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김종수
1
*
I. 머리말
II. 황간(黃澗)의 한천서원(寒泉書院) 왕래와 참
청(參聽)
III. 송환기 사후의 추모사업 전개
1. 강설연록과 유고집 간행
2. ‘노원(老院)’에의 추배(追配) 노력
IV. 맺음말
국문초록
본 논문은 19세기 초반을 전후로 한 무렵에 경상우도에서 거주했던 성담 송환기
학단의 활동을 통해서 노론계 후예들이 남긴 일련의 행적들을 발굴하기 위한 목적
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 당시 노론계의 중진으로 우암 송시열의 5대손이었던
성담 송환기와 그의 문하생인 함인재 정국채 사이의 생전․사후 두 단계에서 영위
된 강학 활동과 추모사업의 주요 양상들을 집중적으로 규명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
서 정국채의 문집인 뺷함인재유고뺸와 동문인 사농와 하익범의 뺷유두류록뺸, 그리고
석연 이우세의 뺷노강서원추배시일기뺸 등의 문헌자료들을 두루 원용하는 연구 방식
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우도권에 소속된 송환기의 문하생들의 경우, 스승 생전에는 영동의 황
간에 위치한 한천서원을 주기적으로 심방하여 강연을 참청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흡사 출가승들의 구도행을 방불케 했던 이들 구성원들의 사자전승 행위란 스승에
*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원 객원연구원
, jilisan8463@hanmail.net
8
대한 무한한 존경심에 기초한 강학 활동이었으며, 문하생들이 학문하는 도정에 큰
자양분을 제공해 주게 된다. 이와 동시에 문하생들은 지리산 유람과 향음주례의 거
행 등과 같은 활동들을 병행함으로써, 동문 상호 간의 단합을 고취했던 정황도 주목
되었다. 송환기 사후에 펼쳐진 일련의 추모․선양사업은 바로 이 같은 유대감의 토
대 위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나, 다소간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1807년에 이르러 송환기가 타계하자 우도권의 문하생 일원들은 스
승을 기리기 위한 일련의 추모․선양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대체로 그 주된 방향은
송환기가 생전에 강연했던 내용들을 뺷강설연록뺸이라는 제하의 책자로 정리하는 일
과 유고집의 체제와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원본을 대상으로 한 등사 작업의 진행, 그
리고 성주의 노강서원(老院)에 스승을 추배하기 위한 노력 등과 같은 몇몇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특히 우도권의 문하생들은 송환기의 영정과 위패를 서원에 봉안하는
추배 작업을 진척시키는 과정에서 좌도의 동문들과 긴밀한 협조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소개한 추모․선양사업의 양상들은 전통시대에서 전국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인물의 생전․사후에 전개된 강학 활동 및 추숭 노력과 관련하
여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제어
정국채, 함인재유고, 성담 송환기, 한천서원, 유고집, 추모사업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9
I. 머리말
전통적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은 16세기에 이르러 처사(處士)로
자처했던 지성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출현한 이후로, 그
가 수립한 학문세계인 남명학을 계승하려는 학파의 세력이 무성한 세
를 유지한 가운데
, 퇴계학(退溪學)의 자장이 동시에 공존해 온 특징을 보
여주었다
. 물론 이 같은 학적 지형도와 병행하여 호남(湖南)에 연고를
둔 노사(蘆沙)․간재학파(艮齋學派)의 후예들도 순차적으로 등장하였으
나
, 기존 남명․퇴계학파의 권위를 대체하는 흐름으로까지는 치닫지
는 않았다
. 대신에 이처럼 다양한 학파의 구성원들이 혼재했던 경상우
도 지성계의 양상이란
, 좌도(左道)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학적 다양성이
용인되었던 정황의 일단을 반영해 주기도 한다
.
그런 점에서
19세기를 전후로 한 무렵에 결집되었던 약칭 성담(性潭)
학단(學團)의 출현 또한 경상우도 지역의 비교적 자유로운 학적 개성을
선보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 이른바 성담 학단이란 노론계(老論係)의
원류이자 핵심적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5대손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문하(門下)에 출입했던 인적 네트
워크를 가리키는 조어(造語)에 해당한다
. 다만 이들 성담 학단의 경우,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尤庵學)을 스승인 송환기를 매개체로 삼아서 전
승하였기에
, 성담학파라는 표현 대신에 성담 학단으로 지칭하는 편이
타당하다는 판단을 반영한 어휘임을 부기해 둔다
.
한편 성담학단의 경우 노론 계열이라는 당파적․이념적 노선 위에
제26호
10
서 학단이 구성되고 영위되었기에
, 노론과 남인(南人) 두 계열 간에 겨루
었던 향권(鄕權)의 향방 문제와 같은 정치․사회적 맥락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 기실 이러한 정황들은 금번 논의에서 주로 참조하게
될 텍스트로 송환기의 고제(高弟)
중에 한 사람인 함인재(含忍齋) 정국채
(鄭國采, 1757∼1813)
가 남긴 문집인 뺷함인재유고(含忍齋遺稿)뺸를 통해서도
일정 부문 확인되고 있다
. 이 사안은 송환기가 타계한 뒤에 추진된 일
련의 추모 사업을 소개하는 지면을 빌려서 간략하게 논급할 계획이다
.
그리하여 금번 논의의 장(場)을 통해서는 성담학단의 구심점인 송환
기의 생(生)․사(死)
두 시점을 변곡점으로 삼아서, 그가 생존했던 당시
와 타계한 이후라는 두 시기에서 영위되었던 경상우도에서의 노론계
학단의 동향을 면밀하게 규명해 내고자 한다
. 성담학단 구성원들의 경
우 송환기 생전에는 그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수업(受業)
활동을 진행함
과 동시에
, 지역 내부에서는 결속과 단합을 도모하곤 했던 기록들을 남
겼다
. 또한 스승 사후에는 간곡한 심은(心恩)에서 비롯된 일련의 추모
사업들을 진행했던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송환기의 생
전․사후 두 국면에 걸쳐서 전개된 성담 학단의 자취를 수습하여 분석
함으로써
, 19세기를 전후로 한 무렵에 경상우도 권역에서 영위되었던
노론계 구성원들의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활동 양상들을 어느 정도 복
원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 나아가 이들이 남긴 일련의 자취
를 통해서 우도권에서 우암학(尤菴學)이 유입․확장되는 의미 있는 단서
를 아울러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된다
.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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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황간(黃澗)의 한천서원(寒泉書院) 왕래와 참청(參聽)
본디 한천정사(寒泉精舍)는 남송(南宋)의 주자(朱子, 1130∼1200)(주희)가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1137∼1181)과 함께 송대 성리학(性理學)의 종합
입문서 격인 뺷근사록(近思錄)뺸을 편집했던 유수의 강학 공간이었다.1 이
에 송시열은 주자가 모친인 축부인(祝夫人)이 타계한 이후에 무덤가에
지었던 여막(廬幕)이기도 했던 이 건물의 명칭을 그대로 차용한 정사(精
舍
)
경영(經營)을 시도함으로써, 평소 주자 절대주의자였던 자신의 학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 일찍이 송시열은 그가 32세
가 되던
1638년(인조 16)에 이르러 여의치 못한 시국의 험로를 맞이한 끝
에 치사(致仕)에 뒤이은 은거(隱居)에의 의지를 피력한 후에
,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천동에 해당하는
“냉천리(冷川里)의 산이 드높고 물이
깊음을 사랑한 나머지
, 마침내 이곳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2
차후 한천정사는
1717년(숙종 43)에 지방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 송
시열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書院)으로 탈태하여 위패를 봉안하
게 된다
. 또한 그로부터 9년이 흐른 뒤인 1726년(영조 2)에 이르러 ‘한천
(寒泉)’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기에 이른다. 우암의 후손인 송환기의 뺷성
1
宋時烈
, 뺷宋子大全 II뺸 卷51(한국문지총간 109), 「書」, <答金延之(己未三月三日)>, 민족문화
추진위원회
, 1986, 534쪽, “乙未, 與東萊編近思錄于寒泉精舍.” 이 서신은 송시열이 73세가
되던 해인
1679년(숙종 5)에 작성된 것이다.
2
宋時烈
, 뺷宋子大全․附錄 Ⅷ뺸 卷2(한국문집총간 115), 「年譜(一)」, <崇禎十一年戊寅(先生三十二
歲
)>, 203쪽, “先生才經大亂, 痛念國家羞辱, 有謝世長往之意, 愛黃澗冷泉里山高水深, 遂寓居焉.”
제26호
12
담집(性潭集)뺸에서, “7월에 종형(宗兄)들과 더불어 황간(黃澗)의 한천서원
(寒泉書院)
을 왕배(往拜)하고
, 인하여 증조고(曾祖考)의 묘소를 성묘하였다.”
고 운운한 대목은
1768년(영조 44)에 이르기까지 건실하게 운영되었던
이 서원의 현황과 함께
, 문중의 결집력 정도도 잘 확인시켜 준다.3 또한
1800년(정조 24)에는 성담의 손자로 사재봉사(司宰奉事)를 역임하던 송흠
천(宋欽天, 1764~?)을
“도내(道內) 수령(守令)[곧 황간 현감)]으로 차송(差送)하
게
” 되면서,4 송환기는 익년에 “손자 흠천의 임소(任所)에 머무르면서”
심신을 가다듬곤 했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5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송환기는 한천서원에 모인 제생(諸生)들을 대상으로 하여 일정한 주기
별로 강회(講會)를 개최하곤 했음이 주목된다
. 이를테면 스승인 송환기
가 황간(黃溪)에 내려올 것이라는 전문을 접한 후에
, 지난 “가을밤 달빛
아래 한천(寒泉)에서 강토(講討)하는 즐거움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쁨이)
만만치가 않다
.”고 술회해 보인 문하생의 토로는 송환기가 개최한 강회
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6 그리하여 1798년(정조 22)에 이
르러 경상우도의 하동(河東)에 연고를 둔 정국채가
“책 상자를 메고 성담
3
宋煥箕
, 뺷性潭集 II뺸 卷31(한국문집총간 245), 「附錄․年譜」, <戊子(先生四十一歲)>, 민족문
화추진위원회
, 2001, 176쪽, “七月與宗兄, 往拜黃澗之寒泉書院, 仍省曾祖考墓, 還到沃川, 謁滄
洲書院
.”
4
뺷純祖實錄뺸 卷
1, 순조 즉위년 8월 15일(乙丑), “大王大妃特敎, 以司宰奉事宋飮天, 道內守令差
送
, 欽天, 贊成煥箕孫也.” 앞의 ‘송음천’은 송흠천의 오자다.
5
宋煥箕
, 뺷性潭集 I뺸 卷4(한국문집총간 244), 「書啓」, <兼春秋趙慶遠傳宣敦諭後書啓(辛酉八月
十一日
)>, 민족문화추진위원회, 2001, 83쪽, “臣方住於臣孫欽天之黃澗任所, 纔經毒痁, 癃喘益
懔綴
, 㱡㱡欲盡.”
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영일정씨 지주사공파 문중 소장본), 「書」, <與申子緯尙經>,
1945, 44쪽, “函丈, 更臨黃溪云. 秋月, 寒泉講討之樂, 想不淺淺.” 서명에서 ‘단’자 표시는 이 책
이
1945년에 간행된 필사본 문집임을 나타내며, 이 표기가 없는 것은 4년 후에 발간된 목
판본 뺷함인재유고뺸임을 의미한다
.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13
송 선생의 문하(門)에 집치(執雉)의 예(禮)를 표하고 학업을 청했던
” 일
도
,7 이상에서 소개한 건물의 이면사와 함께, 송시열의 유지(遺志)를 한
천서원에서 계승하고자 했었던 송환기의 애틋한 노력과 맞물려 있는
생애의 계기적 사건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
또한 기존 한천정사 체제에서 서원으로 면모 일신한 이 제향(祭享)
공간
은 송시열에서 연원하여
5, 7대손인 송환기․흠천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
를 향유하는 동안에
, 영남권의 신진 후학들을 노론 계열의 학문적 전통으
로 인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는 접경(接境)
지역의 강학 공간으로 거
듭나기에 이른다
. 이제 그 대략적인 실상을 이른바 “단(丹)․진(晋) 사우(士
友
)
들
”8, 즉 지금의 서부경남에 해당하는 단성(丹成)․진주(晉州) 지역의 문
하생들이 남긴 행적을 추적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
.
그 구체적인 방식으로는 다소 뒤늦은 나이인
42세에 송환기의 문하
에 접어든 이래로
, “선생이 고제(高弟)로 허여(許)하였고, 동숙(同塾)(동문)
들도 또한 직량(直諒)한 벗으로 대하면서 오당(吾黨)이 기대(期待)하는 바
의 사람
”9이라는 평을 받았던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뺷함인재유고뺸를
주된 텍스트로 활용하기로 한다
. 이와 동시에 정국채와 필적할 만한 위
상을 획득하였던 사농와(士農窩)
하익범(河益範, 1767∼1815)10의 뺷유두류
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 <行錄(家狀)>, 104쪽, “戊午年, 負笈于性潭宋先生之門,
執雉請業
.”
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月前, 與丹晉士友, 行鄕飮禮, 而多有所未
解本意處
.”
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 <行錄>, 105쪽, “先生, 許之以高弟, 同塾, 亦待之以直諒之
友
, 吾黨所以期待者.”
10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己未二月)>, 29쪽, “國采回路得輪疾, 初不大
段
, 逐日登程, 至居昌界, 不省人事, 幾至無幸, 幸得僅甦到家.” 이 편지는 정국채가 43세 때인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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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遊頭流錄)뺸과 더불어, 석연(石淵) 이우세(李禹世, 1751∼1830)11가 지은 뺷노
강서원성담송선생추배일기(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뺸 등과 같은 문헌
자료들도 아울러 참고하고자 한다
. 특히 정국채와 하익범 두 사람은 송
환기 외에도
, 노론계 전래의 예학(禮學)의 계보를 집대성하여 뺷가례증해
(家禮增解)
뺸를 저술한 김천(金泉) 출신의 예학자인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
1727∼1805)
를 종유(從遊)함으로써
, 공히 독자적인 예학세계를 개척한 공
통점이 발견된다
.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단(丹)․진(晋) 사우(士友)들”로 지칭한 이들
경상우도 권역의 송환기 문하생들이 머나먼 호서(湖西)
지방에 소재한
한천서원을 왕래했던 자취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 대체로 우도권에 거
주했던 이들 성담학단의 경우
, 단성․진주→ 거창(居昌)12 → 김천(金
泉
)
13 →
옥천(沃川)14 → 영동(永同)15의 황간길(黃磵路)16로 이어지는 스승
의 우거지(寓居地)를 향한 등정
, 곧 이른바 ‘담상행(潭上行)’17 코스를 즐겨
1797년에 쓴 것임.
11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한국국학진흥원 소장본),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1936, 16쪽, “告由文則余所撰.” 쪽수 표시는 ‘유교넷’(ht p://www.ugyo.net/yk/i ki)에서 제
공한 판본의 상단의 것을 반영한 것임
. 한편 <노강서원성담송선생추배일기>는 한국국
학진흥원 연구부 편
, 뺷국역 조선시대서원일기뺸, 한국국학진흥원, 2007, 385∼400쪽에 송
희준의 국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
12
각주
10 참조.
13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與河叙中趙士興柳希夫之賢, 作潭上行, 到直指寺(丁卯)>,
18쪽. 이 시는 송환기가 타계한 해인 1807년에 지은 것으로, 일행이 김천의 직지사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뒤에 창작된 작품이다
. 하서중(河叙中)의 ‘서중’은 전술한 하익범의 자
(字)며, ‘사흥’은 조복(趙濮)의 자인 듯하다.
1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沃川藿巖別士興>, 17∼18쪽.
15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永同墨筏店聯句>, 18∼19쪽.
1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黃磵路送士興與希夫之冷泉>, 18쪽.
17
각주
10 참조.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15
이용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주로 뺷함인재유고뺸에 수록된 시작(詩
作
)
들을 통해서 확인되는 진주․영동 간의 왕환 노정에서 창작된 시들
은 일종의 구도시(求道詩)와도 같은 묘한 특성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
또한
“옥천(沃郡)의 산천이 가장 신령스럽다.”고 읊조린 바와 같이,18 여
행과 관련된 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 특히 “동행(同行)
한 동지(同志)들은 또 업(業)도 같다
.”는 시구에서 풍겨나듯 일견 구도시
를 연상케 해주는 독특한 뉘앙스란
,19 「조사흥에 차운하다.(次趙士興
韻
)」
는 시제(詩題)를 취한 아래의 작품에서 그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
A
그대에게 금일의 걸음이 향하는 곳을 묻노니
본원(本源)의 흐름을 찾기 위함이었지
천천히 걸으니 비로소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지나
발걸음 내디딤에 어찌 정로(正路)를 따름이 어려우리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건만 아는 이 드물고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 있으니, 아! 아름다워라
그대가 스스로 면려하려는 시(詩) 속의 의중을 간취했으니
가히 종신토록 내가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알겠노라!
20
1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九龍村>, 16쪽, “沃郡山川最有靈, 逶迤遠勢九龍成 (...中
略
...) 人道先生此地生.”
1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沃川藿巖別士興>, 17∼18쪽, “同行同志又同業 (...中
略
...) 臨風回首碧山中.”
20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次趙士興韻>, 17쪽, “問子今行向底處, 爲探潭上本源流, 着踉
始覺前程闊
, 進步何難正路由, 道不遠人知者少, 人能弘道猗歟休, 看君自勉詩中意, 可認終身未己憂.”
제26호
16
위의 시는 일면 출가한 사문(沙門)들이 발휘하는 당찬 구도 의지를 방
불케 해주는 감이 없지 않다
. 다만 이들 성담 학단의 경우 사문의 수행
지침인 정진(精進)․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과 같은 불교적인 방식을 취하
지 않는 대신에
,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설파한 뺷중용
(中庸)
뺸의 경문(經文)과
21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가 사람을 넓
히는 것은 아니다
.”고 설파한 공자(孔子)의 언명을 위학(爲學)의 철칙으로
받든 차이가 있을 뿐이다
.22 또한 이처럼 철저히 인간과 연계된 유학적
도의 본원으로 다가서기 위한 도정에서 송시열에서 연원한
“화양(華陽)
의 도통(統)을 계승하여
, 담상(潭上)에서 도를 강론(講)했던” 송환기를 직
접 대면해서 강설을 참청(參聽)하는 일이란 대단히 중요한 수학(受學)
방
식이었다
.23 때문에 경상우도에 주소를 둔 성담학단의 구성원들의 경
우
, 온갖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스승을 찾아서 머나먼 구도의 길
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
또한 그 이면에는 송환기의 실물 모습을 의미하는
“진상(眞像)이 마치
그림(圖畫)
밖을 논하는 것만 같다.”고 예찬하며 경배(敬拜)했던 스승을
향한 지극한 존경심이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
다
.24 영동에 소재한 심천(深川)에서 이들 일행이 번갈아 가면 읊조린 연
21
朱熹
, 뺷中庸集註뺸, 「第13章」,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22
朱熹
, 뺷論語集註뺸, 「第15 衛靈公」, “人能弘道, 非道弘人.”
23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含忍齋遺稿序」, 1쪽, “性潭宋文敬先生, 承華陽之統, 講道于潭上時,
則有若含忍齋鄭公
.” 이 서문은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 1870∼1952)가 1945년 10월에 지
었다
.(같은 책, 3쪽): “乙酉十月甲午, 安東權載奎序.”
2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黃磵路送士興與希夫之冷泉>, 18쪽, “臨岐分袂送寒泉, 敬
拜先生子有緣
, 眞像若論圖畫外.”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17
구(聯句)
중에서, “한담(寒潭)의 가을 달빛이 내 마음을 환히 비추누나.”라
거나
, 혹은 “천 리를 헤엄치던 고기가 학해(學海)를 보았노라!”는 등의 시
구들은 스승인 송환기의 학덕에 대한 이들 문하생들의 추앙심의 정도
가 비유적인 수사어를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
.25 때문에 이들 경상우도
지역의 문하생들은 머나먼 길을 멀다하지 않고
‘학해(學海)’를 체험하기
위한 기꺼운 여정에 주기적으로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상과 같은 배경 하에서 성담 학단의 구성원들이 보여준 한천서원
왕래에의 열정이란 실로 지극한 수준이었다
. 상당한 기간 동안에 걸쳐
서 고향을 등진 상태로 지내야만 했던 이들의 경우
, 길 가던 노중(路中)
에서 문득 떠오르는 집 생각에 연구(聯句)
시로써 향수를 달래면서 나그
네 처지에 직면한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26 특히 정국채의 경우 몸에
두르고 있던 전대(纏帶)
자루(橐)를 통째로 분실하여 망연자실했던 적도
있었다
.27 그 뿐만이 아니었다. 1799년 2월에 개최된 황간 한천서원에
서의 강회를 마치고 집으로 되돌아오던 도중에 돌림병인
“윤질(輪疾)에
걸린
” 끝에, 생사의 중대 기로에 직면한 아찔했던 기억을 정국채는 스
승인 송환기에게 아래처럼 토로해 보이기도 했다
.
B
국채는 돌아오던 길에 윤질(輪疾)에 걸렸었는데, 처음에는
25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深淺路中聯句>, 19쪽, “寒潭秋月照吾心(仲), 擬立師門深
白雪
(觀) (...中略...) 千里游魚觀學海(仲).” ‘관’자는 정국채의 자(字)인 사관(士觀)의 줄임말
이며
, ‘중’은 하익범의 자인 서중(叙仲)을 나타낸 것이다.
2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路中思家聯句>, 19∼20쪽 참조.
2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鄭上舍燖藎>, 48쪽, “國采載橐初歸, 自謂似有所得, 歸未
幾日
, 不覺橐漏盡失, 歎如之何.”
제26호
18
(병세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하루하루를 쫓아 길을 나서 거창의
경계(居昌界)에 이르자,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무행(無幸) 지경에 처해졌
었답니다. 다행스럽게도 겨우 소생하여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28
정국채는 자택에 도착한 이후로 다소 차도는 있었지만
, 여전히 정신
이
“혼혼(昏昏)한 상태여서, 마치 연기와 안개 속에 앉아서 건너는 듯한”
후속 증세로 이어졌다는 추가적인 술회를 덧붙여 두었다
.29 또한 정국
채는
“길 한가운데서 전염병에 걸린 끝에, 땅에 기댄 혼(魂)이 거의 (하늘
로
)
오를 뻔하다가” 천우신조 격으로 근근이 생환하였으나, “아직도 여
분의 병증(餘憊)이 남아있는
” 고통을 송환기의 장손인 송흠천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서도 재차 토로해 보이도 했다
.30 당시에 함께 동행했던 이
들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으나
, 적기한 두세 사례들은 머나
먼 한천서원을 오가며 겪었던 다양한 고충의 양상들을 짐작하게 해준
다
. 그러나 이러한 신고(辛苦)로 인해 “담상(潭上) 본원(本源)의 흐름을 탐
구하기 위한
” 강우(江右) 문하생들의 심방(尋訪) 의지를 감쇄시킬 정도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
그래서인지 정국채 일행이 보여준 면학에의 열정과 스승인 송환기
에 대한 기대나 존경심의 정도란 매우 각별한 수준이었음이 누차 확인
2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己未二月)>, 29쪽, “國采回路, 得輪疾, 初不大
段
, 逐日登程, 至居昌界, 不省人事, 幾至無幸, 幸得僅甦到家.”
2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己未二月)>, 29쪽, “今始□洗然, 而昏昏之狀,
如坐煙霧中度了
.”
30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答宋聖希欽天>, 45쪽, “弟中路, 亦得輪疾, 陸憑之魂, 幾乎
招矣
, 幸荷遠庇, 僅僅生還, 尙有餘憊.”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19
된다
. 당시 황간의 한천서원에서 개최되는 강회 일정에 맞춰 전국의
“도처(到處)에서 두서너 군(君)들이 길게 (연이어) 뒤따르는” 식의 진풍경
이 연출되곤 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31 이처럼 전국 각지의 문하생
들이 황간으로 집결했던 이유는 송시열이 제시한
“화양(華陽)의 도통(統)
을 계승하여
, 담상(潭上)에서 도를 강론(講)했던” 송환기의 강론을 청강
하기 위한 목적 때문임은 앞에서 논급한 바와 같다
. 그 즈음에 정국채
는 송환기가 주도하는 한천서원에서의 강회에 대한 기대감과 벅찬 즐
거움에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피력해 두었음이 자못 눈길을 끌게 한다
.
C
함장(函丈)(스승)께서 다시 황간(黃溪)에 임하신다고들 운운하더군
요. (지난) 가을 밤 달빛 아래 한천(寒泉)에서 강론(講)․토론(討)하던
즐거움이란 상상만 해도 만만치 않건만, 질병의 고통에 가로 막힌
신세가 되어서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여) 형과 함께 저 안
을 주선(周旋)할 수 없게 된 탓에, 서쪽 구름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다만 스스로 슬퍼하며 한스러워 할 따름입니다.
32
윗글 속에는 스승인 송환기가 주기적으로 개최했던 한천서원에서의
강회에 참석하지 못한 문하생의 안타까운 심경과 더불어
, 앞서 실시된
모임에서 느꼈던
“강토(講討)하는 즐거움”에 대한 소회가 아울러 잘 드
러나 있다
. 정국채가 1797년(정조 21) 10월에 이의조에게 올린 서신을
31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路中思家聯句>, 19쪽, “時眼白日又步月, 到處長隨二三君.”
32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申子緯尙經>, 44쪽, “函丈, 更臨黃溪云. 秋月, 寒泉講討
之樂
, 想不淺淺, 而疾苦所沮, 不得與兄周旋於這裡, 瞻仰西雲, 只自愴恨而已.”
제26호
20
통해서
, “담상(潭上)의 장석(丈席)께서 다시 황계(黃溪)에 임하신다면, 그
혹시 여유 있는 모임이 될까요
?”라고 질의한 뒤에,33 그 동안에 송환기
를 만나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강도(講道)의 여론(餘論)을 참청(參聽)”
하지 못한 아쉬움을 재차 토로해 보였던 장면 또한 상기 인용문과 동일
한 맥락 하에 놓여 있다
.34 이 같은 정황들은 정국채와 그 일행들이 공
자(孔子)가 설파한
‘문도(聞道)’35에의 열망이 지극한 수준이었음을 확인
시켜 준다
.
다만
, 아쉽게도 뺷강회일지(講會日誌)뺸와 같은 문헌 자료가 발견되지 않
는 까닭에
, 당시에 개최된 강회 일정별에 따라 취급되었던 강설 주제를
둘러싼 정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 그 대신에 정국채의 문집인 뺷함인
재유고뺸 에는 송환기가 주자학적(朱子學的) 우주 본체론인 태극론(太極論)
을 강론했던 정황과 더불어
, 또한 이 주제를 참청한 데 따른 문하생의
벅찬 감회를 아래처럼 술회해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D
또 하물며 함연(函筵)(함장)께서 남간(南澗)(황간)에서 태극(太極)을
논하신 강론을 참여하여 들었으니, 이 대학자(大學者)는 바로 우리
무리들의 영원히 변치 않는 승사(勝事)이십니다. 당일의 즐거움과
(스승과) 헤어진 뒤의 소회를 어찌 가히 편지글로써 다 설명할 수 있
33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宜朝(丁巳十月)>, 37쪽, “潭上丈席, 更臨黃
溪
, 則其或有從頌之會耶.” 운위된 ‘종송지회(從頌之會)’에서 송(頌) 자는 용(容) 자의 고자(古
字
)로, ‘종송지회’란 짧지 않은 여유로운 만남을 뜻한다.
3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宜朝(丁巳十月)>, 37쪽, “恨不得陪丈席於其
間
, 參聽講道之餘論也.”
35
朱熹
, 뺷論語集註뺸, 「第4 里仁」,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21
겠습니까?
36
연상의 동문인 서명락(徐命洛)에게 전한 편지글을 빌려서 피력된 윗글
은
“강도(講道)의 여론(餘論)” 운운한 강연 주제에 관한 정보의 일단이 수
록되어 있다
. 서명락은 김천에 소재한 이의조의 댁에서 처음으로 정국
채와 해후한 이후에
, 다시 “무화(武華) 담상(潭上)”으로 지칭한 송환기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한 인연을 간직한 관계로 파악되었다
.37 이로써 미
뤄 보건대 당시 정국채․서명락․하익범 등의 사례와 같이
, 이의조와
송환기 양인(兩人)의 문하에 동시에 드나들었던 다수의 문하생들이 존
재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 한편 정국채는 정조 22년인 1798년에 송환
기의 문하에 접어든 이래로
, “성명(性命)의 원천과 도학(道學)의 요체를
더불어 듣지 않음이 없었고
, 이로부터 뒤로는 그 사설(師說)을 믿게 된
끝에
, 비로소 학문하는 방도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밝혀 둔 대목도 주
목된다
.38 왜냐하면 이 기록 또한 스승이 추구했던 학문적 세계의 개성
과 강연한 주제 등을 일정 부문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이상에서 정국채를 위시한 경상우도 권역에 거주했던 성담 학단 구
성원들의 경우
, 흡사 험난한 구도에의 여정을 방불케 하는 영동의 한천
서원 왕래를 통해서
, 리기(理氣)․태극․심성론과 같은 주자학적 소양을
3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徐士順命洛>, 53쪽, “(…)而又況參聽於函筵之論太極,
南澗之講
, 大學者, 是吾輩之不朽勝事, 當日之樂, 別後之懷, 豈可以書辭, 說得盡耶.”
3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徐士順命洛>, 53쪽, “邂逅於鏡湖座下, 從遊於武華潭上,
此非偶然
.”
3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 <家狀(行錄)>, 104쪽, “戊午年, 負笈于性潭宋先生之門
(…) 性命之原, 道學之要, 無不與聞, 而自是之後, 信其師說, 始得爲學之方.”
제26호
22
함양해 나가는 도정에서 크나큰 지적 자양분을 제공받게 되었던 정황
들을 살펴보았다
. 그렇다면 이제 이들 문하생들이 1807년(순조 7)에 이
르러 스승인 송환기가 타계한 이후로 전개했던 일련의 추모․선양 사
업의 실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
III. 송환기 사후의 추모사업 전개
1. 강설연록과 유고집 간행
“단성(丹)․진주(晉) 사우(士友)들”로 지칭한 경상우도 지역의 송환기
문하생들은 송환기가 타계한 이후에 일련의 추모․선양 사업을 펼쳐나
감으로써
, 지난날 “담상(潭上)의 온화하고 강직했던 자리”39 운운한 스승
에 대한 심은을 갚기 위한 일련의 활동에 임하기에 이른다
. 대체로 그
주된 방향은 이미 선사(先師)로 화한 송환기가 생전에 행한 강연집과 유
고집을 발간하기 위한 작업을 펼침과 동시에
, 또한 이른바 ‘노원(老院)’
으로 칭한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에 송환기를 추배(追配)하기 위
한 세 부류의 사업으로 귀착되었다
. 이 같은 추이와 병행하여 송환기의
5대 조상인 송시열이 수립한 학문세계인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
을 아울러 진척시켜 나갔던 정황도 포착된다
.40 이처럼 우암학을 계승
3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鄭上舍燖藎>, 47쪽, “弟及令姪, 於潭上誾侃之席, 而乃叙
願言之懷
.”
40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종수
, 「함인재 정국채의 생애와 우암학 수용」, 뺷동방문화와
사상뺸
8,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20, 176∼184쪽 참조.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23
하기 위한 노력을 가시화했던 이면에는
, 명(明)나라가 멸망한 이후로 소
중화(小中華)로서의 조선(朝鮮)의 위상을 자부했던 송시열의 자취가 서린
“화양(華陽)의 도통(統)”을 이은 문경공(文敬公) 송환기의 행적을 보다 적
극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해 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
한편 이상에서 적시한 몇몇 부류의 추모 사업과는 별도로 우도권의
송환기 문하생들은 지리산(智異山)을
“등산(上山)한 여러 벗들과 돌아오
면서 전대(田垈)에서 회동하였다
.”라는 시제가 암시해 주는 바와 같이,41
산행을 통해서 구성원들의 단합과 결속을 도모하는 자취를 남긴 사실
도 주목된다
. 물론 송환기 사후 9년 만에 단행된 이 지역 문하생들의 지
리산 유람(遊覽)은
“평생토록 막혀있던 흉금을 씻어내기 위한”42 오래전
의 숙약(宿約)을
1807년(丁卯) 3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행한 결과였
다
.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정묘년 늦봄에 시도된 지리산 산행은 경상우도
에서 소수 학파에 머물러 있던 노론계 학단의 연대와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구성원 공동의 의지가 표출된 측면도 엄존하고 있다
.
이러한 분석은
1807년의 산행이 경상우도에서 송환기 문하를 대표
했던 정국채와 하익범 두 사람의 주도 하에 시도되었던 정황을 통해서
도 판단의 적실성이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43 정국채의 문집인 뺷함
인재유고뺸에서도 “하(河) 서중(敍仲) 익범(益範)․조(趙) 사흥(士興) 복(濮)
41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與上山諸友還會田垈>, 15쪽, “先儒遊屐或窮源(…)歸能靜
坐驗其源
.”
42
河益範
, 뺷士農窩集뺸 卷2(경상대 중앙도서관 소장본), 「雜著」, <遊頭流錄>, 1807, 127쪽, “余
謂欲玆遊數十年
, 只在不遠, 而不能勉强, 則平生芥滯之胷, 終無以盪滌行矣, 無多談.”
43
河益範
, 뺷士農窩集뺸 卷2, 「雜著」, <遊頭流錄>, 126쪽, “丁卯春, 寒溪鄭國采士觀, 書以要余玆遊,
乃宿約也
, 陪伯氏決策, 卽三月二十五日也.”
제26호
24
등과 더불어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을 유람했다
.”고 전언하고 있는데,44
이는 한천서원을 함께 내왕했던 이들에 의해 정묘년 산행이 주도되었
을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 그리하여 약 15여 명 안팎의 문하생들이 지
리산 유람에 동참하게 되었고
, 이 산행은 익월인 4월 5일에 이르기까지
13일 동안이나 이어진 단합대회 형식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이다.45
기실 약
“한 달여 전에 단진(丹晉) 사우(士友)들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했다
.”는 기록 역시 지리산 유람을 통해서 유대감을 다졌던 일과 동
일한 맥락 하에 놓여있는 행사였다
.46 유학의 주요 경전에 연원한 향음
주례는 사족(士族)
상호간의 관계성을 도모하는 향촌 의례이기에, 문하
생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결실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송
환기 사후에 추진된 일련의 추모․선양 사업 또한 이들 문하생들이 맺
었던 강한 결속과 연대감의 토대 위에서 이뤄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이제 송환기 사후에 펼쳐졌던 스승의 강연집과
유고집을 발간하기 위해 우도 지역의 문하생들이 전개했던 활동 내용
들을 추적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
일찍이 정국채는 송환기가 타계한 직후에
,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
”을 느꼈고, 이에 복제(制服)를 갖추고 상례(喪禮)를 치름으로써, 스
4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1, 「詩」, <與河敍仲益範趙士興濮遊頭流山, 抵入德門, 吾輩尋眞路, 初
由入德門
, 這間無限景, 方丈上頭言>, 14쪽.
45
13일 동안 지속된 산행의 주요 왕환(往還) 코스는 이하와 같다. 덕천서원(德川書院)․중산리
(中山村)․장터목(虎口堂)․천왕봉(天王峯)의 일월대(日月臺)․세석평원(細石平原)․벽
소령
(碧宵嶺)․칠불암(七佛庵)․화개동(花開洞)․전대(田垈)(하동 횡천면)․평촌(坪村)
(청암면)․월횡(月橫)(옥종면). 전대 이후는 귀가 시에 거친 회로(回路)에 해당한다.
4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39쪽, “月前, 與丹晉士友, 行鄕飮酒禮, 而
多有所未解本意處
.”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25
승 생전과 다름이 없이
“한결같이 섬기는 의리를 다했다.”고 전한다.47
또한 그는 문하생들이 혹여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까봐 걱정한
나머지
, 내방한 동문들에게 “말끝마다 반드시 문경공(文敬)을 칭하였
다
.”고도 한다.48 정국채가 연상의 동문인 서명락에게 “선사(先師)의 도
(道)
가
, 그 장차 후대에 전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로써,49 큰 기대감을 표
시했던 이유도 동일한 맥락 하에 놓여 있다
. 정국채의 문집에 송환기
사후에 펼쳐진 문하생들의 추모 사업과 관련된 일련의 기록들이 등재
되어 있는 이면에는
, 바로 스승이 “가르쳐 인도한” 애틋했던 교회(敎誨)
에의 기억에 크게 고무된 결과를 반영해 준다
. 그런 점에서 이미 선사
로 화한 송환기 생전의 자취들을 수록한 유고집을 간행하는 일이란
,
“스승의 문하에 들었던” 제생(諸生)의 입장에서 제일의 급선무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스승의 유고집을 간행하는 작업과 관
련하여 뺷함인재유고뺸에서는 송환기가 생전에 한천서원에서 강설(講說)
했던 강연 내용을 정리하여 문헌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추진함과 동
시에
, 또한 유고집을 분담하여 등사(謄寫)해서 문집의 체제로 완성해 나
가는 두 종류의 작업을 추진하였음이 확인된다
. 우선, 전자와 관련하여
4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 <家狀(行錄)>, 105쪽, “而及其遭山頹之痛也, 爲之制服行
喪
, 以盡事一之義焉.”
4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 <墓碣銘幷序>, 116쪽, “文敬之喪, 制服盡誠, 恐得於師門
者
, 不傳訓迪, 來者, 言必稱文敬.” <묘갈명병서>는 1946년 11월에 과재(果齋) 이교우(李敎宇,
1881∼1950)가 지었다.(같은 책, 120쪽.): “丙戌至月丁巳, 果齋李敎宇謹撰.”
4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徐士順命洛>, 54쪽, “窃想吾兄, 造詣日精, 而先師之道,
其將有傳於後矣
.”
제26호
26
정국채는 서명락에게 자신이 직접 맡았던 뺷강설연록(講說聯錄)뺸의 진행
추이를 아래처럼 보고하였음이 주목된다
.
E
(선생께서) 강설(講說)하신 연록(聯錄)은 (평소의) 가르침에 의거하
였으나, 그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부분은 망녕스럽게도 제 어리석은
견해로 대략 수정(檃)․분류(括) (작업)을 가해서 한 질(帙)을 완성하
였습니다.
50
윗글에 곧장 이어서 정국채는 그가 잠정적인 차원에서 완성한 송환
기의 뺷강설연록뺸 한 질을 “현희(賢希) 형(兄)(곧 송흠천)에게 부쳐주어, 재
차 도세(淘洗)(교정)하도록 하여 후일에 검토(檢)․상고(考)할만한 자료로
삼게 한다면
, 혹여 잘못 마름질한 책망을 입음이 없질 않겠습니까?”라
는 소견도 덧붙여 두었다
.51 다만, 도합 32권으로 구성된 현전하는 뺷성
담집뺸에는 논의 중인 ‘강설연록’이 누락된 상태이므로, 송환기 사후에
16권 분량으로 간행된 문집에도 수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52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기록들은 송환기가 타계한 이후에
“선생이 고
제(高弟)로 허여(許)했던
” 정국채의53 주도적인 노력 하에 추진된 뺷강설
50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徐士順命洛>, 54쪽, “講說聯錄依敎, 而其煩瑣處, 妄以愚
見
, 畧加櫽括, 以成一帙.”
51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徐士順命洛>, 54쪽, “而付與賢希兄, 更使淘洗, 以爲日後
檢考之資
, 无或被汰栽之誚耶.”
52
宋秉夔 編
, 뺷潭門錄뺸, 1907, 1쪽, “先生諱煥箕, 字子東, 又號心齋 ... 賜諡文敬公, 文集十六卷, 刊行
于世
.” 발행처 미상인 뺷담문록뺸은 송환기의 문인록으로, 달리 뺷性潭先生門人錄뺸이라는 표
제를 취하기도 한다
.
53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4, 「附錄」,<行狀>, 112쪽, “先生, 許之高弟, 同塾, 亦待之, 以直諒之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27
연록뺸 작업이 상당히 치밀한 준비 과정을 밟았던 구체적인 정황을 확
인시켜 준다
.
이렇듯 뺷강설연록뺸을 발간하는 작업과 병행해서, 송환기의 유고집
원본을 베껴 옮겨서 문집의 체제며 내용을 검토하는 작업도 아울러 진
행되고 있었다
. 그런데 이 작업은 방대한 유고집의 분량을 고려할 때
여러 동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뒤따라야 마땅했으나
, 우도권의 경우
시종 난항을 거듭했던 듯하다
. 무엇보다 송환기의 “유고(遺稿)를 등사
(謄)
하는 일에 관한 의론(議)을 여러 벗들에게 맡겼으나
, 한두 사람 외에
는 모두 수개 월 동안 몸을 빼기가 어려운
” 사정이 가장 큰 난관으로 작
용하고 있었다
.54 게다가 “금년 봄에 두질(痘疾)이 일시에 크게 창궐(鴟)
하여 떠돌다가
, 가까운 동리까지 미친 끝에,” 자신의 아이도 감염된 사
정으로 인해 바깥 출입이나 원행(遠行)이 자유롭지 못한 사정도
,55 애초
유고집을 검토하는 작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 요인으로 등
장했다
. 이처럼 복잡다단한 상황을 맞이해서 정국채는 당시 단성․진
주 지역의 문하생들이 직면했던 유고집 간행 사업의 어려움을 아래처
럼 자세히 기술해 두었다
.
F
우리 고을에서도 유고집(物) 한 단락을 떠맡아서, 시종 생각을 부지
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여전히 뜻과 같지 않으니, 또한 한동
友
.”
5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 57쪽, “遺稿謄事, 歸議諸友, 則一二人外, 皆難
數月之抽身
, 揆其情勢, 似可然矣.”
55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 57쪽, “今春痘疾, 一時大鴟犯, 及近里, 方以家
兒對瘢之
, 故勢難遠出, 辜負向約, 良可愧歎.”
제26호
28
안 구차스럽고 어려운 단서가 없질 않습니다. 일의 형세가 이와 같
으니, 다만 현사(賢師)에게 맡기어 서류 꾸러미(簡軸)를 부쳐 드리고,
글을 옮겨 쓸 만한 이가 등출(謄出)한 뒤에, 다시 간축을 부치기를
반복하였답니다.
56
위의 인용문은 송환기가 소속된 은진(恩津)
송문(宋門)을 뜻하는 “사가
(私家)
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온
”57 원본 유고집 가운데서, 전체 문인(門人)
들의 의론에 따라
“각기 2책자(冊子)씩을 등사하면, 책(帙)을 이룰 수 있
다
.”던 당초의 문집 발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우 지역 문하생들에
게 분담된 등사 작업의 현황을 포착해 둔 것이다
.58 그 이면에는 애초
“선사(先師)의 유고는 20권쯤 될 것”이라는 자체적인 예상 하에, “우리 무
리들이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 어찌 복근(服勤)하는 의리(義)이겠는
가
?”하는 자책 끝에, 마침내 유고집을 분담해서 등사하는 작업에 흔쾌
히 동참하게 된 경위가 내재되어 있다
.59 그러나 여러 사정상 경상우도
의 경우
, 결국 학적 역량이 뛰어난 두어 사람의 ‘현사(賢師)’를 선임해서
교대로 유고집을 등사하는 식의 어려움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 또
한 조심스럽게 포장한 원고 꾸러미인
‘간축(簡軸)’을 배송하고 수령하는
따위의 잉여시간들을 감안할 때 이 지역에 할당된 등사 작업이 매우 더
5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 57∼58쪽, “吾鄕收物一段, 非不始終勤念, 而
尙未如意
, 亦不無臨時, 苟難之端, 事勢如此, 獨任賢師, 簡軸付呈, 可書者, 謄出後, 還付反復.”
5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 58쪽, “切仰, 此是私家寶藏, 故如是□託耳.”
5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柳>, 68쪽, “門人之議, 各謄二冊子, 則可成帙, 而足寓江
漢之懷
, 故詢謀同然.”
5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柳>, 68쪽, “先師遺稿, 可二十卷, 而惟吾輩不與此役, 豈
服勤之義乎
.”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29
딘 속도로 진척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이렇듯 여러모로 곤란한 사정들을 극복한 끝에
, 뺷함인재유고뺸의 「여
류(與柳)」에서는 유고집의 등사 작업이 완성된 시기와 함께
, 또 이 일을
책임진 담당자에 관한 정보들을 아래처럼 간략하게 기록해 두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
G
내년(곧 1809년) 봄 2월 사이에 (현사에게 맡긴 등사본을) 모두 거두어들
일 계획입니다. 책(冊)을 만드는 유사(有司)는 이경직(李敬直) 장보(甫)
인데, ‘(금년) 9월 안에 단장(粧)을 마칠 것이다.’라고 운운 하더군요!
60
물론
1808년(순조 8) 9월에 책의 단장 작업을 마치고, 또 익년인 1809
년
2월에 등사본들을 모두 수합해서 할당된 조책(造冊) 사업을 원만하게
완료했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 대신에 송환기가
“1807년 8월 3일에 타계한” 지 불과 1년 반 만에 “문집 16권이 세상에 간
행된
”61 추모․선양 사업에 보여준 이 지역 문하생들의 희생 어린 노력
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본다
. 결과적으로 이상에서 소개한 내용은
19세기를 전후로 한 전근대 시기 사회에서 전국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한 인물의 강연록이며 유고집 발간 사업과 관련해서도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준 사례로 평가된다
.
60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卷2, 「書」, <與柳>, 68∼69쪽, “明春二月間, 收畢爲計, 造冊有司李敬直甫,
而九月內粧畢云
, 故玆庸示, 及餘病昏不宣.” 산청(단성) 출신으로 보이는 이경직의 호는 화익(華
益
)으로 지리산 유람에 동참했던 인물이나, 여타의 신원 정보에 관해서는 미상임.
61
宋秉夔 編
, 뺷潭門錄뺸, 1쪽, “先生諱煥箕 ... 純祖丁卯八月三日卒 (...中略...) 文集十六卷, 刊行于世.”
제26호
30
2. ‘노원(老院)’에의 추배(追配) 노력
이제 두 번째 사안으로서 이른바
‘노원(老院)’으로 지칭한 성주의 노강
서원에 송환기를 추가로 배향하기 위한 문하생들의 단계적인 추모 노력
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실상 이 건은 “1809년 봄철 두 달 사이에 (영정을 노
원에
)
베끼어 옮기는 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으로,62 앞서 소개
한
20권 분량의 유고집을 발간하는 일과 병행해서 추진된 사업이었다.
다시 말해서 송환기의 문하생들은 유고집을 간행하는 작업과 송환기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노강서원에 봉안하는 사업을 가능한
1809년 봄
철까지 완료함으로써
, 스승에 대한 추모 사업을 일단락 지으려고 기획했
던 것이다
. 그런데 소위 ‘이모사(移摹事)’로 약칭된 후자의 거사에 앞서 정
국채는 노강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표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 이 사안은 후일에 스승인 송환기를 추배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결 요건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므로 이제 노강서원 영건사(營建史)의 한 축을 장식했던 청액
(請額)
문제에 관한 기록들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원래 성주에 건립되었던 노강서원은 이곳의 주벽(主壁)에 안치된 송
시열이
1674년(현종 15)에 유발된 2차 예송논쟁으로 거제(巨濟)로 귀양살
이를 가던 중에
, 지금의 경북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인근한 낙동강(洛
東江
)
변에 도달했던 ‘경유’ 인연으로 인하여 성주에서 고령으로 다시 이
62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柳>, 68쪽, “移摹事 , 以明春二月間牢定, 而將有有司之
告耳
.”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31
건(移建)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 당시 송시열은 자신을 맞이한 일군의
무리 중에서 유독 노인들이 많았던 까닭에 이곳을
‘노다촌(老多村)’으로
칭하였고
, 또 동네가 낙동강 가에 위치하여 ‘노(老)․강(江)’이란 명호(名
號
)
를 취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63 노강서원이 건립된 이면에는 18세기
초반 무렵에 고조되기 시작한 송시열에 대한 추숭(追崇)
분위기와 함께,
1694년(숙종 20)에 야기된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로 재집권에 성공한 중
앙 노론의 정치적 지원 등과 같은 흐름에 힘입어 영남 남인의 거점 중
에 한 곳인 성주에 노론 계열의 서원을 건립하고자 했던 정치․사회적
배경도 깊숙이 관여한 결과이기도 했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그리하여 차후 이 지역의 소위 신생노론(新老)
세력들은 노강서원을
매개로하여 향권(鄕權)에 대한 주도권 행사와 노론 당(黨)
내에서의 정치
적 역할을 아울러 수행하게 되었고
, 또한 기호학파(畿湖學派)와의 본격적
인 교류를 다지는 디딤돌로도 활용하게 된다
.64 노강서원은 1712년(숙
종
38)
에 영당(影堂)
형식으로 건립되었다가, 1740년(영조 16)에 이르러 승
호(昇號)와 함께 서원으로서의 기반이 구축되는 영건사를 간직하고 있
다
.65 따라서 이제 논의하게 될 “노원(老院)의 편액(額)을 청하는 일”이란,
1740년 이후로 직면한 노강서원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해당한다.
일단 이 사안과 관련하여
19세기 초반 경에 정국채가 “노원(老院)의
편액(額)을 청하는 일
”66을 김천에 거주하던 또 다른 스승인 이의조의
63
이동훈
, 「노강서원(老江書院) 상편(上偏)」, 뺷주간 고령뺸, 2020.2.15.
64
채광수
, 「노강서원의 연혁과 인적 구성」, 뺷민족문화논총뺸 60,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5, 322쪽.
65
채광수
, 앞의 글, 2015, 345∼346쪽.
제26호
32
견해를 접한 사실이 있었음을 우선적으로 환기해 본다
. 당시 노강서원
을 의미하는
‘노원(老院)’의 건물 자체는 이미 완공된 상태였으나, 송환
기 생전에는 국가적인 공인을 뜻하는 사액(賜額)을 청하는 문제가 긴급
한 현안으로 대두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 이에 정국채는 “소자(小子)는
이러한 등의 일에 더욱 어둡고 어두워서
, 능히 엄두(意)도 낼 수 없는”
처지임을 토로한 다음에
,67 스승인 송환기에게 아래와 같은 소견을 조
심스럽게 피력해 두었음이 주목된다
.
H
다만 (청향 상소를) 도모할 만한 선비에게 권한다면, 의향이 없지는 않
겠습니다만, 다만 이 일은 조심스럽고 소중한 일이어서, 또한 누구도
나서서 거사(擧)를 담당(擔負)할 이가 없고, 모두 관망하면서 머뭇거리
며 망설이고 있습니다. 만약에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上道人)이 있어
주창하여 움직인다면, 이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68
정국채는 송시열과 권상하(權尙夏)․윤봉구(尹鳳九)․한원진(韓元震)
등
과 같이 주로 노론 호론(湖論)
계열의 핵심적인 인사들을 배향한 노강서
원의 청액(請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륜을 갖춘 인물을 유
소(儒疏)의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 이른바 ‘영
66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 32쪽, “月前鏡湖丈書中, 有老院請額事, 不可
無儒疏
, 而若設儒疏, 則爲陽翁請享尤好云.” 언급된 ‘양옹’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을 가
리킨다
.
6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 32쪽, “小子, 則至於此等事, 尤所昧昧, 不能
生意
.”
6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性潭先生>, 32쪽, “只以勸於可爲之士, 則不無向意, 而但
此事愼重
, 亦莫能挺身擔負擧, 皆觀望趑趄, 若有上道人, 倡動之, 則事可成矣.”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33
우소사(嶺右疏事)
’로 약칭된 이 건에 대한 정국채의 진중한 입장은 이의
조에게 올린 또 다른 서신을 통해서도 동일한 논조로 재현되고 있었다
.
69
물론 그 이면에는 경상좌도와 우도의 노론계 인사들의 합작 노력에
의해서 사액 조처의 대의명분을 획득하기 위한 나름의 치밀한 전략이
구사되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 그러나 송환기․이의조처럼 중량감 넘
치는 인사들이 주로 관여했던 사액 문제에 관한 한 당시 정국채는 자신
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 그만한 거사를 추진할 만한 위치에 놓여 있지
는 않았다
.
그런데 차츰 시간이 경과하면서 영남권의 동문 집단에서 정국채는
“오당(吾黨)이 기대(期待)하는 바의 사람”이라는 주변의 평판에 부응하는
수준에서 자신의 역할을 서서히 확장해 나갔던 듯하다
. 이를 위해 정국
채는 노강서원의 청액을 실현하기 위한 유자들의 상소문인 유소
(儒疏)
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의조․송환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적
극 개진하게 된다
. 특히 이 사안은 스승인 송환기 사후의 추모 사업과
도 직결된 사안이므로
, 뺷함인재유고뺸에 수록된 해당 내용들을 좀 더 추
적해 보기로 한다
. 다만 노강서원의 경우 경상우도가 아닌, 즉 좌도인
성주에 건립되었던 사정을 감안한 끝에
, 이 지역에서 거사를 창동(倡
動
)할 만한 소위 ‘가위지사(可爲之士)’와의 적극적인 제휴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었다
.
이에 정국채는 당시 선산(善山)에 거주하던 심대지(沈大之, 1743∼?)70를
6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42쪽, “且以愚賤之見, 從前嶺右疏事, 必有
上道之人倡動
, 然後乃可, 不然雖或有生意施設者, 四方, 恐不響應, 此姑趑趄, 未敢者也.”
70
宋秉夔 編
, 뺷潭門錄뺸, 「沈大之」條, 1쪽, “字士成, 癸亥生, 靑松人, 居善山, 父進士鍍.”
제26호
34
거사를 주도할 만한 최적임자로서 지목하게 된다
. 심대지는 이우세에
의해 간택된
2명의 ‘봉정유생(奉幀儒生)’ 가운데 한 사람인 “선산(善)의 심
(沈)
”으로 약칭한 인물과 동일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71 또한 심대
지는 송환기 생전에 뛰어난 문장(文章)을 인정받았던 인물이기도 했
다
.72 이로써 정국채가 “자뢰(資)하여 이익이 되는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도 술회한 심대지를 거사의 적임자로 특정한 이유를 어느 정
도 짐작할 수 있다
.73 그리하여 정국채는 유소를 추진할 만한 장점들을
두루 갖춘 심대지를 적극 천거하면서
, 그가 성주읍을 대표하는 사우들
과도 긴밀한 협조 노력을 전개하도록 추동할 것을 이의조에게 아래처
럼 건의하기도 했다
.
I
대저 이 (유소) 일을 잘 마치는 것은, 요컨대 심장(沈丈) 대지(大之)
씨와 성주읍(星邑)의 한두 사우들의 인도(倡)․통솔력(率)에 달려 있
으니, 한 번 노원(老院)에서 모여서 의론한 뒤에서야 (비로소) 착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주(星)의 유생(儒)들을 인도하여 움직이게
하는 일도 또한 심씨 어르신이 권장하여 움직이게끔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74
71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1936, 13쪽, “余曰 ,自本院圈
點奉幀儒生二員
, 於善金沈曹兩人, 以待通奇, 然後治行如何.”
72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沈大之>, 49쪽, “每因先生對坐之日, 慣聞吾丈文章之說.”
73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沈大之>, 49쪽, “又承如此人相從, 則最多資益之敎.”
74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42쪽, “大抵此事克終, 要在於沈丈大之氏,
及星邑一二士友之倡率
, 而一番會議於老院, 然後可以着手, 星儒倡動, 亦在沈丈之勸起.”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35
위의 건의 서신에 곧장 이어서 정국채는
“또 도백(道伯)과 성주 읍민들
(星倅)
의 의견을 수렴해서
, 완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
이라는 추가적인 소견을 제시하고
, 이를 스승인 송환기에게도 전언해 줄
것을 적극 요청하기도 했다
.75 이상의 내용들을 정리해 두자면, 정국채
는 일차적으로 노강서원이 터한 성주의 유자들 중에서 심대지를 위시하
여 청액 상소를 주도할 만한 창동 그룹을 엄선하고
, 또한 이들이 추진하
게 될 유소 건을 추인할 관찰사와 지역민의 확고한 지지 여론을 등에 업
는 식의 매우 단계적이면서도 연대적인 추진 전략을 구상했던 것으로 판
단된다
. 이는 18세기 성주의 노론 세력들도 인근 지역의 노론, 그리고 지
방관과 중앙의 노론 세력의 지원 하에
1712년에 송시열을 봉향하는 노강
영당(老江影堂)을 건립하고
, 곧이어 이를 서원으로 격상시켰다는 선행 연
구와도 궤를 나란히 하는 전략인 셈이다
.76 여하간 정국채는 이상에서 제
시한 좌도에서의 추진책과 병행하여 그가 소속된 경상우도 지역 내에서
의 동시적인 협찬 의지를 아래처럼 밝혀 두기도 했다
.
J
경상우도(下道)에서의 (유소) 창도(倡)는 소생(小生)도 또한 모모(某
某
) 등과 더불어 힘껏 주선할 계획입니다만, (제) 두터운 마음이 과
연 가부(可否)가 어떻게 될 지를 아직 알 수가 없으니, 자세히 가르
쳐 주십시오!
77
75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42∼43쪽, “又不可不收議於道伯及星倅,
以爲完全之策也
. 以此意書, 議于潭上如何.”
76
정진영
, 「18세기 영남 노론의 존재형태-영조 14년(1738) 안동 김상헌서원 건립과 훼파를
통해본
‘새로운 세력’에 대한 검토-」, 뺷한국사연구뺸 171, 한국사연구회, 2015, 227쪽.
77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上鏡湖李先生>, 43쪽, “下道之倡, 小生, 亦與某某, 旋力爲
제26호
36
위의 인용문은 경상좌도에서 거사를 진척시키는 추이에 맞춰서 우
도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협조에의 노력을 기울일 것임을 밝힌 글이다
.
특히 윗글은 정국채가 우도 권역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이 새삼 눈길
을 끌게 한다
. 이는 영남권의 동문 집단에서 정국채의 입지가 차츰 확
대되어 가고 있는 조짐의 일단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 그런데 이상에
서 제시한 정국채의 치밀한 유소 추진 전략이란
, 동시대를 전후로 하여
조정(朝廷)을 상대로 제기한 여타의 사례들을 통해서도 빈번하게 목격
되는 현상이기에 그다지 특별한 내용이지는 않다
. 다만, 거사에 임하는
정국채의 순수한 진정성만큼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
그러던 차에
1815년(순조 15)에 이르러 송환기를 추가로 배향하기 위
한 추모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을 맞이해서는 이제 정국채
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일원으로 처지가 바뀌게 된다
.
그 이전 시점인
1812년에 이르기까지 정국채는 애써 담담하게 “죽은 자
는 이미 죽었을 뿐이다
.”는 남송(南宋)의 이연평(李延平)(李侗)의 언명을 떠
올리면서도
,78 근자에 “담상(潭上) 소식이 아득하기가, 마치 민(閩)․촉
(蜀)
두 나라가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공허함에 몹시도 우울한
심경을 고백해 보인 사실도 있었다.79
그러는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
미 선사(先師)의 역명(易名)의 은전이 벌써 해조(該曹)[예조]에 하달되었다
고 운운하는
” 소식,80 곧 조정에서 송환기의 시호(諡號)를 내리는 문제에
計
, 未知盛意果如何可否, 詳敎也.”
78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壬申 十一月)>, 5
9쪽, “雖然, 死者 已矣, 延平所云.”
79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壬申 十一月)>, 5
9쪽, “潭上消息, 逖如閩蜀之不相
關
, 曷勝紆鬱.”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37
대해서 예의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였다
. 1811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는 송환기의 시호를 도덕과 폭넓은 견문
, 그리고 늘 경계(儆戒)하는 신중
한 처신 등과 같은 생전의 행적에 초점을 맞춰서
‘문(文)․경(敬)’ 두 글자
로 확정한 바가 있다
.81 성주의 노강서원에 송환기의 영정을 봉안하는
추배 사업도 바로 이상과 같은 일련의 흐름과 병행해서 추진된 것으로
,
앞서 논급한 유고집 간행 사업과도 추이를 같이하는 거사였다
.
그런데 이 사안과 관련해서 뺷함인재유고뺸에서 수록된 내용으로는
노강서원에 스승인 송환기의
“(영정을) 베껴서 옮기는 일은, 명년(明, 곧
1809년)
봄철 2월 사이에 확실히 정해질 것이며, 장차 유사(有司)가 알려
줄 것이네
!”라는 기록이 유일한 상태다.82 대신에 송환기의 영정․위패
를 봉안하는 의식을 위한 고유문(告由文)을 지은 이우세83의 뺷노강서원
성담송선생추배일기뺸에는 당일의 정황을 아래처럼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해 두었음이 주목된다
.
K
드디어 수암(遂菴)의 위패는 동쪽의 상벽(上壁)으로 옮겨 봉안하였
고, 병계(屛溪)의 위패는 동쪽의 하벽(下壁)에 옮겨 봉안하였으며,
새로 만든 위패는 서쪽의 아래쪽 벽에 옮겨서 봉안하였다.
84
80
鄭國采,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權子揚>, 58쪽, “而已先師易名之典, 聞已下該曹云.”
81
宋煥箕
, 뺷性潭集 II뺸 卷32, 「附錄․年譜」, <辛未>條, 205쪽, “辛未, 命除謚狀, 贈謚文敬 (...中
略
...) 道德博聞曰文, 夙夜儆戒曰敬.”
82
鄭國采
, 뺷含忍齋遺稿(單)뺸 卷2, 「書」, <與柳>, 68쪽, “移摹事, 以明春二月間牢定, 而將有有司之告
耳
.”
83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16쪽, “告由文, 則余所撰.”
84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16쪽, “遂移奉遂菴位於東上
壁
, 屛溪位於東下壁, 新奉位於西下壁.”
제26호
38
무엇보다 윗글은 그간에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었던 권상하와 윤봉
구85
및 한원진86 세 사람 사이의 위차(位次)를 재선정하는 미묘한 문제
가 해결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이는 송시열 이하 권상하․윤봉
구․한원진 삼인 간에 가로 놓인 상징적․시간적 계통의 선후 문제를
반영한 위차 재선정이라는 그간의 논란이 깔끔하게 해결되었음을 시
사해 준다
. 또한 1815년 2월에 노강서원에서 난상토론을 거친 끝에, 모
든 문하생들이
“반드시 봉안문(奉安文)을 받고, 영정(影幀)을 받든 뒤에야
바야흐로 봉안할 수 있다
.”고 합의한 대로 영정이 무사히 봉안되었음을
아울러 확인시켜 준다
.87 2월 초순에 회덕(懷德)을 출발한 영정이 4월 25
일에 노강서원에 도착했고
, 향사(享祀)는 다음 날인 26일 새벽에 거행되
었다
.88 이로써 송환기가 타계한 지 약 8년만인 1815년 4월 26일에 이
르러 추모 사업의 정점에 해당하는 이른바
‘이모사(移摹事)’로 일컬어진
노강서원 추배가 완료되는 국면을 맞이하기에 이른 것이다
.
다만
, 이우세가 지은 뺷노강서원성담송선생추배일기뺸에는 경상우도
문하생들의 동정 묘사가 누락된 상태지만
, 각 지역의 경계마다 영정을
85
뺷노강서원성담송선생추배일기뺸의
2월 7일자에는 우암의 6대손인 강재(剛齋) 송치규(宋
穉圭
, 1759∼1838)의 이하와 같은 지적을 기록해 두었다.(7쪽): “병계의 신위와 수암의 신
위를 나란히 배향한다면
, 흡사 스승과 제자가 비견되는 혐의가 있을 것 같다. 만약 다른
서원의 증거 자료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剛齋曰, 屛溪位與遂庵位聯享, 則似有師弟比肩之嫌,
若有佗院證據
, 則好矣云.)”
86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7쪽, “旣奉安南塘于西上位, 而
遂菴位之
, 仍舊於東下位者, 豈以遷動爲未安耶.”
87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8쪽, “二十九日, 往江院與參享
諸員
, 及尹上舍鍾大, 議奉奉安文奉幀事, 留院數日, 爛商凡百, 則咸曰, 必奉文奉影, 然后方可奉安.”
88
李禹世
, 뺷石淵集뺸 卷2, 「雜著」, <老江書院性潭宋先生追配時日記>, 16∼17쪽, “二十六日昧爽, 行
事如禮
(...中略...) 於新配位, 行酌獻讀奉安文, 享禮利成.”
19세기 경상우도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학단(學團)의 동향
39
교대로 나누어 운반하는 등의 분담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
다
. 실상 성주목(星州牧)을 제외하고 노강서원에 관여한 인사들의 거주
지의 약
40%가 주로 경상우도 거주자였다는 연구 결과는,89 뺷노강서원
성담송선생추배일기뺸에서 결여된 우도 구성원들의 참여 정도를 간접
적인 방식으로 짐작게 해준다
.
IV.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19세기 초반 무렵을 전후로 해서 정국채를 위
시한 경상우도 지역의 송환기의 문하생들이 남긴 활동 양상을 스승 생
전과 사후라는 두 분기점에 초점을 맞춰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 그
결과 우리는 전근대 시기 사회에서 영위되었던 사자전승(師資傳承)의 구
체적인 실상과 더불어
, 스승 사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학단의
존재 방식을 강연․유고집 간행과 서원 추배라는 세 부류의 추모․선
양 사업을 통해서 상세하게 음미하게 되었다
.
특히 단성․진주권에 거주했던 성담 학단의 경우
, 거창 → 김천 →
옥천 → 영동․황간의 한천서원을 왕래하는 머나먼 여정을 흡사 출가
한 승려들의 가열찬 구도(求道)
행각을 연상케 해주듯이 주기적으로 임
했던 정황이 매우 눈길을 끌었었다
. 물론 이들이 감수한 고행의 이면에
는 이들 문하생들이 견지한 간절한 구도 의지와 함께
, ‘학해(學海)’로 비
유된 스승인 송환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이 지탱하고도 있었다
. 겸사
89
채광수
, 앞의 글, 2015, 312쪽.
제26호
40
해서 이들이 황간을 왕래했던 노정에서 남긴 몇몇 시 작품들은 당시의
주변 풍물과 경관 등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아울러 제공해 주기도 한
다
. 유학적 구도를 의미하는 동업(同業) 의식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공유
했던 우도권의 문하생들은 지리산 유람과 향음주례 의식을 병행함으
로써
, 보다 강한 결속력을 다지기도 했었다. 기실 송환기가 타계한 이
후에 펼쳐진 일련의 추모․선양 사업도 바로 이 같은 연대감과 결속력
의 바탕 위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
대체로 추모․선양 사업의 주된 방향은 송환기가 생전에 한천서원
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수습해서 뺷강설연록뺸이라는 제하의 책자로 완성
하는 작업과 유고집을 분담해서 등사․발간하는 일
, 그리고 성주의 노
강서원에 스승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는 추배에의 노력과 같은 세 국
면으로 귀결되었다
. 물론 적시한 세 부류의 추모․선양 사업이 마냥 순
탄한 흐름을 탔던 것은 아니지만
, 결국에는 애초에 기획했었던 구상대
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
그리하여 이들이 남긴 일련의 자취들은 전통시대에서 전국적인 인
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한 인물에 대한 순차적인 반응을 확인시켜 주
고 있다는 점에서
, 대단히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국채를 비롯한 성담학단의 구성원은 전근대시기 사회에서
스승․제자 그룹이 주축이 된 학적 커뮤니티가 작동되는 하나의 전형
적인 사례를 선보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
4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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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 「18세기 영남 노론의 존재형태-영조 14년(1738) 안동 김상헌서원 건립과 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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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수
, 「노강서원의 연혁과 인적 구성」, 뺷민족문화논총뺸 60,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5.
제26호
42
Abstract
Movements of Seongdam(性潭) Song Hwan-gi(宋煥箕) Study
Group(學團) at Gyeongsangu-do(慶尙右道) in the early 19th Century
Kim, Jong-Su Visiting Fellow at Uam Research Institute,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This study started with a view to exploring traces of Noron-leaned members
(老論係)
through the case of Seongdam Study Group situated at Gyeongsangu-do in the early
19th Century. For this, the study investigated the main aspects of teaching activities
and memorial projects conducted at the two phases of life and death between
Seongdam Song Hwan-gi, - descendant of Song Si-yeol
(宋時烈) - and his student
Haminjae
(含忍齋) Jeong Guk-chae(鄭國采)
Pupils of Song Hwan-gi were found to have visited Hancheonseowon Academy
(寒泉
書院
) at Yeongdong(永同), Chungcheong-do(忠淸道) and attended the lectures periodi-
cally when he was alive. Behind it, was their limitless respect for their teacher and as a
result, the members of the study group were provided with big spiritual nourishments
over the course of their lifelong studies.
After the death of Song Hwan-gi in 1807, pupils at Gyeongsangu-do carried out a
series of memorial projects in honor of their teacher. The main aspects of projects in-
cluded summarizing contents of their teacher's lectures under the title of
Gangseolyeonrok
(講說聯錄) and transcribing the original posthumous collection to elab-
orate its system as well as the effort to pay tribute to the teacher at Nogangseowon
Academy
(老江書院) In connection with the a series of efforts to pay respect conducted
after the deaths of figures who had established nationwide personal networks, these
findings offered very useful information.
Keywords Seongdam Study Group, Jeong Guk-chae, Song Hwan-gi,
Hancheonseowon Academy, Posthumous collection, Memorial project
논문 투고일 : 2020.09.11 심사 완료일 : 2020.10.29 게재 확정일 : 202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