 현실뺸104, 2017, 184쪽.

4

권순홍

,「도성 관련 용어 검토 -‘都’․‘郭’․‘京’을 중심으로-」,뺷사림뺸62, 2017,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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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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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 이는 특정 시설물의 존재보다 생산소비와 관련된 사람들의 직

능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 또한 분화된 시민들이 거주하

고 특정 건물의 존재와 이를 총괄하는 도시 기획이 있더라도 도시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설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6도 있다

. 한편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해 도시와 도성의 의미를 살펴보는 검토도 진행된 바 있다

.7 

이처럼 특정 요소만으로 도시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 그러나 우리가 

도시로 인정할 수 있는 여러 유적들에서 나타나는 구성요소를 파악하

여 추출할 수 있다면

, 역으로 추출된 구성요소를 바탕으로 도시인지 아

닌지에 대한 검토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한편 한자가 결

합된 형태를 볼 때

, 도시는 都(도읍=그 나라의 수도)과 市(시장)이 결합된 것

으로

, 특정 시설물과 계층을 가리키고 있다. 즉, 사람의 군집과 더불어 

정치적 수장의 존재

, 그리고 경제활동의 중심지인 시장의 존재 등이 표

현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를 중시한다면 결국 도시는 수도, 즉 

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 시장이라는 경제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도성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면

, 도성은 ‘왕이 평상시 거주

하는 궁성과 관부 및 그 주위를 에워싼 성곽으로

,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정치

,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고고학사전)’을 의미한다. 

, 도성은 특정한 정치적 위상을 가지는 읍을 중심으로 외곽에 담장 

5

이성주

,「마을(村落)과 都市에 관한 考古學의 論議」,뺷고고학뺸 11(2), 2012, 18쪽에서 재인

.

6

이성주

, 앞의 글, 2012, 18쪽.

7

박선미

, 「한국고대도시의 기원 연구」, 뺷白山學報뺸 1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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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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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시설물을 설치하여 방어 및 통치체계를 갖춘 구조를 말한다

. 한

자의 뜻을 풀이하면 都와 城이 결합된 것으로

, 市 대신 사용된 성의 등

장이 주목된다

. 도읍을 감싸는 성은 경계 설정과 방어체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

한편 성과 관련하여 성곽이라는 용어가 주목된다

. 성곽은 ‘내성(內城)

과 외곽(外郭)의 합성어로

, 안쪽에 지배자 집단의 구역을 에워싼 벽과 그 

바깥으로 피지배자 집단의 거주 공간까지 에워싼 성벽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구조(고고학사전)

’를 의미한다. 중국 옛 문헌인뺷管子뺸도지 편에는 

‘안에는 성을 만들고 성 바깥에는 곽을 만든다’고 하여8 성과 곽의 위치

를 기록하고 있다

. 또한 뺷吳越春秋뺸에는 ‘성을 쌓아 군왕을 보위하고 곽

을 지어 백성을 지킨다

. 이것이 성곽의 시초였다’고 하여 성과 곽의 기

능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9 일반적으로 성곽은 도성의 하나의 구성

요소로 여겨지고

, 도성이 아닌 일반 도시에서도 산성 또는 방어성 등으

로 사용되고 있어서 도성만을 위한 시설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

.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고대 국가의 도성에서도 성은 이른 시기의 

도성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 곽은 6세기에 조성된 백제 사비도성과 고

구려 장안성에서야 나타나기 시작하여

, 성곽이 모두 갖춰지는 시기는 

상대적으로 늦다고 할 수 있다

. 즉, 곽의 축조는 6세기대 계획 천도 과

정에서 기획된 시설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하면

,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용어들은 어떤 시설물을 중심으로 

8

기경량

, 앞의 글, 2017, 175쪽.

9

박순발

, 앞의 글, 2019,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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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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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차이

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예를 들어 도시에는 시장이, 도성

에는 성이

, 성곽에는 성과 곽이 항상 존재해야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 어떤 경우에는 도시와 도성이 혼재되어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만 개념상으로 이해할 때 각 용어가 포괄하는 범위는 도시

, 도성, 성

곽 순으로 좁아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 고대 도시의 조사․연구는 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 삼국시대 도성의 주요 연구쟁점을 먼저 살펴본 후에 도성 유적

들과 일부 지방도시 유적까지 포함하여 구성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대 도시 관련 연구쟁점 검토

고대

, 그중에서도 삼국시대 도성의 변화 흐름을 살펴보면, 국가별 상

황에 목적에 따라 천도 여부가 결정되고 이에 따른 다양한 변화상이 관

찰된다

. 이러한 변화와 함께 수반되는 여러 문화적 특징들을 통한 비교

와 검토는 도성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져 왔다

. 본 절

에서는 삼국시대 도성의 구성요소를 검토하기에 앞서 해당 연구에 있

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을 검토하고 정리하여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

고자 한다

.

1) 고구려
고구려의 도성 체계는 평상시 거주용인 평지성과 비상시 방어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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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83

산성의 세트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 이에 따라 고구려 도성 연구는 평

지성과 산성을 어떤 유적에 비정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

어 왔고

,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결과들이 도출

되었다

. 초기 도성은 환인지역의 하고성자성과 오녀산성, 중기 도성은 

집안지역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 후기 도성은 평양지역의 전기에는 안

학궁과 대성산성으로

, 후기에는 장안성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고구려 

도성 유적의 발굴조사가 아직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조사를 일부 진행하더라도 후대 개발로 인해 원형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황이어서

, 조사 결과를 토대로 당시 도성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은 쉽

지 않다

. 이러한 자료의 한계 속에서 도성의 위치 비정, 축조시점, 구조 

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이 절에서는 고구려 도성의 구조와 구성요소를 검토하기에 앞서

, 도

시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당시 중심 도시인 도성이 어디였으며

, 그 시기

는 언제였는지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 도성별 주요 쟁점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먼저

, 초기 도성에서 쟁점은 졸본성을 어느 유적에 비정할 수 있느냐

는 것이다

. 기존 연구내용을 살펴보면 하고성자성, 나합성, 고력묘자촌 

일대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

, 그중에서 하고성자성을 졸본성으로 비정

하는 견해10가 가장 유력하다

. 그러나 “졸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

를 세웠다

.”는 광개토왕비문 기록에 따르면 졸본성은 오녀산성의 동쪽

10

박순발

,「高句麗의 都城과 墓域」,뺷한국고대사탐구뺸12, 2012. 46∼49쪽; 한국고고학회,뺷한

국 고고학 강의

(개정 신판)뺸, 사회평론,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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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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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위치하여야 하는데

, 하고성자성은 오녀산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

어서 기록과 실제 방위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 또한 하고성

자성의 발굴조사 결과 내부에서 궁전으로 볼만한 유구가 확인되지 않

았다는 한계도 있다11

. 한편, 위에서 언급된 위치에 대한 기록을 적극 

해석하여 오녀산성 동쪽에 위치한 나합성을 졸본성으로 보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 그러나 나합성은 거리상 오녀산성과 상당히 멀고, 그 사이 

공간도 여러 개의 산맥으로 막혀 있어서 교통이 용이하지 않으며

, 주변

에서도 고구려 도성 인근에 위치한 초기 고분군도 확인되지 않아 졸본

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12 또한 석축의 모습이 성벽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사 과정에서 채집된 유물도 모두 중화민국 시기라는 점13을 보면

, 나

합성을 졸본성으로 비정할 수는 없다

. 최근에는 위에서 언급된 여러 문

제(오녀산성과의 방위, 거리, 고분군의 존재 등)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고

력묘자촌 일대가 대두되었다

. 그러나 앞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었

다 하더라도 실제 도성으로 기능한 성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은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 한편 고력묘자촌 일대의 지형 조건을 검

토한 결과 깊은 골짜기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중심지로 기능하기는 적

합하지 않다는 견해14도 제시되었다

. 이처럼 졸본성의 위치를 구체적

으로 밝히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추가 자료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논의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이와 별개로 평지성이 아닌 

11

기경량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논문, 2019a, 49쪽.

12

기경량

, 앞의 글, 2019a, 52∼53쪽.

13

양시은

,「고구려 도성 연구의 현황과 과제」,뺷高句麗渤海硏究뺸 50, 2014, 45쪽.

14

기경량

, 앞의 글, 2019b,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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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85

오녀산성 자체에 주목하여

, 도성의 중심 공간이 산성인 오녀산성이고 

평지의 거처는 임시로 머무는 보조적 존재로 인식하면서 오녀산성이 

곧 고구려의 왕성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15

중기 도성에서 쟁점은 졸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과 국내성의 

축조 시점에 대한 것이다

. 기존 연구내용들을 살펴보면, 해당 시기의 

평지성이 국내성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천도 시점에 대해서는 

유리왕대(B.C.19∼A.D.18)

,  태조왕대(53∼146),  신대왕대(165∼179),  산상

왕대(197∼227)

 등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16 각각의 의견을 정리하기에

는 양이 방대하여 본 절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 유리왕대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 것 같다

.17 한편 국내성에서 조사

된 고고자료를 토대로 산상왕대로 보는 견해 등 연구자간 다양하게 논

지가 전개되고 있다

.18 최근에는 위나암성을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등장하고 있으며

, 문헌기록 간의 내용이 서로 모순이 되고 있어

서 여전히 논란이 많다

.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태조왕대 천도설과 신

대왕대 천도설도 다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19

다음으로 국내성의 축조 시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 뺷삼국사

기뺸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342)년조에는 “봄 이월에 환도성을 수즙하
고 또 국내성을 축조하였다

”고 명시되어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상대적

15

기경량

, 앞의 글, 2019a, 62∼63쪽.

16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00쪽.

17

박순발

, 앞의 글, 2012, 56쪽.

18

여호규

,「高句麗 國內城期의 도성 경관과 토지 이용」,뺷高句麗渤海硏究뺸 65, 2019, 69쪽; 양시

, 앞의 글, 2014, 53쪽.

19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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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86

으로 적다

. 또한 발굴조사 중 석축 성벽에서 니질 태토의 토기 파편이 

출토되어

, 축조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20 한편 출토된 권운문와당과 

유적의 층위양상을 통해

, 4세기 전반에는 국내성 내부 전체가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상한은 

3세기 중반 이전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

해도 제기되었다

.21 그러나 앞서 살펴본 집안으로의 천도 시점을 B.C. 

1세기 유리왕대로 상정하고, 국내성의 축조 시점을 4세기대로 상정한

다면 두 시점간 공백의 시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 이에 대해 환도

산성과 함께 인식하여 적어도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중반까지 집안지

역에 평지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환도산성이 왕성으로의 위상을 가

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22가 주목된다

. 이는 앞서 살펴본 오녀산성도 

평지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왕성으로의 역할과 위상을 가졌다고 보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 그러나 환도산성 역시 내부에서 확인된 궁전지와 

팔각형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5세기대 이후로 편년되어23 여전

히 논란이 있다

.

마지막으로 후기 도성의 쟁점은 안학궁의 성격과 축조 시점에 대한 

것이다

. 북한 학계에서는 전기 평양성의 산성인 대성산성과 함께 구성

된 평지성으로 보고 있다

.24 그러나 안학궁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와당

의 문양과 형태가 청암리토성 출토 와당보다 늦다는 점

, 고구려에서 유

20

양시은

, 앞의 글, 2014, 51쪽.

21

여호규

,「고구려 국내성 지역의 건물유적과 도성의 공간구조」,뺷한국고대사연구뺸 66, 

2012, 68쪽.

22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06쪽.

23

양시은

, 앞의 글, 2014, 54쪽.

24

양시은

, 앞의 글, 2014,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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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87

일하게 암막새가 출토되는 점

, 5세기 말∼6세기 초로 편년되는 고구려 

횡혈식석실분을 파괴하고 축조된 점 등 때문에 안학궁을 전기 평양성

으로 보기는 어렵다

.25 한편 문헌기록에서 묘사되고 있는 평양성의 모

, 입지상의 설명 등을 토대로 청암리토성을 전기 평양성의 평지성으

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26 그러나 청암리토성의 발굴조사 결과, 사

찰 유구만 확인되고 있어서 성으로 볼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대두되었

고 이에 대한 해석의 일환으로 왕궁으로 먼저 사용되다가 이후에서 사

찰로 전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27 한편 내부 공간이 협소하고 언급한 

바와 같이 사찰 유구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왕성으로 기능하지 않았

다고 보기도 한다

.28 한편, 안학궁 남쪽에서 확인되는 격자형의 구획에 

대해서

, 북한학계에서는 안학궁의 도시 구조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

. 그러나 실제 도면이나 사진 자료들이 제시된 바 없으며, 일제강점

기 지적도에서도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이 확인되지 않아서 관련 자료

의 확보 이후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29

종합하면 고구려 도성 연구에서 쟁점이 되는 여러 문제들은 무엇보

다도 자료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 소략한 조사내용과 충

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발굴조사는 해석의 영역을 더욱 확장시켰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 특히 고고자료의 부족은 

25

박순발

, 앞의 글, 2012, 73쪽; 양시은, 앞의 글, 2014, 60쪽.

26

박순발

, 앞의 글, 2012, 68∼69쪽.

27

임기환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뺷한국사연구뺸 137, 2007, 17∼18쪽.

28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13쪽.

29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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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88

도성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더욱 큰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 추후 

도성의 구조를 밝힐 수 있다면 역으로 도성의 비정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백제
백제는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후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

를 단행한다

. 천도의 요인은 외세 침입에 따른 세력의 축소와 국력 회

복에 따른 세력의 확대라는 극명하게 다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이

러한 요인은 당시 도성의 입지와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 도성 연구는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한 자료의 확보와 이를 기

초로 진행한 다각적인 검토를 통해 도성의 면모가 상당 부분 밝혀지고 

있다

. 특히 최근에는 도성의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 도성 경관을 복원

하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 다만 아직까지도 

분명하지 않은 왕궁의 위치

, 특정 시설물의 조성 시점 등은 여전히 이

견이 있는데

, 이는 다각적 검토와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밝

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절에서는 백제 도성의 구조와 구성요소를 검토하기에 앞서

, 시기

별 도성 연구의 쟁점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먼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한성기 도성은 지속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구조와 성격 등이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 도성들의 위치 비정을 비롯한 축조 시기 등에 

대한 이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30 현재 고고자료와 문헌기록을 통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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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89

인된 한성기 도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2곳이며, 2개의 성이 하나의 

세트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물론 각 성의 축조 선후관계나 

역할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 먼저 풍납토성의 경우 성

벽의 축조 시점에 대해 

2세기설과 3세기 중․후엽설이 양립하고 있는

, 성벽의 발굴조사 결과와 종합적인 연대 검토를 통해 초축 성벽의 

축조는 

3세기 중후반∼4세기 초 무렵에 착공하여, 4세기 전반∼중엽 

무렵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한편 몽촌토성의 축조시점도 3세기 

말∼

4세기 초 하한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한성기 도성의 경관은 풍납

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 주변에 분포한 백성들의 거주역, 바깥에

서 확인되는 묘역 등으로 구성된다

.31 다만 도시 전체를 감싸는 곽의 

실체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아 외곽의 축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각 성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느 성이 왕성으로 기능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다

. 이에 대해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몽촌토성을 군사방

어성으로 보는 견해32와 풍납토성이 북성이자 대성으로

, 몽촌토성이 

남성이자 왕성으로 보는 견해33가 양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

다음으로 웅진기 도성에서 중요 쟁점은 왕궁의 위치가 어디인가인

, 크게 공산성 외부설과 내부설로 구분된다. 공산성 외부에 왕궁이 

30

박순발

,뺷백제의 도성뺸, 충남대학교 출판부, 2010, 47∼63쪽.

31

박순발

,「동아시아 도성사에서 본 백제도성」,뺷古代 東亞細亞 都城과 益山 왕궁성뺸, 국립부

여문화재연구소

, 2014b, 19∼20쪽.

32

여호규

,「城時期 百濟의 都城制와 防禦體系」,뺷百濟硏究뺸 36, 2002, 9쪽.

33

박순발

,「동아시아 고대 도성 民里의 형성과 전개」,뺷역사문화연구뺸 52, 2014a,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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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90

있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구 중에서 왕궁

으로 볼만한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왕궁은 내부가 아닌 

공산성 외부 남쪽의 공주 시가지 일원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4 

그러나 시가지 일대 역시 아직까지 왕궁으로 볼만한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 기와를 비롯한 중요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서 여전히 공산성 

내부에 왕궁이 존재할 가능성을 추정하기도 한다

.35 한편 최근까지 진

행된 공산성 쌍수정 남쪽의 추정왕궁지와 공북루 남쪽의 발굴조사 결

과가 보고되었다

. 쌍수정 일대의 추정왕궁지는 백제의 왕실 중심 의례

건축공간으로서 정전과 같은 시설일 가능성을 추정하였으며

, 공북루 

일대는 도로와 배수로에 의해 별도의 공간구획이 이루어지고 다수의 

벽주건물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왕궁 관련 유적(문서행정, 관영공방, 생활건

물 등

)

으로 추정하였다

. 이러한 흔적들을 왕궁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있

.36 한편 웅진도성에 나성(=외곽)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지만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서 나성의 존재는 상정할 수 없다

.37

마지막으로 사비기 도성에서의 쟁점은 나성

, 즉 외곽의 축조 시점에 

관한 것인데

, 크게 천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외곽의 축조를 천도 이

전이라고 보는 주 논거는 도성 방어에 필수적인 외곽이 없이 천도가 이

루어졌다고 상정하기에는 순서상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

, 경외매장이

라는 인식의 반영 아래 나타나는 능산리고분군과 외곽의 위치 관계를 

34

박순발

, 앞의 글, 2010, 205쪽.

35

서정석

, 앞의 글, 2019,109쪽.

36

이현숙

, 앞의 글, 2019, 42쪽.

37

박순발

, 앞의 글, 2010,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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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91

고려한 점

, 성벽 절개 조사시 성토층에 혼입된 삼족기가 5세기 전반으

로 비정 가능한 점 등이다

.38 한편, 천도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주 

논거는 능산리사지 중간에 해당하는 외곽의 일부분이 만곡하여 휘어

진 부분을 주목한다다

. 이 부분에 대해서 능산리사지가 먼저 지어졌기 

때문에 외곽이 이를 우회하여 축조된 형상으로 이해하여

, 능산리사지 

조영(567년)

 이후에 외곽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축조의 배경으

로는 위덕왕대 신라와 군사적 긴장관계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

였다

.39

정리하면

, 백제 도성 연구에서 쟁점은 자료의 해석과정에서 어떤 부

분을 중심으로 두는가에 대한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 다행

히 해당 유적들의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 성과가 꾸준히 누적되고 

있어서 이러한 논의가 곧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3) 신라
몇 차례 도읍을 옮겼던 고구려

,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처음 경주에 

자리 잡은 이후 계속 도읍으로 유지되었다

. 여러 문헌기록에 따르면 신

라 최초의 왕성은 금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 그 실체와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40 다음으로 언급되는 신라의 왕성은 월성이다. 월성은 파사이사

금 

22년(101)에 축조하고 정궁을 옮겨 궁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문헌에서 보이는 축조시기와 고고자료의 편년 설정의 차이가 

38

박순발

, 앞의 글, 2010, 235∼236쪽.

39

이남석

,「사비도성의 경관과 나성의 축조배경」, 뺷百濟文化뺸 50, 2014, 274∼276쪽.

40

황보은숙

,「신라의 왕경과 지방도시」, 뺷신라고고학개론上뺸, 진인진, 2014, 9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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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92

확인된다

. 발굴조사 결과 월성 해자와 성벽의 기저부에서 출토된 유물

이 

3세기 후반으로 편년되고 있어서 월성의 축조시기는 3세기 이전으

로 보기는 어렵다

.41 이후 월성에 대한 기록은 자비마립간 18년(475)에 

명활산성으로 잠시 이거하였다가 소지마립간 

9년(487)에 월성을 수리

하고 이듬해인 

488년 다시 월성으로 이거한 기록 등이 확인된다. 즉, 월

성은 지속적인 유지 관리 아래 왕성으로 꾸준히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

. 6세기 이후에는 월성 외에 양궁과 사량궁이 존재하였다고 기록되

어 있지만 고고자료로 밝혀진 바는 아직까지 없다

.42

한편

,  최근 신라 왕경과 경관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

.43 신라 왕경 연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 주로 도시구획과 관련된 조방제와 이에 따른 왕경 복원 

등이 주 관심사였다

.44 이후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

되면서 다수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 이 과정에서 중요 유적들의 흔

적이 다수 확인되었다

. 이러한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 성과에 따르면, 

신라 왕경의 도시화는 

6세기 전반까지 월성 주위에 적석목곽분이 계속 

조영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45 6세

기 중엽을 시작으로 단계별 확장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46 다만 왕

41

한국고고학회

, 앞의 글, 2011, 336쪽.

42

한국고고학회

, 앞의 글, 2011, 337쪽.

4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영남고고학회

,뺷신라 왕경과 월성의 공간과 기능뺸, 2019;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한국상고사학회

,뺷고대도성과 월성의 공간구조와 경관뺸, 2019.

44

황보은숙

, 앞의 글, 2014, 59∼60쪽 참조.

45

全德在

, 앞의 글, 2010, 337쪽.

46

황보은숙

, 앞의 글, 2014,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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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93

경과 왕도의 인식과 왕경과 도시화의 범위 설정 등에 대해서는 연구자

마다 의견 차이가 있다

.47

2. 고대 도시 유적 구성요소 검토

앞서 살펴본 고대 도성들은 해당 시기의 가장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

없기 때문에

, 도시를 이루는 대부분의 구성요소들이 포함되었을 가능

성이 매우 크다

. 따라서 해당 유적들의 구성요소를 추출하여 공통점과 

차별점이 간취된다면

, 역으로 도시의 구성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파

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따라서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

진 내용과 문헌기록을 토대로

, 고대 도시 유적의 구성요소를 추출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고구려(<표 1>, <그림 1>)
먼저 발굴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 성의 구성요소에서 성, 문, 중심 건

물은 규모나 구조에서 대동소이하지만 성을 구성하는 필수 구성요소

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 다만 종묘 등과 같은 의례시설은 현재 환도산

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 이것이 조사자료의 확보 여부에 따른 것인

, 환도산성의 주된 성격을 보여주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도성에서 종묘와 같은 의례시설은 필수요소였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한편, 도로의 경우 평지성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47

황보은숙

, 앞의 글, 2014, 9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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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94

서 당시 구획의 흔적을 보여주며

, 특히 장안성에서 보이는 격자형 구획

은 당시 도시 구획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이와 함께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장안성에서 등장하는 곽의 존재라 할 수 있다

. 결국 장안성 단

계에서 곽이 등장하고 격자형 도시 구획이 나타나는 등 도성 조영의 획

기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 일부 도시 구획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

각되는 국내성의 경우에도 국내성 내에는 나부의 지배세력이 도성으

로 중심으로 각 방위별로 집주하면서 경관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48

고 보기도 하지만

, 실증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조심스럽다는 지적

도 있다

.49 한편 지금까지 조사된 주거지의 양상을 통해 볼 때 평지성 

외부의 넓은 공간에 일반민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

겨진다

.50 이처럼 고구려 성 내부에서 확인되는 구성요소는 지배층과 

관련된 요소들이 주로 확인되고 있으며

, 피지배층인 백성들의 거주역 

등은 확인되지 않아 당시 성 내부는 백성들이 주로 거주하는 공간이 아

니었음을 보여주며

, 장안성 단계가 되어서야 백성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성이 기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뺷三國史記뺸에도 도성 내 구성요소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

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 별궁,51 사당,52 종묘와 사직,53 창고54 등이 그

48

여호규

, 앞의 글, 2012, 73쪽.

49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08쪽.

50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09쪽.

51

뺷三國史記뺸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琉璃王 三年

, 秋七月, 作離宫於鶻川.

뺷三國史記뺸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琉璃王 秋七月

, 作離宮於豆谷.

52

뺷三國史記뺸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大武神王 三年

, 春三月, 立東明王廟.

53

뺷三國史記뺸卷第十七 髙句麗本紀 第五 東川王 二十一年

,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

壤城

, 移民及廟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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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95

것이다

. 이러한 내용은 앞서 살펴본 고고자료의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

어서

 참고할 만하다.

뺷三國史記뺸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故國壤王 三月

, 下教, 崇信佛法求福. 命有司, 立國社, 修宗廟.

54

뺷三國史記뺸卷第十八 髙句麗本紀 第六 故國壤王 六年

, 春, 饑人相食, 王發倉賑給.

<그림 1> 고구려 도시 유적 평면도(스케일 不同) ※관련 논문 및 보고서에서 재인용

1.오녀산성(양시은,「고구려 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a, 21쪽), 2.하고성자성(박순발, 앞의 글, 2012, 

48쪽), 3.국내성(양시은, 앞의 글, 2013a, 57쪽), 4.환도산성(양시은, 앞의 글, 2013a, 61쪽), 

5.청암리토성(양시은,

뺷고구려 성 연구뺸, 진인진, 2013b, 92쪽), 6.안학궁(양시은, 앞의 글, 2013b, 83쪽), 

7.대성산성(양시은, 앞의 글, 2013b, 86쪽), 8.장안성(양시은, 앞의 글, 2013b, 89쪽; 한국고고학회, 앞의 글, 2011,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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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96

2) 백제 (<표 2>, <그림 2>)
고고자료가 확보됨에 따라 도성의 구조와 경관을 복원하려는 시도

유적명

규모

(전체둘레/면적)

구성요소

비고

중심
건물

도로

의례
시설

저장
시설

생산
시설

오녀산성

4,574m /

730,000㎡

×

×

×

×

․ 

고구려 기와는 전혀 

출토되지 않음

하고성자성

약 1,000m /

약 38,400㎡

×

×

×

×

×

․ 

와당 1점을 제외하면 

기와 출토되지 않음

․ 

왕궁으로 볼만한 건축

유구 확인되지 않음

나합성

약 800m /

약 40,000㎡

-

-

-

-

-

-

-

-

․ 

수몰지역로 구체적인

양상 알 수 없음

국내성

2,738m /

약 350,000㎡

×

×

×

×

․ 

성 중앙 중요건물지를 

왕궁으로 추정

․ 

평면도에 표시된 도로 

망이 고구려 당시의 

도로망일 가능성 있음

환도산성

6,947m /

약 1,950,000㎡

×

×

×

×

․ 

궁전지 조성 시점에 

대한 이견이 있음

안학궁

2,488m /

약 386,000㎡

×

×

×

×

×

․ 

안학궁 외부 남쪽에 

도로망 구획

(실물자료 미확인)

대성산성

7,076m /

약 2,670,000㎡

×

×

×

×

․ 

170여기의 저수시설

․ 

불경과 불상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 출토

청암리

토성

3,450m /

약 1,890,000㎡

×

×

×

×

×

․ 

사찰로 추정

․ 

서문지 동쪽 지점에서 

대형 초석건물지 확인 

장안성

약 16,000m /

약 12,630,000㎡

×

×

×

․ 

내성은 궁성, 중성은 행정 

관청, 외성은 백성 거주 구역

․ 

외성 격자형 구획

<표 1> 고구려 도시 유적 구성요소

(※면적의 경우 미보고자료는 구글 지도, 해당 도면의 축척으로 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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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97

가 진행되고 있는데

,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도성, 즉 도시가 어떤 요소

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 도시의 성격에 따라 구성요소가 

달랐을 것이라는 점은 생각해볼 수 있지만 실제 중앙도시

, 즉 도성과 

지방도시

, 즉 거점도시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이에 문헌자료와 현재까지 보고된 조사자료를 토대로, 일부 지방

도시와 함께 도시의 구성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중앙 도시

, 즉 도성은 여러 시설로 구성된 경역을 성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 양상이다

. 내부에는 궁과 관청 등 지배계층과 관련된 중심 

건물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 이와 함께 의례시설, 생산시설, 저장시설 

등이 함께 분포한다

. 각 공간은 특정 의도를 가지고 구획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되며

, 일부에서는 도로를 통한 세부 구획도 확인된다. 한

,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의 거주역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풍납토

성의 경우 성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거주역이 확인되고 있지만 

공산성의 경우 내부에서 백성들의 거주역은 확인되지 않는다

. 사비도

성은 도성을 감싸고 있는 곽이 새롭게 등장하며

, 내부와 외부에 도로망

을 기준으로 한 백성들의 거주역이 배치되는 구조의 변화가 확인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고구려 장안성에서 보이는 것과 같아 

III장에서 

함께 검토하고자 한다

. 한편 지방 도시 즉, 거점 도시에서는 도시 전체

를 감싸는 거대한 성벽은 확인되지 않으며

,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공간은 지상건축물이 아닌 구를 통해서 구획된 점이 주목된다

. 이를 제

외하면 거관의 처소를 비롯해 의례시설

, 생산시설 등도 구획된 공간에 

배치되고 있어서

, 큰 틀에서 중앙 도시인 도성과 차이가 없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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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298

추정된다

다음으로 뺷三國史記뺸에도 도성 내 구성요소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

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사당

,55 제단,56 남당(=政廳),57 제방58 등이 그것

이다

. 이러한 내용은 앞서 살펴본 고고자료의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어

서 참고할 만하다

.

55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溫祚王 元年

, 夏五月, 立東明王廟.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溫祚王 夏四月

, 立廟以祀國母.

56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二 古尒王 十年

, 春正月, 設大壇, 祀天地․山川.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 冬十月

, 王設壇, 祭天地.

57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東城王 十一月

, 宴羣臣於南堂.

58

뺷三國史記뺸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武寧王 十年

, 春正月, 下令完固隄防, 驅内外㳺食者歸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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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299

유적명

규모

(성벽길이/면적)

구성요소

비고

중심
건물

도로

의례
시설

저장
시설

생산
시설

풍납토성

약 3,500m /

약 840,000㎡

×

×

․ 

백성들의 거주역이 

성 내․외부에서 확인

몽촌토성

약 2,300m /

약 216,000㎡

×

×

×

×

․ 

적심건물지, 판축대지 

등이 확인되나 시기가

불분명함

공산성

약 2400m /

약 200,000㎡

×

․ 

문서행정, 공방 등 확인

백성 거주역 확인되지 

않음

사비도성

남북․동서 

4,000m / 

약 16,000,000㎡

×

․ 

외곽시설 등장

왕궁리

유적

약 1500m /

약 115,000㎡

×

×

․ 

유적 외부 남쪽에서 

도로유구 확인

세종 

나성리

유적

-

최소 약 

200,000㎡

×

×

×

․ 

외부 방어성 별도 존재

․ 

구획구를 통한 공간 

구분

광주 

동림동

유적

-

최소 약 

100,000㎡

×

×

×

×

․ 

구획구를 통한 공간 

구분

광주 

산정동

유적

-

최소 약 24,000㎡

×

×

×

․ 

구획구를 통한 공간 

구분

무안 

양장리

유적

-

최소 약 12,800㎡

×

×

×

×

×

․ 

수리시설, 인공수로 

확인

<표 2> 백제 도시 유적 구성요소 

(※면적의 경우 미보고자료는 구글 지도, 해당 도면의 축척으로 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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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00

3) 신라 (<그림 3>)
신라 왕경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인 

6세기 중엽대의 고

구려와 백제의 도성과 비교했을 때

, 가장 큰 차이는 곽의 존재 여부라 

할 수 있다

. 고구려 장안성과 백제의 사비도성의 경우 외곽을 축조하여 

<그림 2> 백제 도시 유적 평면도(스케일 不同) ※관련 논문 및 보고서에서 재인용

1.풍납토성(신희권,「풍납토성의 도성 구조 연구」,

뺷풍납토성 500년 백제 왕도의 비전과 과제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73쪽), 2.몽촌토성(한성백제박물관,

뺷몽촌토성III뺸, 2019, 77쪽), 3.공산성(이현숙,「공산성의 조사경과와

앞으로의 과제」,

뺷百濟文化뺸59, 2018, 290쪽), 4.사비도성(한국고고학회, 앞의 글, 2011, 271쪽), 

5.왕궁리유적(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뺷왕궁리 발굴중간보고Ⅺ뺸, 2018, 14쪽), 6.세종 

나성리유적(한국고고환경연구소,

뺷연기 나성리유적뺸, 2015, 75쪽; 허수정,「백제 한성기 지상건물의 전개양상」,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17쪽 도면 합성), 7.무안 양장리유적(木浦大學校博物館,

뺷務安 良將里 遺蹟뺸, 

1997, 45쪽), 8.광주 산정동유적(湖南文化財硏究院,

뺷光州 山亭洞遺蹟뺸, 2008,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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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01

경계 및 방어체계를 갖췄지만 신라는 곽 대신 사방에 산성(동-명활산성, 

-서형산성과 부산성, 남-남산신성, 동북-북형산성)

을 축조하여 곽의 역할을 

하며

, 방위를 담당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국가별 도성의 입지 또

는 방어체계의 차이에 따라 곽이 조영되었으며

, 도성의 필수요소는 아

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문헌자료와 고고자료를 통해 신라 왕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먼저 문헌, 특히 뺷三國史記뺸에서는 시조묘,59 신

.60 남당(=政廳),61 우역과 관도,62 시장,63 창고64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왕경 내 지배계층과 관련된 왕궁

, 의례시설, 관청시설부터 

피지배층까지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시장까지 갖춰진 도시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왕성, 고분, 사찰, 산성, 도

로 등 왕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확인되어 당시 신라 왕경을 이루

는 도시 구성요소를 파악할 수 있다

.

발굴조사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살펴본 고대(고구려, 백제, 신라)

 도시의 

구성요소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 중앙 도시의 경우 내․외부를 경계 

지으며 방어시설의 역할을 하는 성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 그 내부에 

59

뺷三國史記뺸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南解次次雄 三年

, 春正月, 立始祖廟.

60

뺷三國史記뺸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炤知麻立干 九年

, 春二月, 置神宫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

61

뺷三國史記뺸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沾解尼師今 秋七月

, 作南堂於宫南 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

.

62

뺷三國史記뺸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炤知麻立干 三月

,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

63

뺷三國史記뺸卷第三 新羅本紀 第三 炤知麻立干 三月

, 龍見鄒羅井. 初開京師市, 以通四方之貨.

뺷三國史記뺸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智證麻立干 十年

, 春正月, 置京都東市.

64

뺷三國史記뺸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南解次次雄 秋七月

, 蝗, 民饑, 發倉廪救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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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02

왕과 관련된 중심건물을 비롯하여 의례시설

, 관청, 생산과 저장시설 등

이 확인되었다

. 또한 내부는 도로를 이용하여 도시 구획이 이루어졌는

, 이는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의 격자형 구획이 대표적이다. 

한편

, 성 내 백성들의 거주역 비중은 크지 않다가 앞서 언급한 사비도

성과 장안성 단계에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한편, 지방 도시의 경우 

도시 전체를 감싸는 성은 확인되지 않으며

, 도로가 아닌 구획 구를 이

용한 공간 구분이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림 3> 신라 왕경 도시 구획 및 경계(스케일 不同) ※관련 논문 및 보고서에서 재인용

1. 시가지 구획 모식도(황인호,「新羅 王京 整備의 基準線과 尺度」,

뺷韓日文化財論集II뺸, 

국립문화재연구소․나라문화재연구소, 2010, 32쪽), 2. 신라 왕경의 경계(이상준, 앞의 글, 201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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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03

III.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도시에서 외곽이 등장하는 곳은 백제 사비도

성과 고구려 장안성 뿐이다

. 각각의 도시 구조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백제 사비도성은 공간적으로 서․남․북쪽의 금강과 

동․북쪽의 외곽의 내부에 위치한다

. 도성 내․외부를 경계 짓고 방어

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외곽을 기준으로

, 내부에는 부소산성과 

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유적 및 쌍북리유적 일대

, 도시 구획의 흔적

을 보여주는 도로유구

, 정림사지 등 중요 사찰 등이 위치하고 있다. 유

적들의 배치 상태를 토대로 도성 내 전체에 격자형의 구획이 이루어졌

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 자료가 충분히 확보된 것은 아니어서 추후 

지속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경관 측면에서 본다면 배후에 비상시 

왕성인 부소산성을 두고 그 앞에 왕궁

-관청-사원-저자 등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5 고구려 장안성은 공간적으로 대동강가에 인접한 

만수대와 모란봉

, 그리고 평탄지 일대에 위치한다. 장안성은 4개(북성, 

내성

, 중성, 외성)

의 성으로 구성되는데

, 내성은 왕궁, 중성은 주요 관아 

시설과 귀족의 저택

, 외성은 일반 거주 지역으로 추정된다. 장안성 내

부에는 격자형 구획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 아직까지 

내성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 중성과 외성에서도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

되고 있어서 추후 자료의 확보에 따라 검토할 필요가 있다

.66

65

한국고고학회

, 앞의 글, 2011, 270쪽.

66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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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04

이처럼 사비도성과 장안성은 여러 공통점이 확인되고 있다

. 시기적

으로 

6세기라는 점,67 정치적으로 계획 하에 단행된 천도라는 점, 구조

적으로 지형을 반영하여 필요한 부분만 곽을 둘렀다는 점

,68 공간적으

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 내부에 격자형 구획을 배치하고 백성들의 거

주역이 충분히 마련되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 이처럼 2곳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조와 형태를 보인다는 사실은

, 이 시기에 공유되었던 

혹은 기준이 될 만한 도성의 모습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 이에 대해서 동아시아 고대 도성이라는 기준 아래 일본과 중

국을 함께 살펴보면

, 일본에서는 외곽은 확인되지 않는 반면, 중국에서

는 외곽이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고 있어서 한반도 고대 도시의 외곽과 

함께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이와 관련하여 중국 역대 도성의 양상과 변천을 검토하고 

7개의 유

형으로 구분한 연구69가 주목된다

. 관련 내용을 간략하게 발췌하면, 평

면 형태는 다르지만 외곽이 갖춰진 것은 

3․4․6․7유형이며, 그중에

서도 내성외곽의 구조를 보이는 것은 

3․6․7유형이다. 다만 7유형의 

경우 시기적으로 늦게 등장하고 있어서 제외하면

, 고대 도시 외곽과 관

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3유형과 6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 2개 유

형은 내성외곽이라는 점에서 구조상 유사한 편이지만 궁성의 위치와 

67

백제는 사비천도

(538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는 문헌기록과 명문석 

등을 통해 

552년 준공, 566년 내성 축조, 586년 천도, 589년 외성 축조, 593년 북성 축조 및 

완공

(박순발 2012, 76쪽에서 재인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68

백제의 외곽은 구릉을 연결하여 곽을 두르고

, 고구려의 외곽은 강가를 접하여 곽을 둘렀

.

69

박순발

, 앞의 글, 2014, 1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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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05

외곽 내부에 주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누구인지에 따른 차이가 관찰된

. 3유형은 외곽 내부에 상위층과 수공장인 등 직능집단이 위치하고, 

6유형은 백성들의 거주역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70 6유형은 조

조 업성(204년)

, 북위 평성(422년), 북위 낙양성(501년)이 있는데, 그중에

서도 도성 주민 대부분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외곽이 확인된 것은 

아직까지 낙양성 외곽이 유일하다고 보았다

.71

이러한 중국의 도성의 변화단계를 한반도 고대 도시들에 바로 적용

하는 것은 아직까지 쉬운 일은 아니다

. 구조 및 형태적으로 유사성이 

같은 경우도 적으며

, 조사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어서 전체 

모습을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처럼 당장 세부 유형을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 우선 큰 범주 아래 묶어서 살펴보는 시도

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유형 분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성과 곽을 

토대로

, ‘성 또는 곽을 1개소 갖춘 곳’, ‘성은 있고 곽은 없지만 곽의 역할

을 갖춘 곳

’, ‘성과 곽을 2중으로 갖춘 곳’으로 대별해볼 수 있다(표 3) 실

제로 고대 도시 중 상당 부분은 성 또는 곽을 

1개소 갖춘 것에 해당한

. 다만 국내성의 경우에 중요건물지를 둘러싼 궁성은 아직까지 확인

되지 않아 성 또는 곽을 

1개소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에 대

해서는 

‘3유형인 내성외곽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곽이 존재하지 않

는 풍납토성도 

3유형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세

트로 이해하고 

4유형으로 보기도 한다.72 다만 현재 상황만으로는 세

70

박순발

, 앞의 글, 2014, 14∼17쪽.

71

박순발

, 앞의 글, 2019, 237쪽.

72

박순발

, 앞의 글, 2014, 30∼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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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06

부 유형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선은 성 또는 곽을 

1개소 갖춘 것

으로 구분하였다

. 다음으로 성은 있고 곽은 없지만 곽의 역할을 갖춘 

곳은 백제 공산성과 신라 월성이 이에 해당한다

. 2곳 모두 도시 바깥의 

구릉에 산성을 설치하여 외곽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마

지막으로 내성과 외곽을 

2중으로 갖춘 것은 사비도성과 장안성이 해당

한다

. 2곳은 중국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6유형과는 달리 궁성의 위치, 

곽의 구조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규모가 확장되고 내부에 가로망 구획

과 같은 격자형 구획이 존재하고 있으며

, 백성들의 거주역이 포함된다

<그림 4> 중국 고대 도성(스케일 不同) ※관련 논문 및 보고서에서 재인용

1. 조위 업성(조윤재,「中國 古代 陪都制의 形成과 類型 -古代 韓國 都城의 復都制 검토를 위한 

예찰-」,

뺷중앙고고연구뺸20, 2016, 133쪽), 2. 북위 평성(조윤재, 앞의 글, 2016, 139쪽), 3. 북위 

낙양성(

钱国祥,「北魏洛阳外郭城的空间格局复原研究」,뺷华夏考古뺸第6基, 2019, 74쪽), 4. 남조 

건강성(좌:張學鋒,「南朝建康的都城空間與葬地」,

뺷中華文史論叢뺸總第一三五期, 2019, 85쪽, 

우:

钱国祥,「中国古代汉唐都城形制的演进」,뺷中原文物뺸第4期, 2016,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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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07

는 점을 보아 

6유형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구조는뺷吳越春

秋뺸에 기록된 “성이 왕을 지키고, 곽이 백성들 지킨다”는 내용과도 일치

하고 있다

.

유형 분류

해당 유적

성 또는 곽 1개소 

갖춘 곳

오녀산성, 하고성자성, 국내성, 환도산성, 청암리토성, 안학궁, 

대성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왕궁리유적

성은 있고 곽은 

없지만 곽의 역할을 

갖춘 곳

공산성, 월성

성과 곽을 2중으로 

갖춘 곳

사비도성, 장안성

<표 3> 고대 도시 유적 유형 분류(안) 

3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에

서 나타나는 외곽의 등장을 비롯한 여러 공통점들은 당시 시대상을 반

영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다만, 새로운 요소의 등장이 자체적

으로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 외부에서부터 유입된 것인지는 분명

하지 않아서 이에 대한 검토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 선행 연구73에서는 

자체적인 필요에 따라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 도성

의 도시화에 따라 기능의 확대되고 이에 따른 주민을 수용하기 위해 방

어시설로서 외곽이 등장한 것으로 본 것이다

. 또한 외곽이 등장한 6세

기대 국제 정세를 보면

, 백제와 교류가 빈번하였던 남조의 건강성에서

는 외곽이 확인되지 않아서 남조와 연관성을 상정하기 어려우며

, 북조 

역시 교류 기사74가 단 한건뿐이라는 점 때문에 북위 낙양성의 외곽과 

73

박순발

, 앞의 글, 2019.

74

5세기 비유왕대부터 6세기 성왕대(천도가 이루어진 538년 이전)까지의 남조와 북조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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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08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75 다만 도성의 구조에서 보이

는 유사성에 주목한다면

, 교류 기사의 숫자만으로는 연관성 여부를 상

정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된다

한편

, 최근 남조 건강성의 외곽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는

, 주 논거는 문헌기록에서 건강성 외부에 설치된 문 관련 내용과 조

사를 통해 확인된 묘장의 위치 등이다

.76 그러나 고고자료로써 외곽의 

흔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아서

, 여전히 외곽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

의는 지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

이와 관련해서 함께 검토할 사항은 고구려 장안성의 등장배경에 대

한 것이다

. 유사한 시기에 등장한 유사한 시설물(외곽), 그리고 그 내부 

구조의 유사성(격자형 구획)

, 도시 규모의 확대 등에 주목한다면, 2곳에

서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의 등장 동기가 같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당시 고구려의 국제 정세를 먼저 살펴보면, 백제에 비해 북조와

의 교류 기사77가 상당히 많이 확인되고 있어서

, 북조의 영향력도 상당

했음을 알 수 있다

. 즉, 고구려 장안성의 경우에는 북조의 영향을 받았

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 한편 외곽 내부에 형성된 격자형 구

획의 조성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는데

, 북위 낙양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

류 기사를 살펴보면

, 남조는 11건, 북조는 1건으로 확인된다.

75

박순발 

2019, 앞의 글, 237∼238쪽.

76

張學鋒

,「南朝建康的都城空間與葬地」,뺷中華文史論叢뺸總第一三五期, 2019.

77

5세기 장수왕대부터 6세기 평원왕대(외성이 축조된 589년 이전)까지의 남조와 북조 교
류 기사를 살펴보면

, 남조는 30건, 북조는 70건, 수는 9건으로 확인된다. 물론 장수왕대

에 북조와의 교류 기사가 

43건으로 집중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한다고 해도 상당한 수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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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09

로 보는 견해78와 수의 대흥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79가 있

. 이처럼 공통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그 등장에 대해서 백제는 자체 

발생

, 고구려는 북조의 영향이라는 이견이 존재하다면, 해당 시기 고구

려와 백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 먼저 문헌자

료인 뺷삼국사기뺸에서는 여제동맹이 체결되는 643년 이전에 지속적인 
전쟁 내용만이 수록되어 있으며

, 교류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

러나 사비기의 고고자료(토기, 기와, 건물지, 고분 등)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다수 나타나고 있어서 영향 관계에 대한 추론이 가능하다

.80 즉, 6세기

대에 전쟁기록으로 점철된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속에서도 전쟁과 별

도로 문화 교류가 계속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대외 관계 내용과 함께 종합해보면

, 문헌상 백제에서 고구려와 북조

의 교류 관련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 고구려는 북조와의 교류 관련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 다만 해당시기 백제의 고고자료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다수 확인되는 점을 보아 문헌자료만으로 교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물론 외곽의 등장 시점이 고구려보

다 백제가 빠르다는 사실 때문에

, 전파의 방향성이라는 측면에서 외곽

이 등장이 고구려의 영향에 따른 등장이라고는 보기 쉽지 않다

. 다만 

천도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과 사

78

김희선

,「6∼7세기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 長安城 -도성의 가로구획방식을 중심으로

-」,뺷한국고대사연구뺸43, 2006, 62∼63쪽.

79

기경량

, 앞의 글, 2019b, 117쪽.

80

土田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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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뺸

65, 호남고고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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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10

비기에 고구려적 요소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석

하면

, 외곽의 개념을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북조에서 고

구려로

, 고구려 또는 북조에서 백제로의 영향 관계를 추정해볼 수도 있

. 즉, 백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에서 새롭게 등장한 외곽의 축

조는 도성의 도시화라는 변화 속에서 백성들을 수용하기 위한 필요성

이 대두됨에 따라

, 외부(북조)의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지형 및 상황

에 맞게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IV. 맺음말

고대 도시의 구조와 경관을 복원하는 일은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본고에서는 고고자료와 문헌기록

을 토대로 고대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그 

결과 중앙과 지방 도시 대부분에서 중심건물(남당, 거관시설 등)

, 의례시

설(종묘, 사직 등)

, 공방시설, 창고, 도로 등이 갖추어졌음을 파악할 수 있

었다

. 다만 중앙 도시인 도성의 경우 여러 구성요소를 감싸는 성벽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어서

, 별도의 성벽 없이 구획 구를 이용한 공간을 

구분하는 지방 도시와 차이점이 파악된다

. 또한 그 규모나 규격성에서

도 중앙과 지방은 큰 차이가 확인된다

.

다음으로 고대 도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외곽의 등장에 대한 검토

를 진행하였다

. 현재까지 고대 도시유적에서 외곽이 등장하는 곳은 백

제 사비도성과 고구려 장안성 뿐이다

. 이 2곳은 여러 공통점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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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 도시 외곽의 등장과 전개

311

, 6세기에 진행된 계획 천도라는 점과 규모가 확대된 도시에 곽을 두

르고 그 내부에 격자형 구획과 백성들의 거주역을 마련하였다는 점 등

이다

. 이처럼 국가가 다른 2곳에서 유사한 양상이 관찰된다는 점은, 이 

시기에 공유되었던 도성의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 다

만 그 등장배경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하는데

, 사비도성의 경우에는 

자체적인 필요에 따라 발생하였다고 보는 반면

, 장안성의 경우에는 북

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 이에 대해서 문헌자료와 당시 

대외정세와 도성 구조의 유사성을 살펴본 결과

, 북조와 고구려, 고구려

와 백제의 관계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 물론 외곽

의 축조 시점이 고구려보다 백제가 빠르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

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천도는 사전에 충분한 계획 아래 진행된다는 점과 사비기에 고

구려 요소가 다수 확인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 외곽의 축조

는 도성의 도시화라는 변화 속에서 백성들을 수용하기 위한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 외부(북조)의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지형 및 상황에 

맞게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즉, 외곽은 방어기능뿐만

이 아니라 도시 경계까지 설정하는 당시 도시 범위의 인식이 반영된 것

으로 이해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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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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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14

조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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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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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abstract
The appearance and development of the city wall of an ancient city 
on the Korean Peninsula
Kim, Hwan-Hee Buyeo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The restoration of ancient cities' structures and landscapes is the most important 

part in understanding what it was like in ancient times. This study identified a range of 

elements making up an ancient city based on archeological materials and literature re-

cords and found that most of central and local cities were equipped with central build-

ings, ceremonial facilities, workshop facilities, warehouses, and roads. Castle towns in-

cluded town walls, being differentiated from local towns in which spaces were dis-

tinguished along gutters with no town walls. There were also big differences in size and 

standard between central and local cities. 

The study then reviewed city wall that made a new appearance in ancient cities. 

There are only two relics of ancient cities that built city wall: Sabi Castle Town of 

Baekje and Jangan Castle of Goguryeo. These two ancient cities share a lot of common 

features including that they were outcomes of planned capital transfer in the sixth cen-

tury and that an outer boundary was built around expanded cities with grid-type sec-

tions and dwelling quarters for people within the boundary. The fact that similar pat-

terns were observed at two different places of different states suggests that certain as-

pects of a castle town were shared during the days.

Researchers, however, have different ideas of their emergence factors. While the Sabi 

Castle Town is estimated to have happened according to its own need, Jangan Castle is 

estimat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Northern Dynasties. The study thus looked 

into their similarities in foreign affairs and castle town structures those days and found 

that they were under the huge influence of relations between Northern Dynasties and 

Goguryeo and between Goguryeo and Baekje. Since Baekje built city wall earlier than 

Goguryeo, there is no saying that it was influenced by Goguryeo's city wall. The inves-

tigator interpreted actively a couple of points including that a transfer of capital was 

done based on enough planning and that a lot of Goguryeo elements were found in 

Baekje during the Sabi period and found that the Baekje built its city wall according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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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호

316

the rising need to accommodate its growing population amidst the urbanization of its 

castle town by accepting the concept of city wall according to its own topography and 

situations under the influence of Northern Dynasties. 

Keyword ancient, city, city wall, appearance, development

논문 투고일 : 2020.09.20  심사 완료일 : 2020.10.25  게재 확정일 : 2020.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