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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진경환*
45
Ⅰ. 들어가며
Ⅱ. 비판과 수정
1. 사실 적시의 오류
2. 논거가 부족하거나 누락된 주장
3. 모호하거나 불충분한 서술
4. 자의적인 해석
5. 기타
Ⅲ. 나가며
국문초록
이 글은 대중교양서와 전공학술서 사이에서 교묘하게 자리를 잡고 자기 영토를
확보해가면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풍조, 다시 말해 학술적 비평이 가해지면 대중교
양서라 변명하고, 대중교양서이니 엄밀한 학술적 논증이 필요치 않다고 둘러대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는 작금의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작성되었다.
대상으로 삼은 책은 2020년에 출간되어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있는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이다. 검토해 본 결과, 이 책에는 사실 적시가 잘못된 경우, 서술
이 모호하거나 불충분한 경우, 논거가 부족하거나 누락된 채 주장하는 경우, 자의석
으로 해석한 경우 등 여러 문제점들이 발견되었다. 학문적 고구와 교양적 저술 사이
의 모호한 경계를 타고 넘는 것은 소위 탈규범 시대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일지 모르
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학문적 윤리는 전제, 확보되어야 한다.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하지 않음으로써 모호하거나 잘못된 이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거나 객관적이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양기초학부 교수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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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타당성 있는 근거들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주장들이 통용되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술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정작 학술
적인 깊이 혹은 정밀성은 떨어지고 있는 현실, 그리고 교양서임을 내세워 학술적 엄
밀성을 피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술서로서의 위상을 점유하고 싶어하는 욕
구에 대해서이다. 대중교양서를 표방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폭넓게 확보하는 한편
학술서로서의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그 권위와 위상을 제고하려 하지만 학적 엄밀성
을 담보하지 않는 글쓰기는 어느 쪽에도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발
빠르고 정확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졸문으로 우선 첫발을 딛게 되
었다. 앞으로 생산적인 토론의 자리가 마련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주제어
: 대중교양서, 전공학술서, 부족한 논거, 자의적인 해석, 모호한 정보, 학적
엄밀성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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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은 묘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
중의 교양욕구에 수응하는 대중서로 기획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사학자의 고구’의 결과인 학술서의 성격도 아울러 갖
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의 광고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을 빼고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 그의 책들은 한 권 빠짐없이 한국미술사의 자
양분이다”라거나 “그는 매우 치열한 학자다. 그가 펴낸 책들은 출간 이
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유용
한 참고문헌이다”
1라는 주장은 후자에 크게 방점을 찍게 한다. ‘미술사
가 최열’의 연구업적을 일별해 보면, 이러한 판단이 그리 틀린 것은 아
닌 듯하다.
2
사정이 그렇다면,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은 학문적 비판에서 자유로
울 수 없다. 단지 대중교양서라면 비교적 가볍게 평가할 수도 있겠지
만, 전문 학술서의 면모를 갖고 있다면 그 의의는 실상대로 밝히고, 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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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뺷옛 그림으로 본 제주
: 제주를 그린 거의 모든 그림뺸(2021),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 서울
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뺸
(2020), 뺷한국근대미술 비평사-韓國美術批評 1800-1945뺸(2016),
뺷한국 근대미술의 역사
: 한국미술사 사전 1800-1945뺸(2015), 뺷이중섭 평전: 신화가 된 화
가
, 그 진실을 찾아서뺸(2014), 뺷옛 그림 따라 걷는 제주길: 풍경, 그림, 시 그리고 사람 이
야기뺸
(2012), 뺷옛 그림 따라 걷는 서울길: 풍경, 그림, 시 그리고 사람 이야기뺸(2012), 뺷한
국현대미술비평사뺸
(2012), 뺷박수근 평전: 시대공감뺸(2011), 뺷권진규뺸(2011), 뺷미술과 사
회
-최열 비평전서 1976-2008뺸(2009), 뺷화전: 근대 200년 우리 화가 이야기뺸(2004), 뺷사군
자 감상법뺸
(2000), 뺷근대 수묵 채색화 감상법뺸(1996), 뺷김복진: 힘의 미학뺸(1995), 뺷한국
만화의 역사뺸
(1995), 뺷민중미술 15년: 1980-1994뺸(1994), 뺷민족미술의 이론과 실
천뺸
(1991), 뺷한국현대미술운동사뺸(1991), 뺷민족미술의 이론과 실천뺸(1991), 뺷한국현대
미술운동사뺸
(1991) 이상은 그의 단독 저서로, 다수의 공저는 제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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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는 정확하게 지적해야 마땅하다. 학문적 고구와 교양적 저술 사이
의 모호한 경계를 타고 넘는 것은 소위 탈규범 시대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학문적 윤리는 전제, 확보되어
야 한다. 학문적으로 충분히 검증하지 않음으로써 모호하거나 잘못된
이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거나 객관적이고도 타당성 있는 근거들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주장들이 통용되게 할 수는 없다.
이하에서는 이 책의 서술에서 문제가 있는 사항들을 차례대로 지적
해 나가기로 한다.
3
문제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앞으
로 있을지 모르는 생산적인 토론에 효과적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문
제점으로 파악한 것들은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 사실 적시가 잘못된
경우, 둘째, 서술이 모호하거나 불충분한 경우, 셋째, 논거가 부족하거
나 누락된 채 주장하는 경우, 넷째,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 다섯째, 기
타 등이다.
3
세부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 해당 쪽수를 밝히기로 한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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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비판과 수정
1. 사실 적시의 오류
4
(1)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신도팔영(新都八詠)」을 지었다고 했다
(18쪽).
그러나 정도전이 지은 시는 「신도팔경(新都八景)」이다. 「신도팔
영」은 권근(權近, 1352~1409)의 시다. 이것은 단순한 착오라고 하기 어렵
다. 해석에 앞서 정확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2) 「도성연융북한합도(都城鍊戎北漢合圖)」(<그림 1>)를 설명하면서 “기
와와 초가가 뒤섞인 민가 가옥”이 보인다고 했는데(34쪽), 실제 그림에
서는 기와집만 보인다. 기와와 초가가 뒤섞인 그림은 다른 지도인 「도
성도(都城圖)」(<그림 2>)에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지도를 김정호(金正浩,
1804~1866)
가 그린 것이라 하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본 뺷동국여도(東國輿圖)뺸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크기를 ‘66✕47’이라
했다. 그런데 규장각의 설명에 따르면, 이 두 지도가 들어 있는 뺷동국여
도뺸는 편저자 미상이고, 크기는 46.4✕32.4cm로 되어 있다.
5
참고로 김
정호가 작성한 지도와 지리서는 뺷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뺸, 뺷청구도(靑邱
圖
)
뺸
, 뺷동여도(東輿圖)뺸, 뺷동여도지(東輿圖地)뺸, 뺷여도비지(輿圖備誌)뺸, 뺷대동
지지(大東地志)뺸 등이다. 이것 역시 단순한 실수라고 할 수 없다.
4
이 항목에는
‘사실 적시의 오류’뿐 아니라 사실과 관련한 ‘잘못된 설명이나 풀이’ 등도 포
함된다
.
5
뺷東國輿圖뺸
[古大4790-50. 편자미상(編者未詳), 간년미상(刊年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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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도성연융북한합도>
<그림 2> <도성도>
(3) 도봉서원 석각(石刻)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
1689)
은 큰 바위에 ‘도봉동문(道峰洞門)’이라고 새긴 뒤 부족하였는지 비
온 뒤 맑은 바람이란 뜻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글씨를 더 새겼다”라
고 했다(45쪽). 그런데 ‘광풍제월’이라는 글씨는 송시열이 아니라 이재
(李縡, 1680~1746)
가 쓴 것이다. 송시열이 쓴 글씨는 ‘제월광풍경별전, 요
장현송답잔원(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이다. 그 글씨 아래에 ‘화양노
부서(華陽老夫書)’라 했는데, 주지하듯이 화양노부는 송시열의 자호이다.
그런데 송시열 들이 ‘광풍제월’이라는 글자를 적어놓은 속뜻은 다른 데
있었다. ‘광풍제월’
6은 애초에 북송(北宋)의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주돈이(周敦頤, 960~1127)의 인품을 칭송하면서
쓴 말이다. “용릉의 주무숙
7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깨끗해
서 마치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빛 같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
霽月
]
”라고 말한 것을 발췌한 것이다. 이 말은 훌륭한 인품을 칭송하는
6
이것을
“비 온 뒤의 맑은 바람”이라 했지만, 정확히 풀면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
이다
.
7
‘용릉’은 주돈이가 살던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지명이고, ‘무숙’은 주돈이의 자
이다
.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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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외에도 세상이 잘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여기
서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기리면서 그이처럼 인품이 탁월한 대
학자로 인해 세상이 잘 다스려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고 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설명해야 적절하다. 요컨대 단지 “우람한 자연에 감동
어린 찬사를 헌정”한 것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4) “삼각산이라 불렀다가 18세기 이래 북한산이라고도 불렀다”라고
했다(50쪽). 그런데 15~16세기에 걸쳐 중간된 뺷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
)
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조계동(漕溪洞)은 북한산성(北漢山
城
)
동문(東門) 밖에 있는데, 그곳에 7층 폭포가 있다.”8 요컨대 18세기 이
전에도 이미 ‘북한산’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근거로 “18
세기 이래로”라고 했는지 알 수 없다. 뭔가를 주장하려면 우선 그 근거
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5)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이런 말이
나온다고 했다. “뜬구름 흐르고 해 떨어질 제 아득한 은하계로부터 중
국과 제주를 보았다고 했다.”(50쪽) 단적으로 삼각산 노적봉에 올라 제
주를 보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문헌 해석상으로도 그렇
고 현실적, 물리적으로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이다. 해당 구절
의 원문은 이렇다. “서남대해(西南大海), 원자청제(遠自靑齊), 부운낙일(浮雲
落日
)
, 은계망망(銀界茫茫)” 아마 “청제(靑齊)”라는 말에서 제주를 떠올렸을
8
동국여지비고
(東國輿地備攷), 제2편 ‘한성부(漢城府)’, 제3권 비고편.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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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한데, “청제”는 제(齊) 나라 땅인 청주(靑州), 곧 산동성 지역의 범칭으
로 쓰이던 말이다. 그러므로 저 구절은 대개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
‘서남쪽으로는 넓은 바다, 저 멀리엔 산동지방, 뜬구름과 지는 해에 은
세계를 이루었네.’
(6) 홍지문(弘智門) 옆 오간수문(五間水門)에 대해 설명하면서 “오간수문
이란 물 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물길로 몰래 출입하려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만든 수문”이라고 했다(109쪽). 여기서 ‘오간(五間)’이
라는 것은 ‘수문(水門)이 다섯 개’라는 뜻이다. 이로 보면 이 문은 기본적
으로 수문, 곧 물의 흐름을 막거나 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여닫을 수 있
게 만든 시설임을 알 수 있다. 임꺽정이 오수문을 통해 달아난 적이 있
어 거기에 철망을 씌운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수
문을 만든 원래의 목적이 ‘출입 통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의 목
적과 후대의 이용을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7) “인왕산을 인왕산이라 부른 것은 세종 때부터이다”라고 했는데
(150쪽)
, 그 근거가 궁금하다. 참고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뺷삼봉집
(三峯集)
뺸에 이런 말이 보인다. “겨울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했다. 공에게
명하여 대궐 자리를 정하게 하니, 중 무학(無學)이 인왕산을 주산(主山)으
로 하고, 백악산(白嶽山)을 좌청룡(左靑龍)으로 하고, 목멱산(木覔山)을 우백
호(右白虎)로 하려 하니, 공은 안 될 말이라고 반대했다.”
9
요컨대 세종(재
9
“冬, 定都漢陽. 命公相宅, 僧無學欲以仁王山作鎭, 白嶽木覓爲龍虎, 公難之.”(뺷三峯集뺸 제8권, 「附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69
위
1418~1450)
이전에도 인왕산이라는 말이 보인다는 것이다.10
(8) 정선(鄭敾, 1676~1759)의 「운리제성(雲裏帝城)」을 설명하면서 ‘제성’
을 “하늘의 도성”(187쪽)이라고 굳이 풀이해 넣은 것은 왜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제(帝)란 상재(上帝)로서 있는 글대로의 하늘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190쪽)라고 했는데, 천착인 것 같다. 문제는 이 문
장이다. “황제의 나라인 중국에서나 사용할 낱말인데 제후의 나라인 조
선의 도성에다가 그런 화제를 써 놓은 까닭도 궁금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최상단에 임금의 산인 백악산 대신 하늘을 배치하고 또 그 바로 아
래 궁궐이 아닌 민가를 배치해 두었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제
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황제의 도시’만을 배타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
니라 ‘임금이 사는 서울’, 곧 ‘도성’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관용적인 표
현인 것이다. 정선이 마치 ‘칭황제’의 숨은 뜻을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는 말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글에 “지주사(知奏事) 우공(于公)이
부귀를 누리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얻으려 하되, 제성(帝城)도 오히려
멀다 하여 마침내 제궐(帝闕) 곁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11라는 말이
보인다. 여기서 ‘제성’은 ‘제궐’과 대비되고 있다. ‘제궐’은 임금의 궁전
錄
」
, ‘事實’)
10
물론 뺷三峯集뺸이 처음 간행된 것은
1397(태조 6년) 정도전이 살아 있을 때였지만, 그 뒤
1465년(세조 11년) 그의 후 그의 증손에 의해서 6책이 중간되고, 다시 1486년(성종 17년)
8책으로 증보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인용한 텍스트가 어느 본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
11
“今知奏事于公居富貴之中, 致山水之美。以帝城猶謂之遠, 遂卜於帝闕之傍(뺷東國李相國全集뺸 제
23권,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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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창의문 천정의 봉황 그림
을 높여 부르는 말로 궁궐을 의미하니, ‘제성-제궐’은 곧 ‘도성-궁궐’
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제성’이 도성의 의미라면 그것을 그린 그림에
민가가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9) “혜화문 천장에는 다른 문과는 달리 봉황을 그려 놓았다. 다른 문
에는 용을 그렸는데 유독 여기에만 봉황을 앉혀두었는지 알 수는 없다”
라고 했다(263쪽). 그러나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 천장에도 봉황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그림 3>). “유독” 혜화문에만 그린 것은 아닌 것
이다. 왜 하필 봉황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다. 예를 들어 창의
문 주변 지세가 지네를 닮았기 때문에 봉황을 그려 지네를 죽이려 했다
든지 혜화문 주변에 새가
많아 그 기를 누르려고 봉
황을 그려 넣었다는 따위
인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
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봉황은 용과 더불어
임금의 상징이었다는 점
이다.
(10) “<동궐도>를 보면 청의정 앞마당처럼 보이는 모습의 논이 있는
데, 김희겸의 그림에는 논이 없다. 화폭을 구성함에 논이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라고 했다(254쪽). 청의정(淸漪亭) 앞의 논은 왕이 친경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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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김희겸,
「옥류천」,
종이에 수묵,17.5
✕24.3cm, 개인소장
례(親耕禮)를 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대략 3~4평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경
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창경
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서 “앞마
당처럼 보”인다고 한 것은 약간 과장된
것이다. 김희겸(金喜謙, ?~?)의 그림(<그
림
4>)
에서 청의정을 둘러싸고 있는 공
간이 바로 논이다. 논이 없다고 한 것
은 사실이 아니다. 친경례는 대단히 중
요한 행사인데, 그것을 행하는 장소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 논거가 부족하거나 누락된 주장
(1) 지금의 청와대 자리를 설명하면서, 곧 “삼각산 면악이 산의 모양
과 물의 형세가 옛 문헌에 부합한다”라는 1101년의 기록을 들었다
(70~71쪽).
그 기록은 뺷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뺸를 말하는데, 문제가 되는
말은 “옛 문헌에 부합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옛 문헌이란 뺷도
선비기(道詵秘記)뺸를 가리키는데 뺷도선비기뺸에는 ‘삼각산 면악’ 지대를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 했다”라고 했다. 뺷도선비기뺸는 원본이 사
라졌고,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인용한 부분만 남아 있다. 더구나 뺷고
려사절요뺸에서 말하는 “옛 문헌”이 곧 뺷도선비기뺸라는 증거는 그 어디
제28호
172
에도 없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야 한다.
(2) 대보름 답교(踏橋) 풍속을 말하면서 “조선에서는 중종 때 시작했
다”라고 했다(235쪽). 이렇게 단언을 하려면 반드시 근거를 제시해야 한
다. 풍습이라는 것이 어느 왕 시대 누구의 지시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
니라는 일반론에 따라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중종 대의 학자 어숙권(魚叔
權
)
이 지은 뺷패관잡기(稗官雜記)뺸에 이런 말이 나오기는 한다. “중종 말년
부터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보름날 저녁에 열두 개의
다리를 밟고 지나면 그 해 열두 달의 재앙이 소멸된다’고 했다.”
12
그런
데 이것이 답교놀이 자체의 시작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답교와 관련
된 속신이 생겨난 것을 말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답교는 고
려 때의 풍속인데, 다리 병을 물리친다. 항간에서는 하룻밤에 열두 다
리를 밟으면 열두 달의 재앙을 소멸시킨다고 한다”
13라는 전언도 엄연
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3) 만리창(萬里倉)을 설명하면서 “이 창고가 만리창이라 불리던 까닭
이 있다”라 하고, 그 근거로 최만리(崔萬理, ?~1445)가 그 동네에서 살았다
는 것을 들었다.
14(312쪽)
흔히 만리재[萬里峴]의 유래도 그렇게 설명한다.
12
“俗節雜戲’踏橋自中宗末年. 都中人相傳以爲, 上元夕踏過十二橋, 則消本年十二朔之災.”( 뺷燃藜室
記述
뺸 別集 제
12권, 「政敎典故」)
13
“‘上元雜事’ 踏橋麗俗, 以禳脚病. 諺所云, 一夜踏十二橋, 消十二月之灾.”(뺷林下筆記뺸 제34권, 「華
東玉糝編
」
)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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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만리가 거기에 살았던 것은 분명한데, 지명이 거기에서 유래
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뺷한경지략(漢京
識略
)
뺸에서 “만리재는 남대문 밖에 있는데, 개국 초에 부제학 최만리가
살던 곳이다”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보고,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요새 사람들이 두루 부르는 만리고개라는 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15라고 단정해서 말한 부분은 무시한다.
(4) “(<가고중류도>가) <도봉첩>과 같은 크기라는 사실이다. <도봉첩>
은 김석신의 <도봉도>가 포함되어 있는 서책이다”라고 했다(332쪽). 그
런데 단지 그림의 크기가 같다고 해서 같은 책에 실려 있었다고 단언하
기에는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저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렇다면
<가고중류도>는 저 <도봉도>와 같은 화첩에 묶여 있다가 뜯겨 나온 것
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잔치는 1805년(…)일 가능성도 있
다”라고 했다. “그렇다면”과 “그렇게 보면”이 연속해서 나오는 것은 마
뜩지 않다. 근거가 분명치 않거나 희박한데도 논지를 계속 전개해 나가
는 것은 좋게 말하면 추론이고 심하게 말하면 비약이다.
14
엄격하게 말하면
, 최만리가 거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곳의 고개를 ‘만리재’라고 한다는 말
이 있다고 한 것이지 만리창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
15
“萬里峴, 在南大門外, 卽國初, 副提學崔萬里所去也. 今人, 泛稱萬里峴者, 無意耳”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 뺷漢京識略뺸(서울사료총서 2), 1956, 311쪽.
제28호
174
3. 모호하거나 불충분한 서술
(1) ‘한양(漢陽)’을 “햇볕 드는 큰 땅”이라고 풀었다(16~17쪽). 맞는 말이
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이전에 그것은 ‘한수지양(漢水之陽)’, 곧 ‘한강
의 북쪽’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음을 먼저 밝혀야 한다. ‘양(陽)’은 북쪽을
가리킨다. 서울이 한강의 북쪽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햇볕이 잘 드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시 「임금이 지
으신 시에 화답하여[和御製詩韻]」라는 시에서 “개아문명한수양(開我文明漢水
陽
)
”을 “한강 언덕에 우리의 문명 열였다”라고 풀었는데, 시구 어디에도
‘언덕’이란 말은 없다. 여기서 ‘한수양’은 위에서 말한 ‘한수지양’을 줄인
말이다.
(2) 백악(白岳)의 소위 ‘정녀부인상(貞女夫人像)’과 권필(權韠, 1569~1612)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여신상(女神像)이 없어지게 된 것을 권필이 어릴 적
“신사의 주인이 여성이라는 것에 분개하여 그 초상화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65쪽). 권필의 이야기는 임방(任埅, 1640~1724)이 엮
은 뺷천예록(天倪錄)뺸에 나오는데, 이 책은 귀신, 신선, 요괴, 신선 등 기이
한 이야기들을 엮은 야담집이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이 책의
특정 내용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여신상이
없어진 문제는 유교와 무속의 길항 같은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16
16
참고로 이능화
(李能和)는 뺷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뺸에서 백악에 있던 사당을 ‘정녀부인
묘
(貞女夫人廟)’라고 했다(이재곤 역, 뺷조선무속고뺸, 동문선, 2002, 211쪽).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75
(3) 1783년부터 1790년까지 규장각(奎章閣)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으로 있었던 장시흥(張始興, ?~?)의 호는 방호자(方壺子)이다. 저자는 “(‘방호’
라는 글은
)
네모진 항아리란 뜻인데 이처럼 기이하여 알 수 없는 말을 제
것으로 삼는 인물이라면 특별한 세계를 갖춘 이였을 게다”라고 평가했
다(83쪽). 그런데 ‘방호’라는 말이 기이한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말”은 아니다. 방호는 신화 속에 나오는 선산(仙山)의 이름으로, 뺷열자(列
子
)
뺸에 “발해의 동쪽 바다에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다”
17라는 말이 나온다. 곧 ‘방호자’라
는 호는 장시흥이 갖고 있던 일종의 도선취향(道仙趣向)을 드러낸 것이다.
(4) 탕춘대(蕩春臺)를 설명하면서 “탕춘대는 방탕하다는 뜻 그대로”라
고 했다(100쪽). 그런데 ‘탕(蕩)’은 ‘방탕’이라는 뜻도 있지만, ‘호탕(浩蕩)’처
럼 ‘넓고 크다’는 의미도 아울러 있다. 참고로 ‘탕춘대’의 뜻에 가장 부합
하는 것으로 이색(李穡, 1328~1396)의 시구 중 ‘호탕춘풍(浩蕩春風)’을 들 수
있겠다. 참고로 이 구절은 이색의 「서경의 이동수를 생각하다[憶西京李東
秀
]
」라는 시의 마지막 연인 결구에 나온다. “독칠방에 종유하던 친구는
이미 묘연해지고, 송정엔 푸른 풀만 차가운 연기에 잠겼어라. 인간은
잠깐 사이에 언뜻 고금을 이루는데, 광대한 봄바람이 또 한 해를 시작
하였네.”
18
다의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나 용어를 한 가지로만 좁혀보아
서는 온당한 해석이 나올 수 없을뿐더러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17
“渤海之東有五山焉, 一曰岱輿, 二曰員嶠, 三曰方壺, 四曰瀛洲, 五曰蓬萊.”(뺷列子뺸, 「湯問」)
18
“獨七同游已渺然, 松亭碧草鎖寒煙, 人間俯仰成今古, 浩蕩春風又一年”(임정기 역, 한국고전종
합
DB, 2001)
제28호
176
(5) 홍지문(弘智門)을 설명하면서 “왜 ‘넓은 지혜’라는 뜻의 홍지(弘智)
라고 지었는지 알 수 없다”라 하고, 이어서 “다만 병자호란과 같은 오랑
캐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슬기로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짐
작한다”라고 했다(114쪽). 그런데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후시부(後市
部
)
8방은 모두 지(智) 자로 부른다. 서쪽 3방은 광지방(廣智坊), 계지방(啓
智坊
)
, 양지방(養智坊)이라 하고, 동쪽 3방은 대지방(大智坊), 현지방(顯智坊),
홍지방(弘智坊)이라 하며, 오른쪽 1방은 익지방(益智坊), 왼쪽 1방은 영지
방(永智坊)이라 한다.”
19
이런 용례는이미 중종 25년(1530)에 나온 뺷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뺸에 나온다. ‘전생서(典牲署)’를 설명하면서
“목멱산(木覓山) 남쪽, 남부 둔지방(屯智坊)에 있는데, 희생(犧牲)을 기르는
일을 맡는다”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智)’ 자를 병자호
란과 연결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6)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 그린 「사일동(四一洞)」에서 ‘사일(四一)’
이라는 지명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130~131쪽). 그런데 한 가지
힌트가 있다.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가 남긴 시 「유진사의
사일첩에 차운하여[次柳進士光鎭四一帖韻]」에 딸린 설명 “유진사는 유광진
19
“後市部八坊,皆以智爲號. 其西三坊曰廣智坊, 啓智坊, 養智坊, 其東三坊曰大智坊, 顯智坊, 弘智
坊
. 右一坊曰益智坊, 左一坊曰永智坊.”(뺷經世遺表뺸 卷三, 「天官修制」 ‘三班官制’) 참고로 ‘후시
(後市)’는 대궐을 지을 때 조정을 궁궐의 전면에, 시장은 후면에 두었다는, 중국의 도성 조
영 원칙인
‘전조후시(前朝後市)’를 따른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개국 초에는 궁궐 뒤
쪽에 시장을 두었으나
, 산세가 높아 시장으로 삼기는 적절치 않아 후에 종로통으로 옮겼
다
. ‘전조후시’와 짝이 되는 도성 조영 원칙은 ‘좌조우사(左祖右社)’, 곧 사직단은 궁궐의
우측에
, 종묘는 좌측에 둔다는 것인바, 이것은 정확히 지켰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77
(柳光鎭)
이다. ‘사일’은 시(詩), 글씨, 바둑, 술이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 시는 이렇다.
세인은 모두 명리에 마음이 끌리지만
世人煕穰摠嬰情
이 노인의 심신은 홀로 청청하여라
此老身心獨也淸
시로 흥을 달래니 깊은 시름 사라지고
憑詩遣興幽愁失
술로 가슴 씻으매 불평한 마음 가시네
須酒澆胷磊隗平
한가하고 바쁜 세월은 글씨 쓰느라 모두 보내고
閒忙閱盡書中劫
바둑판의 승패는 판국 밖의 평에 맡겨두었네
勝敗從他局外評
사일이란 말이 육일과 흡사하니
四一還如六一號
전생에 바로 구양수가 아니셨던지
廬陵無乃是前生
20
이 시 3구에서는 시를, 4구에서는 술을, 5구에서는 글씨를, 6구에서
는 바둑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7구에서는 이 “사일이 육일과 흡사하다”
라고 했다. 여기서 ‘육일(六一)’은 구양수(歐陽脩)의 별호인데, ‘육일’이란
장서(藏書) 1만 권, 집고록(集古錄) 1천 권, 거문고 1장(張), 바둑 1국(局), 술
1호(壺), 그리고 늙은 자신 1인을 합해서 붙인 호칭이다. 1729년에 태어
나 서울에 거주하였고, 정조 때 여러 과거에서 합격한 진주 유씨 유광
진에 대해 찾아보면 어떤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소임 중 하나이다.
20
뺷無名子集뺸
, 「詩藁」 제4책(한국고전종합DB, 이규필 역, 2014).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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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년대,
비단에 연한색, 27.5
✕33.5cm, 개인 소장
(7) 임득명(林得明, 1767~1822)의 「등고상화(登高賞華)」를 설명하면서 “분
홍색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버드나무에 연둣빛 싱그러움이 먹물
과 어울려 퍼져나가는 게 눈부시게 황홀하다”라고 했다(169쪽). 그런데
‘분홍색 꽃’이라고 한 것은 무슨 꽃인가? 길게 따져볼 필요 없다. 복숭아
꽃과 살구꽃이다. 그림의 소재가 된 동네 이름이 도화동(桃花洞)이다. 유
득공(柳得恭, 1748~1807)은 뺷경도잡지(京都雜志)뺸에서 살구꽃 핀 필운대를
유상처(遊賞處)라고 했다.
21
보다 자세한 것은 정선(鄭敾, 1676~1759)의 「필
운대상춘(弼雲臺賞春)」(<그림 5>)을
보면 된다. 사람들이 필운대에
올라 화사하게 핀 복숭아꽃과
살구꽃을 내려다보고 있다. ‘연
둣빛’은 버드나무라고 특정하면
서, ‘분홍색 꽃잎’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은
적절치 않다.
(8) 1760년의 청계천 준설작업을 축하한 장면을 기록한 「영화당친
림사선도(暎花堂親臨賜膳圖)」를 설명하면서 “왼쪽으로 치솟은 한 그루 소
21
참고로 뺷경도잡지뺸 「유상
(遊賞)」을 소개하면서 “한양 오대 명승”(177쪽)이라 한 것은 잘
못이다
. ‘유상’은 봄철 소풍 가기 좋은 곳을 말한다. 더구나 언급된 장소를 나열하면서 제
일 앞에 나오는
“필운대의 살구꽃”을 제일 아래에다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고
칠 하등의 이유가 없다
.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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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영화당친림사선도>(
샙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샚),
각 폭 34
✕44cm,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나무와 오른쪽으로 용을
그린 교룡기가 길게 펄럭
여 군주의 위용이 아름답
다”라고 했다(246쪽). 그런
데 그림(<그림 6>)에서 왼
편의 소나무는 두 그루이
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한 그루든 두 그루든 소나
무가 “군주의 위용”과 어
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지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2
(9)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포구 이름이 버들나루라는 뜻의 양진(楊津)
이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넓은 나루라는 뜻의 광진(廣津)으로 바뀌
었던 것도 바로 물량이 크게 늘어났음을 드러낸다”라고 했다(321쪽).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양진’에서 ‘광진’으
로 바뀌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 성장으로 인한 물량 증가가
그 변화에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명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여러 문헌에는 ‘광진’과 ‘양진’이 함께 쓰
였다.
23
그리고 왕조의 교체로 경제가 하루아침에 성장하는 것은 아닐
22
참고로 교룡기 맞은편에 있는 붉은 보자기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
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
23
뺷조선왕조실록뺸에서
‘양진(楊津)’을 검색해 보니 총 88번 나오고, ‘광진(廣津)’은 총 78번
나온다
(한국고전종합DB). 조선 시대 두 말이 같이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28호
180
것이다. 광진이라는 말은 나루가 넓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한강의 폭
이 대단히 넓은 곳에 위치한 나루라는 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너븐나루’라는 말은 그런 점을 반영한 것이고,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광진’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10) “세종 때 우뚝 솟았다는 뜻의 아차(峨嵯)라는 한자말로 바꿔 쓰기
시작했는데 왜 그렇게 바꿨는지 그 까닭은 알 수 없다”라고 했다(321쪽).
‘아차’라는 말이 세종 때 작성하기 시작한 뺷고려사(高麗史)뺸에 처음 나오
니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아차산은 ‘아단(阿旦)’, ‘아차(阿次),
’아차(阿且)’, ‘아조(阿朝)’, ‘아달(阿嵯)’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태조 이
성계의 이름이 단(旦)이므로 피휘(避諱)로 ‘아단’ 대신에 ‘아차’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아단’ 이외에도 ‘아조’니 ‘아달’이니 하는 말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혼용되고 있었던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아단’, ‘아조’, ‘아달’ 같은 말들이 ‘아차(峨嵯)’로 바뀐
것은 역사를 새로 쓰면서 혼란을 정리하려는 의도에서였는지 모른다
는 것이다. 실제로 아차산은 요충지일 뿐 아니라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산맥의 끝을 이루면서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형상을 이루는
데, 그런 점을 고려해 ‘우뚝 솟았다’는 뜻의 ‘아차(峨嵯)’라는 말로 통일하
여 쓴 것이 아닌가 한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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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정선,
「수문천석」, 종이에 수묵, 50✕37cm, 개인 소장
4. 자의적인 해석
(1) 고려 때의 남경 궁궐터인 “빈터에 서현정, 취로정, 관저정, 충순
당과 같은 누각을 세우고서 상림원이라는 후원으로 조성했다”라고 하
면서, “고려의 궁궐을 놀이터로 바”꾸었다고 비난했다. 더구나 그것은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워 유원지로 만든 것처럼 “역사를 모독하
는 것”이라고 힐난했다(71쪽). 그런데 단적으로 말해서 여러 누각과 상
림원 같은 후원을 “놀이터”라고 단정해도 좋은지 모르겠다. 상림원(上林
園
)
은 세조 12년(1466) 1월에 장원서(掌苑署)로 바뀌었는데, 장원서는 대
궐의 금수(禽獸)를 기르던 동산과 화초(花草), 과수(果樹)에 관한 일을 관장
하던 관청을 말한다. 이런 것을 한마디로 “놀이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이다. 그렇게 단정을 해버리니, 그것을 곧장 일제의 만행과 동궤의 것
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2) 정선(鄭敾, 1676~1759)의 「수문천석(水門川石)」(<그림 7>)에는 초가와
인물 셋이 보이는데, 그들이
“초가 주인을 방문하러 오는
길이다”(114쪽)라고 단정할 근
거는 없다. 나아가 정선의 「백
운동(白雲洞)」을 설명하면서 “궁
궐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하
기 위해 나귀 타고 나서는 선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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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정선,
「인왕제색」, 종이에 수묵, 79.2✕138.2cm, 국보 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비”(128쪽)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중궁 조회에 참석하려 한다
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림 설명에 평자의 해석이 개입
할 수밖에 없겠지만, 최소한의 근거는 제시해야 한다.
(3) “<인왕제색도> 화폭 오른쪽 하단 소나무 숲에 절반이 가려진 채
그려진 아담한 기와집은 어쩌면 심환지가 살았던 집일 수도 있다”라고
했다(155쪽). 그림을 가만히 보면, 그것은 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막
같아 보인다. 「인왕제색(仁王霽色)」(그림 8)에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제발(題跋)을 썼다.
삼각산 봄 구름이 비를 넉넉히 보내
華岳春雲送雨餘
만 그루 푸른 소나무 그윽한 거처를 둘렀는데
萬松蒼潤帶幽廬
주인 늙은이 깊은 휘장 아래 앉아
主翁定在深帷下
혼자서 뺷주역뺸의 하도와 낙서를 어루만지네
獨玩河圖及洛書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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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인왕제색」을 그린 것은 1751년이고, 심환지가 이 제발을 쓴
것은 1802년이다. 여기서 ‘주인 늙은이’는 정선이라고 봐야 한다. 정선
은 뺷주역뺸에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24
결정적으로는 이 시에 ‘휘장[帷]’
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앞에 나오는 ‘려(廬)’는 자기 집을 낮추어 말하기
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집이라기보다는 임시거처 같은 것이다. 이렇
게 보면, 이 시의 결구를 놓고 “(심환지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하도
와 낙서에 담겨 있는 미래의 운명을 헤아렸다”라고 한 것은 실제에 부
합하지 않을뿐더러 과도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4) “일제가 창덕궁을 비원(秘苑)으로 격하한 뒤”라고 했다(214쪽). 궁
궐의 후원을 부르는 말로 상원(上苑), 금원(禁苑), 비원(秘苑), 내원(內苑) 등
이 오래전부터 쓰였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곳에서 경덕궁을 경희궁으
로 바꾼 사연을 설명하면서 “인조의 후예들이 광해 왕의 기억을 지우려
고 벌인 소동”이라 했는데, 야사에서나 봄직한 이야기다. 이것은 그저
피휘(避諱), 곧 국왕, 조상, 성인이 쓰는 이름, 국호, 연호와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경덕(慶德)’은 인조(仁祖)의 아버
지 원종(元宗)의 시호(諡號)였다. “일제가 창덕궁을 비원으로 격하”했다
고 잘못 지적한 데서 더 나아가 그것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훼손했던
일과 다를 바 없다”라고 한 것은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24
김은경
, 「겸재(謙齋) 정선(鄭敾) 회화(繪畵)의 주역미학적(周易美學的) 이해(理解)」, 뺷동양
예술뺸
14, 한국동양예술학회, 2009.
제28호
184
(5) 「비변사문무낭관계회도(備邊司文武郎官契會圖)」를 설명하면서 “화면
중단 오른쪽의 건물이 비변사 건물로 그 뒤편에 있어야 할 창덕궁은
화면 밖으로 빼버렸다. 돈화문의 위용이 자칫 비변사의 모습을 짓누를
지 모르니 배치를 바꿔 버린 것이다”라고 했다(258쪽). 우선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특정 관청을 강조하려고 궁궐의 대문을 빼버리고 배치를
바꾸었다는 설명이다. 단적으로 말해 왕조 사회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실제 관측해 보아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비변사의 대청을
정면에서 그리면 돈화문은 시야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
이다.
(6) 「목장지도(牧場地圖)」 편찬을 주도한 허목(許穆, 1595~1682)에 대해
설명하면서 “중국이 아닌 독립된 조선 중심의 세계관을 지닌 인물”이라
했다(277쪽).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17세기 후반에 “독립된 조선 중심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지은 “뺷동사뺸를 보면
일본을 조선의 제후국으로 편제”했는데, 그것은 “조선 중심의 세계질
서”를 내세운 것이라 평가했다. 뺷동사(東事)뺸가 일본의 역사를 한국 역
사의 방계로 보고 말갈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조선 중심의 세계질서”를 천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7) 이기룡(李起龍, 1600~?)의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그림 9>)를 설명
하면서, “버드나무 잎사귀를 보면 모두 열한 개의 덩어리다. 여기에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85
<그림 9> 이기룡,
「남지기로회도」(부분), 보물 866호, 1629년,
비단에 채색, 116.6
✕72.4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 10> 신윤복,
「주유청강」,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가 오른쪽 상단 멀리 구름 밖에 활엽수 한 덩어리가 있다. 그 잎사귀 덩
어리 숫자가 모두 열두 개다. 이는 참석한 사람 열두 명과 숫자가 일치
한다. 그런데 왜 한 덩어리는 버드나무가 아니라 활엽수로 했을까? 그
것은 열두 명 가운데 아직 일흔 살이 안 된 인물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311쪽). 우선 “잎사귀 덩어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
는데, 오른쪽 상단 활엽수
의 “잎사귀 덩어리 숫자”가
12개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뿐더러 11개라고 한
버드나무의 “잎사귀 덩어
리”는 세어보니 총 12개이
다. 이 관찰이 맞는다면 저
설명은 작위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8) 신윤복(申潤福, 1758~?)
의 「주유청강(舟遊淸江)」(<그
림
10>)
을 설명하면서 그 배
경이 “두포(정확히는 지하철 옥
수역 앞 포구
)
”일 것이라고 했
다(336쪽). 그런데 이 그림에
는 바위만 보일 뿐 특정 지
제28호
186
<그림 11> 김석신,
「압구청상」, 23.5✕30.9cm,
종이에 수묵, 선문대학박물관 소장
역을 말해주는 근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이다. “중년 인물의 찌푸린 눈길과 사공의 비웃음을 통해 탐
욕에 빠진 두 청년을 비판하고 있다”라고 했다. 해석은 감상자 각자의
몫이니 뭐라 하기는 어렵지만, 필자가 보기에 두 사람은 찌푸리거나 비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저자가 저 “탐욕에 빠진 두 청년”을 강조하
자니 그렇게 부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림의 화제 곧, “늦바람 탓에
피리소리 들을 수 없고, 꽃물결 따라 흰 갈매기가 나른다(一笛晩風聽不得,
白驅飛下浪花前
)
”라고 한 데서 “색욕 탓에 예술을 밀어내버린다는 뜻”을 읽
어내고, 나아가 그것이 “화가의 주장”이라고 한 것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화원인 신윤복이 그런 비판을 감행하려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바위가 흥미롭다고 하면서 그
것을 “인간의 욕망을 그렇게 형상화한
것으로 탐욕이란 끝이 없음을 보여주
고 싶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대단히 희박한 하나의 주장일 뿐이다.
(9) 김석신(金碩臣, 1758~?)의 「압구청상
(狎鷗淸賞)
」(<그림 11>)을 설명하면서 “그림
의 붓질이 거칠고 건물은 기울어 불안하
며 분위기는 스산한 데다 화면은 꽉 차
서 욕망이 덩어리째 치솟아 오르는 구
도다. 어쩌면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릴 때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87
<그림 13> 화성성묘전배도, 비단에 채색,
151.5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12> 장시흥,
「노량진」, 지본담채,
21.5
✕17cm, 고려대박물관 소장
한명회의 탐욕과 죄악 그리고 그 한명
회에 의해 핍박을 받았던 사람들을 떠
올렸는지도 모르겠다”라고 했다(347쪽).
한명회(韓明澮, 1415~1487)라는 인간의 부
정적인 측면을 그림에 억지로 맞추려다
보니 이런 거친 설명이 생긴 것 같다. 다
른 것은 그렇다 쳐도 이 그림의 제목이
「압구청상」인바, ‘청상(淸賞)’은 맑게 감
상한다는 말이다. 참고로 압구정의 아
름다움에 반해서 정선은 압구정을 두
번이나 그렸다.
(10) 조선 후기 화가 장시흥(?~?)의
「노량진(鷺梁津)」(<그림 12>)을 설명하면
서 “바람조차 잠든 날의 화폭임에도 다
섯 그루 버드나무가 폭풍우 만나 쓰러
질 듯 휘청거린다. 화가가 그릴 당시
박팽년, 유응부, 이개 세 사람과 성삼문
부자 두 사람 하여 모두 다섯 무덤만 있
었으므로 모진 바람 견디는 다섯 그루
만 그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했
다(369쪽). 버드나무는 속성상 흐느적거
제28호
188
리기 마련인데, 그것을 휘청거린다고 한 것은 저자의 주관이 개입한
결과로 보인다. 같은 장소를 그린 「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 8폭 중
제1폭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그림 13>)를 보면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져 있다. 더구나 장시흥이 「노량진」을 그린 18세기는
이미 다섯 무덤 위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창건하고, 그곳을 소위 ‘국가
공인묘역’으로 승격시킨 뒤다.
5. 기타
(1) 그림 사이즈를 표시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대개
의 경우 ‘가로✕세로cm’로 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그림들에
서는 이런 원칙(?)을 지켰는데, 유독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의 「북악십
경첩(北岳十景帖)」에서만 ‘세로✕가로cm’로 표기한바(108쪽), 일관성이 없
어 보인다.
25
(2) ‘괴단(槐壇)’을 “홰나무 아래 쌓아올린 괴단”(143쪽)이라고 한 것은
중복이다. ‘괴단’이라는 말이 이미 ‘홰나무 (아래 쌓아올린) 단’의 뜻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뺷훈몽자회(訓蒙字會)뺸에서는 “괴槐 회홧괴”라 했고,
뺷물명고(物名攷)뺸에서는 “槐는 懷와 같다”라고 했다. ‘괴(槐)’는 보통 회화
나무라고 부른다.
25
참고로 인터넷상에 떠도는 자료나 책에 표시된 그림 사이즈 정보는 대단히 불규칙하고
들쑥날쑥하다
. 가능하면 소장처에서 제시한 원본의 정보를 찾아 부기하는 것이 좋겠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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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선(鄭敾, 1676~1759)이 「인왕제색(仁王霽色)」를 그릴 때 지금의 국
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바라본 풍경을 그렸다고 했다(152쪽).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인왕산이 너무 가깝다.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
울관 자리에서 인왕산을 바라본다면 훨씬 더 원경이 잡혔을 것이다. 그
사이에 경복궁이 있기 때문이다.
(4) “(윤덕영을) 고종을 독살한 주역”이라 했다(165쪽). 이른바 ‘고종독
살설’은 아직은 하나의 가설이다.
(5) “노란색 초립모자를 쓴 이들은 선전관이다”라고 했다(216쪽). 그
러나 노란색 초립은 별감의 치장이다.
26
선전관은 대신 공작우(孔雀羽)
를 꽂았다.
27
(6) 세종을 광화문에 앉혀 놓은 것을 두고 “왕을 길바닥에 버려둔 꼴
이다. 왕의 처지에 비바람, 눈보라를 흠씬 맞으며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216~217쪽). 왕에 대한 충성심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
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세종 동상 대신에 “태조 이성계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고 했는데, 이성계도 왕이다. 근대의 건축물인 동상에 대
26
“각 전(殿)과 궁(宮)의 별감(別監)과 사복내외시(司僕內外寺), 거달(巨達)과 내취(內吹) 등
이 착용
(着用)하는 황초립(黃草笠).”(뺷萬機要覽뺸, 「財用」, ‘戶曹各掌事例’ 別例房)
27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신하들로 말하면 머리에는 호수(虎鬚), 공작우(孔雀羽), 영우(嶺
羽
), 방우(傍羽)를 꽂고(隨駕諸臣言之, 頭揷虎鬚, 孔雀羽, 嶺羽傍羽…)”(뺷弘齋全書뺸 제33권,
「敎」
, ‘園幸時所御服色, 依溫幸時例, 陪從諸臣服色, 可合省除者詢問敎’) 여기서 ‘어가를 수행하
는 신하
’가 선전관이다.
제28호
190
<그림 14> 강희언,
「북궐조무」, 지본수묵담채,
26.5
✕ 21.5cm, 개인 소장
한 생각도 좀 바꿀 때가 되었다고 본다. 굳이 세운다면 그 주인공이 반
드시 지배자일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다.
(7) 창덕궁 앞거리를 그린 강희언(姜熙彦, 1738~?)의 「북궐조무(北闕朝
霧
)
」(<그림 14>)를 그동안 경북궁 앞 육조거리라고 본 모양이다(235쪽).
‘북궐(北闕)’이라는 말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북궐’이란 말은 동궐과 서
궐에 대하여 말할 때 경복궁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 ‘임
금이 사는 궁궐’을 지칭한다. 그래서 ‘남면(南面)’이란 말이 성립한다. ‘남
면’은 임금의 자리에 오르거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북면(北面)한 신하’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내내
저 그림을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묘사한 것이라고 여겨왔다가 어
느 건축학자가 바로잡았다고 하
는 설명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저기 보이는 문은
돈화문이지 광화문이 아니다.
더구나 육조거리에 초가가 즐비
한 것은 더더욱 이상하지 않은
가. ‘북궐’이라는 말에 대한 몰이
해가 그렇게 오랫동안 잘못을
승인해온 것으로 보인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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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택징(李澤徵, 1715~1782)이 규장각의 비대화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1781년이라고 했는데(242쪽) 1782년이다. 참고로 이택징은
정조에게 스스로 훌륭하다 여기지 말고 훌륭한 방도를 힘쓰라
28고 직
언을 서슴지 않던 사람인데, 그를 “한 신하”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참고로 이택징은 모반사건으로 처형당했는데, 정조 앞에서 스
스로를 ‘신’으로 칭하지 않고 ‘나’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桀紂) 같은 폭군
이라 주장하며 탕무(湯武)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다
는 주장을 한 사람이다.
(9) 허균이 동묘(東廟)를 찬양한 시 한 구절을 “우리 동쪽 되찾아주셨
기에”라고 옮겼다(274쪽). 원문은 ‘중존오동(重尊吾東)’이다. ‘오동’을 “우리
동쪽”이라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나라’라고 풀어야 한다.
(10) “강희맹은 <저자십영(楮子十詠)>을 따로 지어 그 아름다움을 특별
히 노래하였는데, ‘긴 시내 할퀸 언덕에 선 바위’라고 멋지게 묘사한 바
있다”라고 했다(332쪽). 그런데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문집인 뺷사숙
재집(私淑齋集)뺸에서 「저자십영」이라는 시는 찾을 수 없다. “따로 지어”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문집이 아닌 다른 데에 들어 있다는 말 같은데, 그
렇다면 그 출전을 밝히는 것이 좋다.
(11) 김석신(金碩臣, 1758~?)의 「가고중류(笳鼓中流)」를 설명하면서 “배
28
“毋或自聖, 而益勉爲聖之道焉.”(뺷正祖實錄뺸, 정조 6년 5월 26일)
제28호
192
두 척을 나란히 띄워 모두 서른 명이 풍류를 누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출했다”라고 했다(332쪽). 서른 명이라고 한 것은 배에 탄 인원 전체를
말한다. 뱃사공이나 시동 같은 사람들이야 풍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었을 테니, 굳이 “풍류를 누리는” 인원수를 꼭집어 말하
려면, 그들은 빼는 것이 좋겠다.
(12) “남한강이 한양의 강으로 바뀐다고 하여 여기서부터는 경강(京
江
)
이라고 불렀다. 또는 북한산(삼각산), 다시 말해 큰 산 아래 강물이라
하여 한산하(漢山河)라고도 하였다”라고 했다(334쪽). 그런데 ‘한산하’는
‘한산주(漢山州)를 흐르는 강’이라는 말이다. 한산주는 삼국통일 직후에
완성된 이른바 신라 구주(九州)의 하나로 백제 땅에 설치한 지방 행정구
역의 하나이다. 이후 남한산주로 고쳤다가 경덕왕 15년(756)에 한주(漢
州
)
로 개칭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는 광주(廣州)로 통칭되던 지역이다.
(13) 약수동과 옥수동 물이 좋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나 물이 좋았
으므로 정부는 이곳에 얼음을 저장하는 고의 하나인 동빙고를 설치했
다”라고 했다(341쪽). 요즘 보면 거기가 거기처럼 가까운 거리지만 옥(약)
수동과 동빙고의 거리는 대략 5km 이상이다. 그런 거리를 “이곳에”라
고 하여 마치 같은 공간인 양 처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물론 지금 동
빙고는 옥수동 8번지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한양을 가로지르는 숭례문
(남대문)
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의 거리가 4km이다. 덧붙이자면 동빙
고를 설명하면서 “이곳에는 얼음시장이 있었다. 관청에서 얼음을 채취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93
하고 남은 것을 민간에서 파내 팔다 보니 그러했다”라고 했다(335쪽). 정
확하게 말하면, 동빙고의 얼음은 나라 제사용으로 썼고, 서빙고의 얼음
은 식용으로 썼는데, 일부 양반과 서민들도 쓸 수 있었다.
(14) 정선(鄭敾, 1676~1759)의 「행호관어(杏湖觀漁)」에 들어 있는 이병연(李
秉淵
, 1671~1751)
의 제시(題詩)를 풀이하면서,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그
물을 행호 밖에서 잃겠구나”라고 풀이했다(403쪽). 원문은 “도화작창래
(桃花作漲來)
, 망일행호외(網逸杏湖外)”이다. 마지막 구절은 ‘웅어나 복어가
많이 잡혀 그물이 강물 속으로 잠길 정도’라는 뜻이다. 봄철이면 여기에
사옹원(司饔院)에서 어소(魚所)를 두고 진상을 했다.
29
특히 웅어를 잡아 바
치는 일을 맡은 위어소(葦魚所)를 설치했다. 저자는 “권세가의 입맛을 만
족케 했다”라고 했는데, 그에 앞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순서이다.
Ⅲ. 나가며
우리는 연전에 유홍준이 뺷나의 문화유산답사기뺸가 일으킨, 가히 ‘광
풍’이라 할 만한 현상을 목도한 바 있다. 그가 답사의 열풍을 불러일으
키고 우리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문화유산 전반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
29
“제어(鯷魚)는 속명이 위어(葦魚)로 한강 하류 행주에서 난다. 늦은 봄과 초여름에 사옹원
(司饔院) 관리들이 그물로 잡아 임금에게 진상한다(鯷魚俗名葦魚, 産於漢江下流幸州. 春末夏
初
, 司饔院官網捕進貢).”(뺷京都雜志뺸, 「風俗」 ‘酒食’) 제어니 위어니 하는 것은 오늘날의 웅어
를 말한다
.
제28호
194
인 것은 높이 사고도 남을 일이다. “성숙한 균형감각”
30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와는 다른 면
도 엄연히 존재한다. 논의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 있다거
나 “학술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면서도 막상 학술적인 오류를 분석한 글
은 적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31
지금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자는 것이 아니다. 대유행을 탄
‘답사기’에 대해 면밀하고도 정확한 비판을 수행하지 않고 칭송이나 험
담에 만족함으로써 학문적으로나 교양적으로 많은 문제를 남겼다는
점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러한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뺷옛 그림으로 본 서
울뺸이 제2의 답사기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이미 그 조짐
이 확연해 보인다. 2020년 4월 책이 출간되자마자 도하 굴지의 언론사
들이 화답이나 하듯이 줄줄이 서평을 낸 바 있다. 2020년 4월 2일 문화
일보를 시작으로 3일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4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7일 경향신문, 11일 국민일보, 18일 세계일보가 서평을 냈다.
물론 전부 상찬하는 내용이다. 어느 신문 하나 오류를 지적하고 우려한
곳은 없었다. 이런 판세를 타고 급기야 10월 문재인 대통령이 “모처럼
좋은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로 시작되는 독후감을 SNS에 발표하게 되
면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술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30
정호웅
, 「성숙한 균형감각」, 뺷창작과비평뺸 21, 1993, 410~413쪽.
31
김민정
, 「余秋雨 문화산문과 余秋雨 비판붐에 관한 단상: 유홍준과의 비교를 통한 韓中 두
나라의 문화현상 고찰」
, 뺷中國文學뺸 39, 韓國中國語文學會, 2003, 253쪽.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195
도 정작 학술적인 깊이 혹은 정밀성은 떨어지고 있는 현실, 그리고 교
양서임을 내세워 학술적 엄밀성을 피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
술서로서의 위상을 점유하고 싶어하는 욕구에 대해서이다. 대중교양
서를 표방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폭넓게 확보하는 한편 학술서로서의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그 권위와 위상을 제고하려 하지만 학적 엄밀성
을 담보하지 않는 글쓰기는 어느 쪽에도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발 빠르고 정확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졸문
으로 우선 첫발을 딛게 되었다. 앞으로 생산적인 토론의 자리가 마련되
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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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자료
뺷京都雜志뺸
뺷經世遺表뺸
뺷東國李相國全集뺸
뺷萬機要覽뺸
뺷無名子集뺸
뺷三峯集뺸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뺷燃藜室記述뺸
뺷列子뺸
뺷林下筆記뺸
뺷弘齋全書뺸
논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 뺷漢京識略뺸(서울사료총서 2), 1956.
정호웅
, 「성숙한 균형감각」,뺷창작과비평뺸 21, 1993.
이능화
, 이재곤 역, 뺷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뺸, 동문선, 2002.
김민정
, 「余秋雨 문화산문과 余秋雨 비판붐에 관한 단상: 유홍준과의 비교를 통한 韓中
두 나라의 문화현상 고찰」
, 뺷中國文學뺸 39, 韓國中國語文學會, 2003.
김은경
, 「겸재(謙齋) 정선(鄭敾) 회화(繪畵)의 주역미학적(周易美學的) 이해(理解)」,
뺷동양예술뺸
14, 한국동양예술학회, 2009.
학술서와 대중교양서의 경계 문제
-최열의 뺷옛 그림으로 본 서울뺸(2020)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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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투고일 : 2021.08.25. 심사 완료일 : 2021.11.16 게재 확정일 : 2021.11.17
Abstract
The Problem of Boundary between Academic Books and Popular
Liberal Arts Books
Focusing on Writing(2020) by Choe Yeol
Jin, Kyung-Hwan Professor of National University of Cultural Heritage
What we want to elucidate is that, while raising an academic problem, the academic
depth or precision is falling, and the desire to occupy the status as an academic book
while avoiding the academic rigor by claiming that it is a liberal arts book. While claim-
ing to be a popular liberal arts book, it seeks to secure wide public interest and enhance
its authority and status by emphasizing its aspect as an academic book, but writing that
does not guarantee academic rigor is of no benefit to either side.
As a result of the review, several problems were found, such as incorrect presentation
of facts, vague or insufficient descriptions, insufficient or omission of arguments, cases
of arbitrary interpretation, and others.
keywords : Liberal arts books, Academic books, Insufficient arguments, Arbitrary
interpretation, Ambiguous information, Academic rig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