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문서한국전통문화연구_30호_탑재본-손환일.pdf

닫기

background image

7

한국 벼루의 연석(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손환일*

1

I.

머리말

II. 연석(硯石)의 조건과 석질(石質)의 특성

1. 연석(硯石)의 조건(條件)
2. 석질(石質)의 특성(特性) 

III. 연석의 산지(産地) 

1. 오석산지
2. 자석산지
3. 녹석산지 

IV. 벼루장
V. 맺음말

국문초록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벼루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석재이어야 한다. 그래서 

벼루는 무엇보다도 석질이 가장 중요하다. 즉 석질에 은사가 많아야 먹이 잘 갈리

고, 은사가 고와야 먹물이 맑다. 그리고 석질이 단단해야 먹물이 잘 마르지 않는다. 

연석에는 오석, 자석, 녹석 등이 있다. 문헌에 기록된 연석의 대표적인 산지로 오

석산지는 남포, 종성 등이 있고, 자석산지는 위원, 정선, 진천(상산), 단양, 안동 

등이 있으며, 녹석산지는 송화강, 대동강, 해주, 울주, 언양 등이 대표적이다. 

벼루를 만드는 연석에는 은사(銀砂)나 금사(金砂)라는 석영질(Chert)이 섞여

있다. 먹은 이 석영질에 갈리는 것이며, 조흔색이 흰색은 백운모의 은사(銀沙)이

고, 누른빛은 흑운모의 금사(金沙)이다. 석영질인 은사가 봉망(鋒芒)을 형성하고 

봉망(鋒芒)에 의하여 먹이 갈리는 것이다. 은사나 금사의 분포형태에 따라 운문

(

雲紋), 

산문(散紋), 사문(絲紋) 등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문양에 따라 석란문, 

*

서화문화연구소 소장.


background image

 제30호

8

혹은 아란문(鵝卵紋), 화초문(花草紋) 등으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벼루장은 정철조(鄭喆祚, 1730~1781)를 이은 홍성의 김도산(金道山, 

18

세기 중기~19세기 초기)과, 남포의 신경록(申慶祿, 1779~1841)이 있으며, 지

역을 알 수 없는 방효량(方孝良, ?~1823), 채정묵(蔡定默, 1835~1876), 종성의 

김영수(金榮洙) 등이 있다. 근대 벼루장은 보령 남포의 송병요(1876~1935)가 대

표적이다. 송병요(1876~1935)의 뒤를 이은 김형수(1880~1948), 신철휴(申喆

休, 1892~1954), 

김갑룡(1904~1972), 노장성(盧長星, 1904~1973)과 노두성 

형제, 신권우(申權雨, 1910~1985) 등이 활동하였고, 진천은 김인수(1908~1972)

가 활동하였다. 현대의 벼루장은 각 지역에 분포하는 연석산지에 따라 남포에 이창

호(1926~1990), 김진한(1941~), 원창재(1942~), 이영식(1955~현재; 1974~1985, 

연승공예사), 노재경(1959~), 권태만(1961~), 조중현(1961~) 등이 벼루를 제작하

고 있다. 단양에 신병식(1939~), 신근식(1942~)과 신명식(1954~) 삼형제와 신재

민(1977~, 신명식 아들), 진천에 권혁수(1959~), 언양에 유길훈(1948~), 장수에 

고태봉(1961~) 등의 벼루장이 대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제어

벼루,  벼루장(硯匠),  연석(硯石)의 조건(條件),  연석(硯石)의 산지, 

연석의 석질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9

I. 머리말

문방(文房)은 선비의 서재나 사랑방을 지칭하는 말로 이런 방에 갖

추어 놓고 사용하는 문구를 문방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붓, 벼루, 먹, 종이 등 네 가지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하며, 자신

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로 여겨 의인화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산

업화에 따른 문화현상의 변화로 근현대에 이르러 문방구에 많은 변화

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벼루는 문방구로서의 기능이 매우 축소

되었다. 기록을 위한 문방구에서 전통적 예술 표현을 위한 문방구로 

용도가 변하였다.

벼루는 뺷고려도경(1123)뺸에 “硯曰皮盧”, 뺷훈민정음해례본(1446)뺸에 “벼로

(爲硯)”, 

두공부시경언해(1481)뺸에 “삼협 중에 봉사하야 긴 됫람 부러

셔 돌 벼로 얻도다”, 뺷임하필기(19세기)뺸 “皮盧”

1 등에서 ‘벼로’와 ‘피

로’ 등으로 명칭하였다. 벼루는 ‘벌(별)’, ‘비레’, ‘빌’ 등 돌과 흙의 뜻

을 지닌 어원에서 연유한다.

2 벼루는 시대, 산지, 재질, 형태, 문양, 용

도 등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형태와 용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벼루는 용도와 제작 양식에 따른 형태와 문양도 중요

하지만 석질이 가장 중요하다. 벼루제작에는 연석(硯石)의 조건이 있

다. 연석의 조건에 따라 산지가 형성되었고, 석질의 특성에 따른 산지

1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19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계림유사(鷄林類事)의 방언(方
言).

2

박용수, 뺷겨레말 용어사전뺸, 서울대학출판부, 1996.


background image

 제30호

10

마다 벼루장이 활동하면서 벼루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연

석의 채취가 쉽지 않고, 이동도 어려워 대부분 산지를 찾아 벼루를 제

작하였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도 연석의 산지에서 벼루제작이 이루

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본고에서는 연석의 조건과 석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결과와 고문헌의 기록을 고찰하고, 연석의 산지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벼루장에 대한 기록을 추적 및 정리하고자 

한다.

II. 연석(硯石)의 조건(條件)과 석질(石質)의 특성

1. 연석(硯石)의 조건(條件)

벼루의 대표적인 석질은 오석(청석, 창석),

3 자석, 녹석 등이다. 이런 

석질로 만들어진 벼루에는 몇 가지 연석의 조건이 있다. 즉 좋은 벼루

의 석질은 먹이 잘 갈려야 하며, 먹이 곱게 갈려야 하고, 먹이 쉽게 마

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조각과 문양이 사용자의 품격에 맞아야 한

다. 좋은 벼루에 대한 연석의 조건과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

오석은 규산이 풍부한 유리질의 화산암. 유문암질(流紋巖質)이나 안산암질(安山巖質)
의 마그마가 냉각하여 응고한 것으로, 흑색, 암회색 또는 적갈색을 띠며 조가비와 같은 
모양으로 쉽게 쪼개진다. 청석은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 녹니석을 주성분으로 하여 이
루어진 결정 편암이다. 오석과 청석은 유사한 검은 돌이라는 점이며, 여기서 오석은 청
석을 말한다.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11

① 석영(Quartz)으로 형성된 은사가 많이 분포된 돌이 좋은 연석이다. 

은사가 많이 분포되어있어야 먹이 잘 갈리기 때문이다. 

② 은사가 고와야 먹이 곱게 갈려서 고유의 먹색이 잘 나타난다. 먹이 

곱게 갈리려면 은사가 고와야 한다. “벼루는먹이쉬이니되 늘어야 픔

이됴으니라”

4라고 한 것은 은사가 많아야 쉽게 잘 갈리고, 은사가 고와야 

먹이 곱게 갈려 본연의 먹색이 잘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③ 연석이 운모함량이 적어야 더 단단하고 흡습성이 적은 연석으로 

먹이 쉽게 마르지 않는다. 먹이 마르지 않으려면 석질이 단단해야 한

다. 경도가 강한 석질은 조직이 조밀하여 먹이 잘 마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손지한(孫之翰)

5공에게 벼루를 선물하며 3천금의 값어치가 있

는 것이라고 하자 손공이 의심쩍어 하였다. 객(客)이 말하기를 ‘벼루는 

물에 젖은 듯한 빛깔이 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치는데, 이 벼루는 입김

을 불면 물이 흐를 정도다.’”

6라고 말한 것은 연석의 강도가 단단하고 

조직이 치밀하며 단열성(斷熱性)이 뛰어나 먹물이 쉽게 마르지 않는다

는 의미이다. 뺷연사(硯史)뺸에 “고려연(高麗硯)은 벼루의 결이 단단하면

서도 치밀하며, 소리가 난다. 먹을 갈면 색깔이 푸르게 되며, 간간이 흰

색의 금성(金星)이 있어서 돌의 가로무늬를 따라서 촘촘하게 줄을 이루

고 있는데, 오래 쓰면 무늬가 없어진다.”

7라고 한 것은 연석이 단단하

4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 뺷交隣須知뺸 3冊 > 交隣須知 卷之三 > 文式 > 硯.  

5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의 孫甫, 之翰은 그의 자이다. 뺷당서(唐書)뺸를 편년체로 개찬
하고, 논단을 가한 뺷당사논단(唐史論斷)뺸을 찬하였다.

6

裵龍吉, 

뺷금역당집뺸 제4권, 서(序), 귀향하는 황화보 극중을 전송한 글(送黃和甫 克中 歸

田序).

7

한치윤, 뺷해동역사뺸 제27권, 물산지 2, 문방류, 벼루 조(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역, 1998).


background image

 제30호

12

여 쉽게 마르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2. 석질(石質)의 특성(特性) 

연석의 석질은 은사나 금사와 같이 석영질입자로 주로 구성된다. 

석영질인 은사가 봉망(鋒芒)을 형성하고 봉망(鋒芒)에 의하여 먹이 갈리

는 것이다. 은사나 금사의 분포형태에 따라 구름모양의 형태는 운문

(雲紋), 

밤하늘의 별처럼 흩어진 형태는 산문(散紋), 실같이 늘어져 있는 

형태는 사문(絲紋) 등으로 분류한다. 금사나 은사가 균일하게 분포되

어 있어야 먹이 잘 갈린다. 운문석도 은사의 분포상태, 경도상태 등에 

따라 품질이 상, 중, 하로 분류된다. 경도가 높은 연석은 망치로 때려

보면 쇳소리가 나고, 경도가 낮은 연석은 목탁소리가 난다. 벼루의 질

은 은사의 분포상태, 은사의 크기, 경도 등이 핵심요소이다. 

석질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자연적인 문양이 있다. 문양이 있는 

연석은 금사나 은사가 많이 분포되어 문양을 만들기 때문에 먹이 잘 

갈린다. 벼루의 기능은 강도와 석영질의 분포, 석영질의 굵기에 달려

있다. Chert는 미립질 석영(石英), 이산화규소(SiO2)로 된 화학적 퇴적

암을 의미한다.

8 화학적 퇴적암에 속하는 Chert는 물속에 녹아 있던 

규질 성분이 침전하여 형성된다. 먹은 이 Chert에 갈리는 것이며, 조

흔색이 흰색은 백운모의 은사이고, 누른빛은 흑운모의 금사이다. 

8

미정질 석영의 형태가 알갱이 모양일 경우에는 처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유상일 경
우에는 옥수(玉髓, 칼세도니)로 부르자는 것이다.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13

연석 석질의 특성을 남포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남포연석은 “쥐

라기의 퇴적암류인 남부남포층군 내 분포하는 흑색셰일”

9로 “석영으

로 구성된 천연규사는 산출되는 장소에 따라 산규사(山硅砂)ㆍ천규사

(川硅砂)

ㆍ해빈규사(海濱硅砂) 등으로 구분한다. 서해에 가까워질수록 석

영 함량이 높은 천규사광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서해 및 서남해

의 도서해변에는 섬을 형성한 암석의 해안침식작용으로 석영이 분리, 

집적된 해빈규사광상이 넓게 분포한다. 서해중부해안지역의 안면도, 

목포와 남해해안 및 도서지구의 자은도ㆍ춘정도지구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0고 하였다. 

남포에서 산출되는 점판암의 종류에는 금사문석, 은사문석, 화초문

석, 석란석 등이 있다. 특히 이유원의 뺷임하필기뺸에 "우리나라 남포의 

돌은 색이 검고 윤기가 나서 벼루의 재료에 공급되는데 간혹 산수, 화

초 등의 무늬를 갖춘 것이 나온다니, 이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한 가

지 일이다."

11와 같이 남포 화초석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러한 석란석

이나 화초석은 현시대에도 산출되고 있다.

최고의 명품 연석은 경도가 높은 운문석으로 금사와 은사의 분포

도가 제일 높기 때문이다. 화초문석이나 아란문석은 석질이 곱고 아

름답기는 하나 은사(銀砂)의 양이 적어 잘 갈리지 않는 석질이 있다. 

9

이현주, 「울산 반구대 벼룻돌 석질과 벼루장의 특성」, 뺷울산학연구뺸, 15호, 울산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2020, 205쪽.

10

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뺸, 뺷資源總覽뺸(동력자원연구소, 1985), 뺷韓國의 地質과 鑛物資

뺸(연세대학교 지질학과, 1982), 뺷韓國鑛業誌뺸(윤성순, 대한중석광업회사, 1952).

11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28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바위 속의 옥배(玉盃).


background image

 제30호

14

남포 연석의 광물학적 특성을 분석하여 보면 좋은 벼루의 요점을 갖

추고 있음이 확인된다. 경도, 압축강도, 마모강도가 높아야 먹물이 쉽

게 마르지 않고, 공극률이 낮아야 흡수율도 낮다. 추사 김정희는 “붓

은 봉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을 요하며, 벼루는 윤택함과 껄끄

러움이 서로 겸하여 거품이 일고 먹이 빛나는 것을 취한다.”

12라고 한 

것은 좋은 연석의 특징을 지적한 것이다. 

남포 연석(硯石)의 물리적 특성과 암석광물학적 특징을 예로 들어 

연석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보령 남포의 연석 

중에는 운문은사(<그림 1>)와 같이 구름무늬가 있는 것이 있다. 결핵체

라는 운문은사의 구성광물은 석영, 흑운모, 고령석, 황철석 및 갈철석

이며, 주변보다 석영의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운문은사는 석영

함량이 높기 때문에 먹이 잘 갈린다.

A : 보령 남포 벼루 연석(硯石)재의 또 다른 특징적 구조는 결핵체이다. 

결핵체는 퇴적암 중에 구형, 편두상 또는 불규칙한 형태의 굳은 광

물성분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평리지역 흑색 셰일의 결핵체는 대부

분 원반 또는 타원모양으로 나타난다. 결핵체는 주변보다 밝은 색

상으로 산출되기 때문에 타원형태의 밝은 무늬가 마치 구름과 같이 

보여 일명 운문석이라 불리는 것이다. 결핵체의 구성광물은 석영, 

흑운모, 고령석, 황철석 및 갈철석이며, 주변보다. 석영의 함량이 높

은 것이 특징이다. 흑색 셰일 내부에는 암흑색 반점무늬가 매우 규

12

김정희, 뺷阮堂全集뺸 제8권 > 잡지(雜識)(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역, 1988).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15

<그림 1>

 운문은사(雲紋銀沙)

<그림 2>

 산문은사(散紋銀沙)

<그림 3>

 사문은사(絲紋銀沙)

시료채취

위치

일반조암광물(%)

점토광물(%)

Plagio-

clase

K-felds

par

Quartz

Mica

Calcite

Pyrite

Chlorite

Kaolinit

e

Linite

Smectit

e

보령

0.4

4.2

42.1

22.6

2.2

0.0

5.8

0.7

21.8

0.1

단양

4.0

11.6

35.7

15.4

6.2

0.0

4.2

2.7

21.4

0.1

진천

3.9

11.1

35.4

18.5

7.6

0.0

2.2

2.3

23.9

0.1

정선

0.2

4.7

32.7

37.5

0.6

7.9

0.2

0.1

28.2

0.0

울산

11.1

22.5

24.8

3.4

8.2

0.0

8.3

15.2

4.3

0.6

<표 1>

 광물의 정량분석결과

칙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3

B : “남포 연석은 은사의 분포에 따라 운문(雲紋), 산문(散紋), 사문(絲紋), 

그리고 문양에 따라 석란문, 혹은 아란문(鵝卵紋), 화초문(花草紋) 등

으로 분류된다.”

14

남포의 연석이 먹이 잘 갈리는 특성인 석영과 점토의 분포 차이이

다. 보령 남포연의 경우에도 점토광물이 적은 연석이다. [광물의 정량분

석결과]

15(<표 1>)를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13

이찬희 외,  뺷보령남포벼루제작뺸, 도서출판선인, 2011, 88~89쪽.

14

손환일, 뺷보령 남포 명연전뺸, 「남포 벼루의 특징」, 보령시, 2018, 9쪽.

15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9~200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16

연석의 수분 흡수율은 먹물이 마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연석 산지

별 평균 수분 흡수율과 비흡수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령 흡수

율 0.12(%) 비흡수율 0.106(%), 단양 흡수율 0.29(%) 비흡수율 0.213(%), 

진천 흡수율0.53(%) 비흡수율 1.173(%), 정선 흡수율 0.54(%) 비흡수율 

0.520

(%), 

울산 흡수율 0.55(%) 비흡수율 0.319(%) 등으로 흡수율은 

진천과 정선, 그리고 울산이 0.55 내외의 값으로 가장 높은 값을 보

이는 반면, 보령의 암석은 수분흡수율이 가장 낮다. 하지만 표면적을 

적용한 비흡수율 값은 진천 암석이 가장 높았으며, 정선, 울산, 단양, 

보령 순으로 비흡수율값이 낮아진다. 이는 진천과 정선 및 울산 암석

은 입자내 공극이 많고, 단양과 보령은 입자내 공극이 적다는 것을 의

미한다.”

16라고 하여 보령연석의 수분 흡수율이 가장 낮아 가장 마르

지 않는 연석이다. 

연석의 강도가 약해 먹과 돌이 함께 갈리면 먹물이 탁하고, 고유의 

먹색을 낼 수 없다. 연석의 조건은 오석, 자석, 녹석 등 모두 같은 경

우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벼루의 기능은 은사(석영)의 분포정도, 

은사의 크기, 석질의 강도에 따른 흡수율이 벼루의 석질을 결정한다. 

그 다음이 자연적으로 생긴 문양과 아름다운 문양조각이 벼루의 품격

을 결정한다. 벼루의 질이 좋다고 해서 품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품

격이 있는 벼루라고 해서 반드시 질이 좋은 것은 아니다. 벼루는 석질

이 가장 중요하며, 품격은 벼루의 조각과 사용자의 품격도 중요한 평

가의 기준이 된다. 

16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9~200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17

III. 연석의 산지(産地) 

한국 벼루의 석재는 오석(청석)과 자석, 그리고 녹석으로 산지가 지

역별로 나뉜다.  뺷연경재전집뺸,  뺷임하필기뺸,  뺷경도잡지뺸,  뺷임원십육

지뺸, 뺷오주연문장전산고뺸, 뺷해사일기뺸, 뺷대동지지뺸, 뺷해동역사뺸, 뺷규

합총서뺸, 뺷오주연문장전산고뺸 등에 거론된 주요산지만을 지적하자면 

오석산지는 남포, 종성의 창석(蒼石), 북청, 풍천의 청석

17 등이다. 자

석산지는 정선, 진천, 안동, 평창

18 등과, 압록강변 위원과 송화강변

의 녹자석이 있다. 뺷해동역사뺸의 「연사(硯史)」에서 “우리나라의 벼루

로는 남포(藍浦)의 오석(烏石), 관서(關西)의 자석(紫石), 북도(北道)의 청석

(靑石)

이 모두 이름이 유명하다.”

19라고 한 것도 같은 지적이다. 녹석산

지는 대동강녹석과 해주와 언양의 녹석 등이 대표적이다. 

연석(硯石)은 유기물질의 함량이 높을수록 더 어두우며, 적철석ㆍ갈

철석이 포함되면 붉은색과 자색을 띠며, 산화제1철 성분이 많으면 청

색ㆍ녹색ㆍ검은색을 띤다. 유기물질의 함량에 따라 색이 다를 뿐이다. 

신익성은 뺷낙전당집뺸에서 산지별 벼루를 다음과 같이 품평하였다.

C : “나는 어려서부터 대충 붓 잡는 법을 알았다. 게다가 일찌감치 부마

17

뺷해동역사뺸, 뺷규합총서뺸 등에서 창석과 청석은 오석을 말함. 이하 오석으로 통일.

18

뺷세종실록뺸,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평창군 “붉은 돌[紫石]이 군(郡)의 
동쪽 18리 북곡리(北谷里)의 동구 도주(道周) 남향봉(南向峯)에서 난다.”

19

한치윤, 뺷해동역사뺸 제27권, 물산지 2, 문방류 , 벼루 조(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역, 
1998).


background image

 제30호

18

가 되어 성은을 입었기에 사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간혹 하사받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벼루를 두루 얻었다. 이를테면 

안동, 고원, 희천, 위원, 풍천, 남포 등의 것인데, 모두 각각 한 가지 

장점이 있다. 안동의 마간석이 좋기는 하지만 진품은 얻기 어렵고, 

수침석은 얻더라도 흠이 많은데, 푸른색이 제법 아름답다. 고원의 

몇 가지 품종은 먹빛이 화려하지만 구룡산에서 나는 것이 아니면 

물이 쉽게 마른다. 풍천의 것은 굳고 매끄러워 갈기가 쉽지 않으며, 

자색은 희귀하다. 희천과 위원의 것은 대략 비슷하여 발묵이 비교

적 경쾌하나 붓이 문드러지기 쉽다. 오직 남포에서 나는 여러 품종

만은 모두 아름다운데, 땅속 깊이 있던 것이 아니면 물이 마르는 것

이 단점이다. 몇 해 전 당형이 현령이 되어 크고 작은 것 네댓 개를 

보내주었는데, 화초석 한 조각이 가장 아름다웠다. 현주(玄洲, 즉 尹

新之

)에게 반을 나누어주고 연지를 파서 받았는데, 동작와(銅雀瓦) 

못지않았다. 발묵은 구룡산에서 나는 것과 같은데 더욱 곱고 매끄

러워 막힘이 없으며, 먹물이 마르는 단점도 없었다. 그런데 정묘호

란 때 잃어버리는 바람에 붓을 들 때마다 생각하며 잊지 못했으니, 

사소한 물건에 얽매인 것이다. 너희 집안의 남포 장원은 벼루 재료

가 나는 곳과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이 늙은이를 위해 땅속에 묻힌 

한 장 정도 되는 것 한 조각을 보내줄 수 있겠느냐? 나는 이미 병들

어 아침저녁을 기약할 수 없다. 게다가 외환까지 있는데 여전히 한

가로이 즐길 물건을 구하니 필시 우활하다 여길 것이다. 요행히 병

이나 외적 때문에 죽지 않는다면 생전에 요긴하게 쓸 것이다. 이 때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19

문에 누누이 말하며 한편으로 벼루의 품등을 논하여 너희들에게 알

리고자한다.

20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뺷연경재전집뺸, 「연보」에서 “위원석, 고령

석, 평창자석, 풍천청석, 안동마간석, 종성아란석, 갑산무산석” 등을 

지적하였다. 이규경(李圭景, 1788~사망일 미상)은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에

서 “남포보령오연석과 화초석, 안동구룡산수침마간석, 고령연석, 평

창자연석, 풍천청연석, 종성자연석오연석, 위원연석, 갑산무산연석, 

희석연석, 곽산자연석, 고원연품, 파주목진산명마산정오연석화초석, 

장연장산곶아랑포해저출오창연석과 금선문석(金線紋石)”

21  등을 기록

하였다.

1. 오석산지 

가장 오래된 오석연은 <백제쌍북리출토오석연(7세기)>이 부여에서 

출토되어 전한다. 이는 남포오석으로 판단되며, 오석연은 보령 남포

20

申翊聖, 1682, 

뺷樂全堂集뺸 卷九, 尺牘 寄晉、龜兩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외 역, 2016). 

21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我東出硯處. 藍浦保寧烏硏石花草石爲國之最佳者. 亦有名於中國而我人不知也. 安東九

龍山水沈馬肝 石爲次. 高靈硏石, 微澁枯淡無光氣. 平昌紫硏石頗佳, 亦有花草紋. 豐川靑硏石甚硬
且麁如瓦. 鍾城紫硏石烏硏石品佳而其中鵝卵石出五龍川品冠東硏. 渭原硏石亦有花草. 甲山茂山
硏石亦好. 熙石硏石麁硬. 郭山紫硏石稍佳. 高原硏品亦好. 坡州牧鎭山名馬山頂平微凹作池, 其中
産烏硏石. 間有花草石品佳.(以 尹氏祖山祖脈, 不敢采出.) 長淵長山串阿郞浦諸處, 海浦及海底出
烏倉硏石. 金線紋成物象而得水沈者乃佳.(海澨巖上有古人所鑿池. 凹心硏者十餘座, 佳品.)”


background image

 제30호

20

오석과 종성오석이 대표적으로 생산되었다. 이 두 지역의 오석산지의 

기록과 제작된 벼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포오석

남포 오석연은 <백제쌍북리출토오석연(7세기)>을 통하여 그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남포 오석연은 보물로 

알았다. 뺷대전(大典)뺸에 “각 고을에 보물(寶物)이 생산되는 곳은 대장(臺

)

을 만들어서 공조(工曹)와 그 도(道), 그 고을에 비치하고 간수한다. 

이른바 보물이라고 하는 것은 경주(慶州)의 수정(水晶), 성천(成川)의 황

옥(黃玉), 면천(沔川)의 오옥(烏玉), 장기(長鬐)의 뇌록(磊綠), 남포(藍浦)의 연

석(硯石), 해남(海南)의 양지석(羊脂石), 흑산해중(黑山海中)의 석웅황(石雄黄) 

등이 그것이다.”

22라고 지역 특산물의 대표적인 보물로 분류하였다. 

그만큼 남포의 연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석이다. 남포연은 유

명하여 “남포 벼룻돌 나는 가져오지 않았다. 장난스레 읊었다.(藍浦縣出

硯石 余不取來 戱吟

)”

23라고 한 것은 남포연은 그만큼 사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정묘조에 남포석이 귀하여 방효량으로 하여금 초룡들의 

문양을 새기도록 하여 조그만 소연을 만들었다. 마치 천구의 홍벽과 

같이 보배로 여겼다. 경신년을 지나 사람들 사이에 흘러나와 내가 하

나를 얻었는데 궁인에게 준 귀한 물건이다. 연갑에 넣어 보장하였는

22

丁若鏞, 1938, 

뺷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뺸, 牧民心書 卷十一 工典六條 【山林ㆍ川澤ㆍ

繕廨

ㆍ修城ㆍ道路ㆍ匠作】○山林 【工典 第一條】 土產寶物,無煩採掘,以爲民病。그 지방

에서 생산되는 보물(寶物)을 번거롭게 채굴하여 백성들에게 병폐가 되게 하는 일이 없
도록 하여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장순범 역, 1986)

23

尹愭, 

뺷무명자집(無名子集)뺸, 시고 제3책 시(詩)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21

데 이는 벼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왕의 수택을 존경한 것이다. 내

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자 조사(朝士)들이 앞 다퉈 남포석을 구하면서 

도연(陶硯, 자기(瓷器)로 만든 벼루)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남포연의 품질이 중국의 흡주연에 양보하지 않음을 알 수 있

다.”

24고하여 청나라에서도 남포연의 가치를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이규경도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에서 “남포 보령 오연석 화초석

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역시 중국에서도 유명하지만 

우리만 모르고 있다.”

25라고 남포오연석을 최고로 지적하였다.

남포연은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부여쌍북리출토오석행연(국립부

여박물관 소장)>

이나 <부여능산리사지출토오석연(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이 보령 남포의 오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보령 남포오석은 그 유래

가 매우 오래되었다. 그리고 한치윤의 뺷해동역사뺸에 의하면 이미 고

려시대부터 연석의 산지가 여러 곳에서 개발된 것으로 추측된다.

D : “벼루(硯) ○ 뺷연사(硯史)뺸 에, 우리나라의 벼루로는 남포(藍浦)의 오

석(烏石), 관서(關西)의 자석(紫石), 북도(北道)의 청석(靑石)이 모두 이

름이 칭해 진다. 고려연(高麗硯)은 벼루의 결이 단단하면서도 치밀하

며, 소리가 난다. 먹을 갈면 색깔이 푸르게 되며, 간간이 흰색의 금성

24

李裕元, 

뺷임하필기뺸, 제25권 禁中古硯 (正廟朝 貴藍浦石 使方孝良 刻草龍等物 成小硯 其時寶

之若天球弘璧庚申後流落人間 余近得一 方於宮人族屬 果希品也 藏于匣 非敬物也 敬先王手澤也 
余入燕都 朝士爭求藍石曰 非陶硯比也 可知 藍石不讓於歙産也)

25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藍浦保寧烏硯石花草石爲國之最佳者 亦有名於中國 而我人不知也”.


background image

 제30호

22

(金星)

26이 있어서 돌의 가로무늬를 따라서 촘촘하게 줄을 이루고 있

는데, 오래 쓰면 무늬가 없어진다.”

27

보령 남포 연석의 지리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남포오석의 석층

은 하조층, 아미산층, 조계리층, 백운사층, 성주리층으로 그 석질이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최고상품의 연석으로 남포벼루의 연석(硯

)

이 채취되었던 석재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백운사 사찰 주변의 

백운사층으로 이를 백운상석이라고 한다.

E : “남포 벼루는 충남 보령일대의 탄전지역에서 산출되는 흑색 Shale을 

재료로 한다. …(중략)… 변성암류 상부에 부정합으로 피복한 대동

누층군 퇴적암류는 하부로부터 하조층, 아미산층, 조계리층, 백운

사층,  및 성주리층으로 구분된다.  …(중략)… 조계리층은 …(중

략)… 주로 개화리 지역에 집중적으로 흑색 사암의 석산이 분포 …

(중략)… 백운사층은 석산개발의 대상지층으로서 비교적 큰 규모의 

석산이 개화리, 성주리, 평리지역에 밀집 분포해 모두 44개소가 확

26

금성은 연석(硯石)의 일종인 금성석(金星石)에 나타나는 흰색의 줄무늬를 말한다. 뺷운
림석보(雲林石譜)뺸에, “금성석은 우전국(于闐國)의 단단한 땅속에서 나는 돌인데, 색깔
이 검은색을 띠고, 반점으로 이루어진 백맥(白脈)이 있어 점점이 광채가 난다.” 하고, 
뺷격고요론(格古要論)뺸 만주금성석조(萬州金星石條)에는, “만주의 가파른 절벽에서 금성
석이 나는데, 재질이 단계(端溪)의 하암(下巖) 다음 간다. 돌의 색깔은 칠흑색이고, 가
늘고 부드럽기가 옥과 같다. 물에 젖으면 금성의 무늬가 저절로 나타나고, 물이 마르면 
없어진다.” 하였다.

27

한치윤, 뺷해동역사뺸 제27권, 물산지 2, 문방류, 벼루 조(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역, 
1998).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23

인된다.  보령시 웅천읍 노천리부터 조계골이 주요 분포지역이다. 

…(중략)… 백운사층의 상부는 셰일대로서 성주리 지역에 많이 산

출된다. 본 층은 흑색 실트스톤, 세립사암과 3~5매의 탄층이 협재된

다. 층의 두께는 300미터 이상이고 점이층리가 관찰되며 화석도 발

견된다. 이 층에서 발견되는 사암과 셰일은 석산개발 대상 석재로

서,  특히 흑색셰일은 남포벼루의 연석(硯石)으로 이용된다.  …(중

략)… 성주리층은 백운사층과 함께 가행석산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대표적 지층이다. 이 층은 성주리 지역에서 타원형으로 분포하며 

주로 역암, 역질 알코즈 및 조립 장석질 사암으로 구성되고, 간혹 암

회색 셰일이 협재된다. …(중략)… 예로부터 남포벼루의 연석(硯石)

이 채취되었던 석재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위치한 백운사 주변

의 흑색셰일이었다.  이는 백운사층에 해당하며,  현지에서는 이를 

백운상석이라 부르고 있다. …(중략)… 평리 채석장의 흑색셰일은 

백운사 주변 백운상석의 연장선상에서 산출되는 동일한 암석이며, 

최상품의 벼루돌로 취급된다. …(중략)… 한편 개화리 조계골 일대

의 흑색셰일은 탄광의 개발과 함께 채석되어왔으며,  다량의 벼루 

돌을 생산할 수 있어 1970~1980년대 벼루의 급격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조계골은 지질학적으로 백운사층과 아미산층의 경계부

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흑색 셰일은 벼룻돌로 품질이 백운

상석에 비해 다소 떨어져 현지에서 중석이라 불렀으며 저가 또는 

보급형 벼루를 제작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28

28

이찬희 외, 앞의 책, 2011, 80~85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24

보령 남포 연석의 광물성분은 “주 구성광물은 석영, 점토광물, 부 

구성광물은 백운모, 탄질물, 불투명광물, 주로 암회색 내지 흑색셰일

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흑색셰일은 주로 석영과 점토광물로 구성되며 

흑색셰일은 주로 석영과 점토광물로 구성되며, 백운모와 탄질물을 함

유한다. 또한 다량의 변질에 의해 형성된 미립의 녹니석(chlorite), 견운

모(sericite) 등이 관찰된다. 동력변성작용에 의해 석영(quartz)은 압쇄적

인 입상을 나타낸다.”

29고 한다.

남포 연석 산지는 옛날부터 남포

30가 대표적으로 유명하였다. 신익

성(申翊聖, 1588~1644)은 뺷낙전당집뺸에서 “오직 남포에서 나는 여러 품종

만은 모두 아름다운데, 땅속 깊이 있던 것이 아니면 물이 마르는 것이 

단점이다.”

31 하고, 이익(李瀷, 1681~1763)은 “안동(安東)과 남포(藍浦)에서 

벼룻돌이 생산되는데, 안동에서 나는 돌은 빛은 붉어도 품질이 나쁘

고 남포에서 나는 돌은 푸르스름하면서 검은 빛깔로 되었으나 온 나

라 사람이 모두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모두 문채가 없고 또는 바윗돌

로 만든 벼루는 구덩이 속의 돌을 캐서 만든 벼루보다 윤기도 없고 먹

도 잘 갈리지 않는다. 어떤 이는 ‘물속에 넣어 두었다가 오랜 후에 내

29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2쪽.  

30

丁若鏞, 1938, 

뺷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뺸 교감표점 牧民心書 卷十一 工典六條 【山林

ㆍ川澤ㆍ繕廨ㆍ修城ㆍ道路ㆍ匠作】○山林  【工典  第一條】  土產寶物,無煩採掘,以爲民

。 《大典》曰: “諸邑寶物產處成籍, 藏於工曹ㆍ本道ㆍ本邑看守。” ○所謂寶物者, 慶州

產水晶

, 成川產黃玉, 沔川產烏玉, 長鬐產磊綠, 藍浦產硯石, 海南產羊脂石, 黑山海中產

石雄黃之類

, 是也。 凡寶物所產, 皆爲土民切骨之弊, 牧宜知此, 有求勿應, 有告勿採, 歸

來之日

, 勿以一片携入裝中, 於是乎淸吏也。

31

申翊聖, 1682, 

뺷樂全堂集뺸 卷九, 尺牘 寄晉、龜兩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외 역, 2016).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25

어 쓰면 나쁘던 벼루가 좋아진다.’라고 하니, 물성이 상반되는 것이 

이와 같다.”

32라고 하였다. 위에서 지적한 이규경의 남포연에 대한 기

록을 살펴보면 그 유행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김도산의 활동

시기에 이미 상품(上品)의 남포연석을 구하기 어려웠다. 성해응과 이

유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F : “김도산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연재(硯材)가 매우 많다고 들었는데 갖

추어 기록한다. 남포석은 매우 아름답다. 금사문이 최상급이고, 은사

문이 그 다음이다. 화초문석은 조금 달라 돌이 단단하고, 미끄러워 

먹이 잘 갈리지 않는다. 대개 돌의 결이 거칠고 먹색이 탁하다. 돌의 

결이 강하면 먹색이 묽다. 오직 윤기가 나고 섬세한 것은 서로 잘 어

울리기 때문이다. 요즘 노점과 시골 글방에서 사용한다. 남포벼루와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

나 그중에서도 좋은 벼루는 단계연이나 흡주연보다 낫다. 그중에서

도 구욕안(鸜鵒眼, 구관조 눈알)이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하여 얻기 어

렵다.”

33

G : “정묘조(正廟朝)에 남포석(藍浦石)이 귀하여 방효량(方孝良)으로 하

32

李瀷, 

뺷星湖先生僿說뺸 卷之五, 萬物門 鴝鵒眼 ⓒ (한국고전번역원, 김철희 역, 1976).

33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卷之十二, 文○雜著 硯譜 “余從道山輩聞硯材甚悉。 故具書之。 藍浦石甚

。 金絲紋爲上。 銀絲紋次之。 花草紋差硬。 滑不拒墨。 澁不滯墨者爲可。 盖石理麤則墨色

。 石理硬則墨色淡。 惟瑩潤纖膩者。 與墨相得。 今街肆村塾所用。 無非藍産。 故人不甚

。 然其佳品不讓端歙。 亦有子石及鸜鵒眼者。 顧稀貴難得。”


background image

 제30호

26

여금 초룡(草龍), 포도 등의 물건을 새겨 자그마한 벼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마치 천구(天球)나 홍벽(弘璧)처럼 귀중

히 여겼는데,  경신년(1800,  정조24)  이후 민간에 유락(流落)되었다. 

내가 근래에 궁인(宮人)의 족속에게서 그것을 하나 얻었는데, 과연 세

상에서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갑(匣)에 넣어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물건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고,  선왕(先王)의 수택(手澤)을 공경하는 

까닭이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자 조사(朝士)들이 앞 다투어 남

포석을 찾으면서 ‘도연(陶硯 자기(瓷器)로 만든 벼루에 비할 바가 아

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남포석이 중국의 흡주(歙州)에서 산출되는 

벼룻돌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

유형원(1622~1673)은 남포오석을 “청석연(靑石硯)이 성주산(聖住山)에서 

난다.”

35고 하여 오석과 청석은 같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유원(李裕

, 1814∼1888)

의 뺷임하필기뺸에 “우리나라 남포(藍浦)의 돌은 색이 검고 

윤기가 나서 벼루의 재료에 공급되는데 간혹 산수, 화초 등의 무늬를 

갖춘 것이 나온다니, 이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한 가지 일이다.”

36라

고 하였다. 이런 화초석은 지금도 산출되고 있다. 이남규(李南圭, 1855∼

1907)

의 뺷수당집뺸에 남포연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34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25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대궐 안의 옛 벼루. 

35

柳馨遠, 

뺷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뺸 제3권, 충청도(忠淸道) 우도(右道)○홍주진(洪州鎭) 

남포현〔藍浦縣〕.

36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28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바위 속의 옥배(玉盃).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27

H : “남전(藍田, 보령남포)에서 나는 벼루를 품질이 우량하다고 일컫는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마치 사진을 새겨 넣은 듯한 화초 문양이 저절로 

생긴 것이 더욱 기이하다. 그러나 우량하다고 해서 반드시 기이한 것

이 아니며, 기이하다고 해서 또 반드시 우량한 것도 아니다. 선군(先君)

께서 일찍이 평정(平亭) 채정묵(蔡定默) 어른으로부터 벼루 하나를 얻

었는데, 곧 남전에서 산출된 것으로 기이하면서도 우량한 것이다. 그 

길이는 한 자가 채 못 되며 넓이는 길이에 비하여 반이 조금 넘는다. 벼

루의 남쪽에다 대나무 한 가지를 새겼는데 잎사귀가 다섯 개가 달렸으

며,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을 향하여 뻗어 올라갔는데 벼루면이 다하도

록 오히려 그 형세가 그치지 않는다. 또 북쪽의 몇 잎이 굽어서 왼쪽으

로 늘어졌는데, 바닥이 좁기 때문에 뜻대로 다 나타내지를 못했다. 그

리고 둥그렇게 그린 복숭아가 남쪽과 북쪽의 대나무 잎 사이에 끼어 

있다. 또 벼루의 오른쪽 몸체는 약간 타원형으로 생겼으며, 몸체의 위 

쪽 꼭대기에는 손바닥처럼 편편한 갈고리 모양의 반달이 있으니, 이것

이 곧 못(硯池)이다. 대저 대나무를 자연스럽게 온전히 그리기 위하여 

이를 좌우로 피하면서 그 남는 부분을 택하느라고 복숭아에 대해서는 

사실 유의하지 않았는데도 그 모양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리고 왼쪽 

하단에는 팔분체로 ‘묵죽 사진 한 폭이 지금 서호에 있다.(墨竹一派今在

西湖

)’라고 새겼고, 오른쪽 하단에는 전서체로 ‘평정(平亭)’이란 두 글자

를 새겼는데, 모두 정밀하고 미세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선군께서 직접 쓰시던 유물(遺物)이므로 이를 보중

(寶重)히 여긴 나머지 여기에다 이름을 붙여서 ‘도죽연(桃竹硯)’이라고 


background image

 제30호

28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갈고 쪼아서 아름답게 뻗었

으니(猗猗而琢磨) 저 무공의 기풍을 들은 대나무인가(聞風武公者耶). 특

히 빼어난 것이 굳고 확고하니(英秀而堅確) 회옹이 칭찬하던 바로 그것

이던가(見賞晦翁者耶).  땅과 함께 하늘을 온전히 하였으니(因地全天) 

영화를 받들어서 이루어진 복숭아여(承靈和而爲桃者). 장차 그 수를 누

리어 영원히 무궁하소서(將壽其世以無窮也)’”

37

남포의 연석(硯石) 채취는 성주산 백운사주변의 연석(硯石)이 경석(硬

)

으로 가장 석질이 좋은데 이미 고갈된 지 오래다. 그래서 현재 같

은 맥으로 웅천 상평리에 연석(硯石)광산을 개발하여 채취한다. 그리

고 「청라연명(靑蘿硯銘)」

38을 통하여 보령 청라는 오래전부터 벼루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청라에서 전통을 전승하고 있는 벼루장 김진

한(충남무형문화재 제6호 벼루장)은 다음과 같이 경험담을 구술하였다.

I : “남포연의 연석(硯石)은 성주산 백운사 뒤편에서 나는 돌을 백운상석

이라 하는데 벼루로는 최고품의 석재이다. 그 다음이 성주산의 예산

재와 두멍골에서 나는 석재를 사용한다. 백운사에서 약 20킬로 떨어

진 웅천면 상평리 일대가 백운사에서 뻗은 줄기의 청석과 오석 계열

의 맥이다. 남포 상석의 윗부분은 결이 없는 무결이고, 무결 밑에는 

37

이남규, 뺷수당집뺸 제7권, 명(銘) 도죽연(桃竹硯)에 대한 명.

38

韓章錫(1832~1894), 

뺷미산집(眉山集)뺸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김영봉  역, 

2015).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29

<그림 4>

 <조선남포오석머루문투각연> 

11.4

✕17.9✕2.9cm, 흑칠연갑남포연, 개인 소장.

<그림 5>

 <조선남포오석매화문투각연> 9.8

✕17.9✕2.9cm,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6>

 <조선남포오석산수문연> 20.7

✕16㎝, 

충남역사박물관 소장.

<그림 7>

 <조선남포오석머루문투각연> 

10.3

✕16.5cm,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8>

 <조선남포오석일자연> 

24.7

✕41.9✕4.3cm,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9>

 <조선남포오석심자연> 

10.9

✕18.3✕3cm, 단국대학교 소장.


background image

 제30호

30

여섯 결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바닥장이라고 한다. 연석(硯石)은 바

위 상태가 대부분이다. 결을 보고 결 따라 정으로 쪼개어 지개로 운

반하였다.”

39

 

(2)

 종성오석

함경북도 종성은 오석과 자석이 함께 산출되는 지역이다. 이규경은 

종성자연석과 오연석의 품질이 좋으며 그중 아란석은 오룡천에서 나

오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벼루이다.”

40라고 하여 종성은 오석과 자석

이 같이 산출된다고 지적하였다. 오석과 작석이 함께 출토되는 예는 

남포와 정선의 예와 같다. 앞에서 거론했지만 연석(硯石)은 유기물질

의 함량이 높을수록 더 어두우며, 적철석ㆍ갈철석이 포함되면 붉은색

을 띠며, 산화제1철 성분이 많으면 청색ㆍ녹색ㆍ검은색을 띤다. 그래

서 석색은 약간 다르지만 오석과 자석과 녹석이 같은 지역에서 산출

되는 지역이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깔의 석색이 혼합되어 산출되

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남포석에는 오석이 주로 산출되지만 자석과 녹

석이 나오는 예도 있다. 

종성오석산지는 언제부터 연석산지로 개발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

만 1732년에 간행한 이재(李栽, 1657~1730)의 뺷밀암집뺸 「창옥연명」

41에 

39

벼루장 김진한 구술자료(보령, 2018. 3).

40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鍾城紫硏石烏硏石品佳而其中鵝卵石出五龍川品冠東硏爲硯.”(「硯材辨證說」, 人

事篇, 器用類, 文具) 

41

이재, 뺷密菴先生文集뺸, 卷十四, <蒼玉硯銘> “痀瘻子在愁州時。 邑人朱桂得一石於江濆。 蒼然膩

。 可以制器用。 於是自以意。 象蓮葉開三竅。 作靑朱墨硯。 以資余文房之用。 其鎚琢之工。 足爲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31

<그림 10> 

<조선종성오석머루문연> 金榮洙 제작,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11>

 <조선종성오석와문연> 皮性九 제작, 

개인 소장.

<그림 12>

 <조선종성오석명문연> 金榮洙 제작,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13>

 <조선종성오석머루문연> 金榮洙 제작,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14>

 <조선종성오석하엽어별문연>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15>

 <조선종성오석머루문연> 

단국대학교 소장.

几格間一佳物

。 相隨數十年。 悲歡竆泰。 未嘗一日去手。”


background image

 제30호

32

수주(愁州, 종성)’의 주계(朱桂)가 오석벼루를 만든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 17세기부터 연석산지로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성해응

의 뺷연경재전집뺸, 「연보」에 “종성의 아란석이 오룡천에서 나오는데 

우리나라 벼루의 으뜸이다.”라고 하였고, 이규경은 “종성의 자연석, 

오연석의 품질이 좋다. 그리고 아란석이 오룡천에서 나오는데 으뜸으

로 우리나라 벼루의 연석으로 사용된다.”

42고 하였다.

종성연의 석질은 “종성석은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생산되는 돌이다. 

짙은 검은색의 돌로 봉망이 조밀하여 먹이 곱게 갈린다.”

43라고 지적

한 바와 같이 석질이 곱고 단단하여 먹이 곱게 갈리고 잘 마르지 않으

나 은사가 적어 잘 갈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 단국대학박물관 소장 종

성연의 경우도 같은 예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김영수가 제작한 벼루

가 있다. 종성오룡천에서 나는 아란석(鵝卵石)은 남포 성주산 장군봉에

서 산출되는 아란석과 같은 것이다. 석질이 곱고 단단하지만 은사가 

적어 먹이 잘 갈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 

2. 자석산지 

가장 오랜 자석연은 <이천설봉산성출토함통7년명풍자형자석연(867)>

이 출토되어 전하지만 산지를 알 수 없다. 자석산지는 이규경의 뺷오주연

42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鍾城紫硏石烏硏石品佳 而其中鵝卵石出五龍川品冠 東硏爲硏 渭源硏石 亦有花草”

43

손환일, 뺷한국의 벼루뺸, 서화미디어, 2010, 254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33

문장전산고(하)뺸에 “안동구룡산수침마간석, 고령연석, 평창자연석, 종성

자연석오연석, 위원연석, 곽산자연석” 등을 지적하였다. 자연석은 위

원, 선천,

44 곽산,45 용천, 종성, 정선, 평창,46 진천,47 단양, 안동,48 

영천, 경주 등에서 산출된다. 그중에서도 위원의 녹자석과 선천, 종

성, 안동 등의 자석이 유명하다. 그런데 진천자석연은 상산자석연이

라 하여 가장 오래된 자선연산지로 판단된다. 왜냐 하면 상산의 명칭

은 11세기 잠깐 사용하였다가 진천으로 개명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새로운 연석광산이 개발되어 진천 상산자석은 수요가 줄었

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안도 위원, 선천, 곽산 등 평안도에서 제작되

는 자석연이 조각이 우수하였음을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운룡연(雲龍

44

李荇 

외, 1528,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卷五十三 > 平安道 > 최종정보 卷五十三, 平安道 宣川

郡 

자연석(紫硯石) 군의 동쪽에 있는 다미리(多米里)에서 나온다; 朴祥, 뺷눌재집(訥齋

集)

뺸 宣川紫石硯歌; 金宗直, 뺷속동문선뺸 제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사악이 바로 전에 의

주에서 와서 선천 돌벼루를 겸선에게 주려고 하거늘 내가 앗아가지고 시로써 겸선에게 
사례하다[士讍新自義州來以宣川石硯將贈兼善兼善予奪得之詩以射兼善]; 李荇, 뺷용재집(容齋
集)

뺸 제9권 산문(散文) 심현숙(沈顯叔)의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 선주연석(宣州硯石)의 

명(銘).  

45

李荇 

외, 1528,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卷五十三 > 平安道 곽산군(郭山郡) 【토산】 자연석(紫

硯石) 

선사포(宣沙浦)에서 난다.

46

뺷여지승람뺸,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동쪽 17리에 있는 미탄현(味呑峴)에 자연석(紫硯
石)

이 유명하다. 이행(李荇) 외, 1528,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卷四十六 > 江原道 > 平昌郡 

土産

자연석(紫硯石) 미탄현(味呑峴)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가장 좋다; 成俔, 뺷속동문선뺸

제5권 칠언고시(七言古詩) 과자석산하(過紫石山下) 내성(㮈城)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동쪽 17리에 있는 미탄현(味呑峴)에 자연석(紫硯石)이 유명하다. 

47

벼루장 유길훈 구술자료(언양, 2018. 3), “진천 상산자석의 마지막 벼루장은 김인수
(1908~1972, 

벼루장 유길훈 스승)이다. 김인수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연촌리(硯村

里)

에 살던 벼루장으로 두타산을 중심으로 괴산, 증평, 진천 등이 같은 광맥의 연석산

지이다. 아마도 연촌이라는 지명은 벼루를 많이 만들던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호칭된 
것이라고 한다.”

48

李荇 

외, 1528,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卷二十四 >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자석(紫石) 독천(禿

川)

에서 나오는데, 벼루를 만들 수 있다.


background image

 제30호

34

)

ㆍ포도연(葡萄硯)ㆍ매죽연(梅竹硯) 8매(枚)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통

하여 평안도 관찰사는 평양이 사신들이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사은

품으로 사용하는 벼루를 항상 준비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J :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운룡연(雲龍硯)ㆍ포도연(葡萄硯)ㆍ매죽연(梅

竹硯

) 8매(枚)를 바쳤다.‘【사적으로 바친 것이다. 전에 이양이 평안 감

사였을 적에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벼루를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하

게 조각을 하였다. 또 성천(成川)의 분석(粉石)을 취해다가 필가산(筆

假山

)을 만들어 거기에다 산천(山川)ㆍ임수(林籔)ㆍ사사(寺舍) 따위를 

새기고 또 용 두 마리를 산 위에다 새겼는데 산 끝에다 물을 대면 한 

마리의 용이 물을 머금었다가 토하면 다른 한 마리의 용이 입을 벌려

서 그것을 받아서 아래로 뿜도록 만들었다. 또 분석으로 동이[盆]를 

만들었는데 기교를 한껏 다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상에게 바친 일이 있었는데, 열이 감사가 되어 그 뒤를 

따라 행한 것이다.】’”

49

K : “뺷황화집뺸을 인출할 적에 가감하고 개정하는 일은 대제학에게【김안

로임.】 질정하여 하라. 두 사신에게 큰 벼루와 작은 벼루를 각각 하나

씩 주고서 천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벼루는 돌아가면 세 각로(閣老)에

게 주려고 한다기에 각각 세 개씩을 준 것이다.” 하였다. 정사룡이 아

뢰기를, “천사가 신에게 ‘우리가 이곳에 나올 때에 고관들이 그대 나

49

뺷명종실록뺸 18년 계해(1563) 10월 26일(신미)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벼루를 바치다.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35

라의 영롱연(玲瓏硯)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더 구하여 돌아가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한다.’고 하기에, 신이 평안도 관찰사【이

귀령(李龜齡)】에게 물어보니 ‘도내에 마침 저장해 놓은 벼루가 있다.’ 

하므로 신이 얻어서 주었습니다. 그 뒤에 천사가 또 집에서 쓸 벼루

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신이 천사에게 사은사가 갈 적에 부쳐 주겠

다고 약속했습니다.”

50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에 “자연석(紫硯石)은 평안도 선천군의 동쪽에 

있는 다미리(多米里)에서 나온다.”

51라고 하였고,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은 “선성의 자주 벼루는 동방의 귀몰(宣城紫硯東方奇), 녹석보다 훨씬 나

아 멋지고 윤기 있네.(大勝綠石舍風漪) 문방에 하루도 없을 수 없는 

물건(文房不可一日無), 옥덕과 금성이 나의 평생 스승(玉德金聲我所師)”

52

이라고 평안도 선천 자석연을 평가하였다.  박상(朴祥,  1474∼1530)도 

「선천자석연가(宣川紫石硯歌)」에서 다음과 같이 선천 자석연을 품평하

였다.

L : “선성의 석공이 곤오도를 쥐고, 밤에 만장벽옥 들어가네.

지하에는 은은한 물방울 소리, 천년의 붉은 용간을 깎아낸다. 

50

뺷중종실록뺸 32년 정유(1537) 4월 30일(무인) 반송사 정사룡이 복명하여 천사들의 행
적을 아뢰다. 

51

李荇, 

뺷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뺸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선천군(宣川郡).

52

金宗直, 

뺷동문선(東文選)뺸, 속동문선 제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사악이 바로 전에 의주

에서 와서 선천 돌벼루를 겸선에게 주려고 하거늘 내가 앗아가지고 시로써 겸선에게 
사례하다[士讍新自義州來以宣川石硯將贈兼善兼善予奪得之詩以射兼善].    


background image

 제30호

36

용은 단사 고기를 많이 먹어, 성혈이 싱싱하고 단단하네.

칼로 새기니 하늘이 놀라고, 허공에 열 지어 떨어지는 별들 어지럽네.

바람에 이는 물결 가을빛 머금었고, 물 솟는 천안이 넓어 천지가 보

배네.

옥 같은 위수(渭水) 정채를 더하고, 빗긴 대유령(大庾嶺)에 봄 오는 소

식이네 

금성과 옥덕은 군자와 짝이 되고, 육정은 용만진을 넘어가려 하네. 

용만 장군이 검을 뽑으니, 자색의 기운이 허공에 벼락같이 진동하네.

용뇌향 향수에 수없이 씻어내니, 옥로에 은 두꺼비 나오네.

봄 향기 소나무 사향내에 그윽한 구름 피어나고, 압록강의 낮 어스름 

침침하구나.

장군이 겁을 먹고 괴물인가 의심하여, 만리 밖 나에게 보냈네. 

봉산거사는 두 번 절하고 받으니, 가치는 수천 금에 달하네. 

동작연(銅雀硯)도 홀연 무색해지고, 넓게 깎은 공연(孔硯)과 값을 다

투네. 

호하고 입김 불어 마르기를 기다려보니, 재질이 완벽하여 가벼운 것

들과 비교할 수 없네.”

53

53

朴祥, 

뺷訥齋先生集뺸 卷第二, 七言古詩. 「宣川紫石硯歌」 “宣城石工手握昆吾刀, 夜沒萬丈碧玉寒. 

隱隱如聞地下哭, 刳出千年赤龍肝. 龍饞饞食丹砂肉, 腥血未醨頑復頑. 磨刀琢削天爲驚, 排空列星
落斑斑. 風漪瑟瑟含秋色, 泉眼納納天池寬. 琅玕渭骨補精彩, 交帶大庾春前信. 金聲玉德配君子, 六
丁將過龍灣鎭. 龍灣將軍拔劍奪, 紫氣漫空霹靂震. 婆律香水百過洗, 玉露曉瀉銀蟾蜍. 春薰松麝玄
雲起, 鴨江晝昏無日車. 將軍生怯疑怪物, 什襲萬里遙示余. 鳳山居士再拜受, 珍重不下金錯刀. 銅雀
斷瓦忽無顏, 寬刓孔硯猶爭高. 呼爲唾面待乾客, 遲鈍不數輕銳曹.”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37

이행은 “자연석(紫硯石)이 평창 미탄현(味呑峴)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가장 좋다.”

54하고, “자석(紫石)이 안동 독천(禿川)에서 나오는데, 벼루

를 만들 수 있다.”

55고 하였다. 그리고 곽산자석은 자연석(紫硯石)이 선

사포(宣沙浦)에서 난다.

56 “곽산관(郭山館)에 닿아 점심을 먹었다. 이 고

을은 벼루가 나는 곳이라, 관가에서 목갑(木匣)과 작은 벼루 하나씩을 

바쳤는데, 이는 전례에 따른 것이다.”

57라 하여 연행 길에 벼루를 갖

추어 선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산자석연으로 알려진 진천의 작천석연(鵲川石硯, 작천은 백두대간 한

남금북정맥 충북 음성군 마이산 남쪽과 동쪽의 괴산군 청안면에서 금북정맥 진천군

의 이월면 대문령(일명 천문령))

이 있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진천

두타산자석연(鎭川頭陀山紫石硯)>의 시

58가 있어 당시에도 진천자석연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천의 연석은 “전형적인 쇄설퇴적암조직

(fragmental  texture)

을  나타낸다.  주된  쇄설성  퇴적물입자의  구성은 

40~50%

의 석영, 20% 내외의 장석, 8% 내외의 흑운모로 되어있다. 

5% 

내외의 방해석을 함유한다. 백악기 퇴적암 류인 중부초평군층에 

분포하는 적색 셰일”

59이라고 한다.

54

李荇 

외, 1528,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 卷四十六 > 江原道 > 平昌郡.  

55

李荇 

외, 앞의 책, 卷二十四 >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56

李荇 

외, 앞의 책, 권53, 평안도(平安道) 곽산군(郭山郡). 

57

金正中, 

뺷燕行錄뺸, [十一月] ⓒ (한국고전번역원, 정연탁 역, 1976).

58

李裕元, 

뺷임하필기(林下筆記)뺸 제34권,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 동방(東方)의 옛 기물

(

器物) “

듣기로 옛날 한생(한석봉)이 진천의 돌을 얻어서(聞昔韓生得鎭石), 그것을 가지

고 궁중으로 들어왔다.(一拳携入紫宸中) 임금이 감별하여 손수 제품을 하니(重瞳鑑別親
題品) 

성가가 어느새 해동에서 제일 간다네(聲價居然冠海東)” 

59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3~205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38

단양연석의 광물성분은 “주로 적색셰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적

색셰일 중에는 흔히 실트크기의 석영입자와 점토 및 유기물의 교호로 

인한 엽층이 발달한다. 주 구성광물은 아각 내지 각상의 석영, 방해

석, 유기물, 운모질 점토광물이고 부성분으로 장석류, 흑운모, 불투명

광물로 되어있다. ~ 고생대 평안누층군 홍점통 내지는 만항층 내 자

색셰일”

60이라고 한다.

(1) 

위원자석

위원의 녹자석은 두꺼운 자석층과 얇은 녹석이 층을 이룬 층석이

라서 아름다운 조각품이 많다. 성해응의 뺷연경재전집뺸, 「연보」 “위원

석이 푸른 것은 흡주석과 같고, 붉은 것은 단계연 같으나 문양이 약간 

거칠다. 좋은 품질은 항상 물속에 있어 많은 인력을 사용해야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위원과 종성자석연에 대한 기록으로 이규경은 “위

원 벼루도 역시 화초석이 있다.”

61라고 하였고, 이인행(李仁行, 1758~1833)

도 “위강의 석연재가 가장 좋다. 오래 물속에 잠긴 것은 단단하고 윤

기가 있으며 물을 적셔도 쉽게 마르지 않는다.”

62고 하였다.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뺸에서 “위원의 연석도 화초석이다.”63라고 하였다.

60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2~205쪽.  

61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鍾城紫硏石烏硏石品佳 而其中鵝卵石出五龍川品冠 東硏爲硏 渭源硏石 亦有花草”

62

李仁行, 

뺷新野先生文集뺸, 卷之十二, 西遷錄(上).“渭江石硯材最良. 以其沈水多年, 堅且潤, 滴水

不易乾也.”

63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渭源硏石 亦有花草”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39

조선시대 초기에는 위원녹자석연이 유명하였다. 위원녹자석은 녹

석과 자석이 층으로 이루어진 석재로 평안북도 위원군 고성동(일명 암

성곡) 

강물 속에서 채취되는 돌이다. 그래서 홍수 직후 연석의 채취로 

인명피해가 커서 연석 채취를 금지할 정도였다. 다음 기록을 보면 연

석채취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M : “벼루 대ㆍ중ㆍ소 각각 10개씩을 평안도로 하여금 제조하여 올려 보

내게 하유하셨습니다만, 평안 일로(一路)는 두 번이나 중국 사신 행차

를 겪었으므로 피폐가 극도에 이르는 데다가, 이제 또 가뭄이 들어 백

성들이 모두 흩어졌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세금을 

감면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긴급한 일이 아닌 소소한 일은 일체 거행

하지 말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해야 됩니다. 더구나 벼룻돌

은 바닷가에서 나는 것이므로 물속에서 이를 채취하자면 조수(潮水)

가 빠져 물이 얕아지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일하기가 매우 어렵

습니다. 기근에 시달린 백성들을 징발하여 그만두어도 될 일을 시키

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것이니,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였

다. “벼루는 내가 긴급히 쓸 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조

사(朝士)가 간혹 요구해 오는 경우에 응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 올

리라고 하유했었다. 그러나 민폐가 있다면 정지시키라.”

64

64

뺷중종실록뺸 91권, 중종 34년 6월 8일 갑진 2번째 기사 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사헌부가 대내에서 쓰는 물품에 대해 모두 승전을 받들게 할 것을 건의하다.


background image

 제30호

40

N : “위원연석(硯石)은 푸르기가 흡주석과 비슷하지만 붉은 것은 단계석

과 유사하다. 그러나 결이 다소 거칠다. 좋은 돌은 늘 물속에 있는데 

많은 사람을 동원해야 얻을 수 있다.”

65

 

O : “내가 일찍이 위원자석을 얻어 국수(國手) 신경록(申敬祿)에게 부탁

하여 위원자석(渭原紫石)으로 쌍이연(뿔이 없는 용 두 마리를 새긴 

벼루)을 만들었다. 이에 기록하길 ‘물이 마르지 않고, 발묵이 진하

며, 필봉을 보호한다.”

66 

중종에게 하사받은 벼루로 전하는 김구(金絿, 1488~1534)가 사용하던 벼

루와, 이황(李滉, 1501~1570), 권응수(權應銖, 1546년~1608),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이 사용하던 벼루도 모두 위원녹

자석연이다. 위원연은 두꺼운 자석층과 얇은 녹석이 층을 이룬 녹자

석의 층석이라서 뛰어난 조각품이 많다. 그러나 은사가 적고 활석이 

많아 먹이 잘 갈리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 위원, 선천, 곽산, 용천, 종

성지역의 연석산지에서 제작되는 뛰어난 조각은 임진왜란 전 까지는 

명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름답고 조각법이 까다로운 품

격이 높은 운룡연(雲龍硯)ㆍ포도연(葡萄硯)ㆍ매죽연(梅竹硯) 등이 조각된 

일월연은 위원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조각들이다. 이런 조각의 문양

65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卷之十二, 文○雜著 硯譜 “渭原石。 靑者似歙石。 紅者似端石。 然紋理

少麤

。 佳品常在積水中。 用人力甚衆乃可得。”

66

成海應, 

앞의 책, 卷之十五, 文○銘 雙螭硯銘 “余嘗得渭原紫石。 托國手申敬祿者製雙螭硯。 銘

。 水不耗。 發墨濃。 利筆鋒。”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41

과 조각기법의 전통은 벼루장에게 전승된 전통적인 조각법들이다.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운룡연(雲龍硯)ㆍ포도연(葡萄硯)ㆍ매죽연(梅竹硯) 

8

매(枚)를 바쳤다.”

67라고 하여 조각이 우수한 벼루로 생각된다. 

(2)

 안동자석

안동의 자석으로 마간석이 유명하다.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은 

뺷낙전당집뺸에서 “안동의 마간석(馬肝石)이 좋기는 하지만 진품은 얻기 

어렵고, 수침석(水沈石)은 얻더라도 흠이 많은데, 붉은색이 제법 아름

답다. 고원의 몇 가지 품종은 먹빛이 화려하지만 구룡산(九龍山)에서 

나는 것이 아니면 물이 쉽게 마른다.”

68라고 품평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

도 “안동(安東)과 남포(藍浦)에서 벼룻돌이 생산되는데, 안동

에서 나는 돌은 빛은 붉어도 품질이 나쁘고 남포에서 나는 돌은 푸르

스름하면서 검은 빛깔로 되었으나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소중히 여긴

다. 그러나 모두 문채가 없고 또는 바윗돌로 만든 벼루는 구덩이 속의 

돌을 캐서 만든 벼루보다 윤기도 없고 먹도 잘 갈리지 않는다. 어떤 

67

뺷명종실록뺸, 18년 계해(1563) 10월 26일(신미),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벼루를 바치
다. 【사적으로 바친 것이다. 전에 이양이 평안 감사였을 적에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벼
루를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하게 조각을 하였다. 또 성천(成川)의 분석(粉石)을 취해다
가 필가산(筆假山)을 만들어 거기에다 산천(山川)ㆍ임수(林籔)ㆍ사사(寺舍) 따위를 새
기고 또 용 두 마리를 산 위에다 새겼는데 산 끝에다 물을 대면 한 마리의 용이 물을 
머금었다가 토하면 다른 한 마리의 용이 입을 벌려서 그것을 받아서 아래로 뿜도록 만
들었다. 또 분석으로 동이[盆]을 만들었는데 기교를 한껏 다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것들을 상에게 바친 일이 있었는데, 열이 감사가 되어 그 뒤를 따
라 행한 것이다.】 

68

申翊聖, 1682, 

뺷樂全堂集뺸 卷九, 尺牘 寄晉、龜兩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외 역, 2016).


background image

 제30호

42

이는 “물속에 넣어 두었다가 오랜 후에 내어 쓰면 나쁘던 벼루가 좋

아진다.”고 하니, 물성이 상반되는 것이 이와 같다.”

69고 하였다. 성해

응(1760~1839)의 뺷연경재전집뺸, 「연보」 “안동 마간석은 품질이 낮아 비

록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연석이 미치지 못한다.”고 품평하고, 

이규경(李圭景, 1788~사망일 미상)도 뺷오주연문장전산고뺸에서 “안동 구룡

산 수침석인 마간석이 남포석 다음이고, 고령석은 약간 꺼끄럽고 거

칠어 광택이 없다.”

70고 하여 연석의 품평이 서로 다르다. 이는 같은 

지역의 연석이라도 석질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벼루가 귀

하여 안동 자석연의 공납은 다음 기록과 같이 여전하였다. 

P : “중국에서 황태자를 봉한다는 조서(詔書)를 받든 사신이 왔을 때, 자

석연(紫石硯) 백 개를 안동부에 징수하였다. 크기는 한 자〔尺〕에 

맞추라고 하였는데, 자석연은 깊은 시냇물 밑에 있는 것이라 채취

할 때의 고통이 조섭(朝涉)보다 심하였다. 화보는 자기 몸이 얼어붙

는 듯이 백성들이 불쌍해서 임의적으로 자석연을 마련하여 진상하

였다.”

71

(3) 정선, 평창자석

정선의 연석 산지는 자석과 오석이 함께 산출된다. 정선에서는 “푸

69

李瀷, 

뺷星湖先生僿說뺸 卷之五, 萬物門 鴝鵒眼 ⓒ (한국고전번역원, 김철희 역, 1976).

70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安東九龍山水沈馬肝石爲次 高靈硏石微澁枯淡無光氣”

71

裵龍吉, 1855, 

뺷琴易堂集뺸 卷四 > 序 ⓒ (한국국학진흥원, 최원진 역, 2013.)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43

른 돌(靑石)이 군(郡) 서쪽 20리쯤 되는 벽파산골(碧波山洞)에서 나며, 벼

루를 만든다.”

72 하고, 평창에서는 “붉은 돌(紫石)이 군(郡)의 동쪽 18리 

북곡리(北谷里)의 동구 도주(道周)  남향봉(南向峯)에서 난다.”

73  하였다. 

성해응의 뺷연경재전집뺸, 「연보」 “평창의 자석연은 자못 아름답다. 역

시 화초문이 있다.”라고 하고, 이규경도 이를 따랐다.

74 정선과 평창

이 같은 연석광맥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초 조정에 만들어 보낸 자석연은 정선연이었다. “승정원에서 

교지를 받들어 강원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여 자석연(紫石硯, 紫硯)을 

진상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중국 조정에 진헌하려고 함이었

다.”

75하여, 세종 때 명나라, 일본, 유구국의 사신들에게 선물하였던 

자석연이 정선자석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정선은 오석과 자석이 함

께 산출되는 곳이다. 

조선 초 사행들에게 선물한 벼루는 자석연이 대부분 사용되었다. 

명종 대에도 “명나라 사대부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대유둔(大油芚)과 인삼(人蔘)ㆍ자문지(咨文紙)ㆍ벼루 등을 좋아한다고 합

니다.”

76라고 하여 자석연을 선물한 기록77은 매우 많다. 성해응은 

72

뺷세종실록뺸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정선군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
부, 정선군

73

뺷세종실록뺸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평창군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
부, 평창군

74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平昌紫硏石頗佳 亦有花草紋”

75

뺷단종실록뺸 14권, 단종 3년 윤6월 2일 병오 1번째 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강
원도 관찰사에게 중국 조정에 진헌할 자석연을 진상하게 하다.

76

뺷명종실록뺸 29권, 명종 18년 12월 13일 정사 1번째 기사 1563년 명 가정(嘉靖) 42년, 
예조에서 종계 개정에 힘쓴 예부 상서에 대한 보답을 아뢰다.


background image

 제30호

44

고령석은 약간 껄끄러우나 다만 푸석거려 윤기가 없다. 평창, 종성 

아란석 등은 오룡천에서 나는데 우리나라 벼루의 으뜸이다. 갑산, 무

산돌은 아름답다.”

78라고 하였다. 

정선 연석의 광물성분은 “주로 암회색셰일로 구성되어 있다. 주 구

성광물은 미립의 아각내지 각상의 석영, 장석류, 흑운모 등으로 구성

되며, 부성분으로 점토광물, 탄질물, 황철석, 불투명광물로 되어있다. 

고생대 평안누층군 홍점통 내지는 만항층 내 자색 셰일”

79이라고 

한다. 

(4)

 종성자석

종성에서는 자석과 오석이 함께 산출된다. 함북 종성, 갑산, 무산 

등과 평안북도 용천, 선천, 곽산 등은 같은 지맥으로 자석이 산출되었

다. 이규경은 “종성 자석연석이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아란석이 오룡

77

뺷세조실록뺸 33권, 세조 10년 5월 27일 기묘 1번째 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명나라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고 청소 저사 등의 물품을 주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을 시켜 명 사신 김식 등에게 유연묵(油煙墨) 각각 25자루, 자석연 주칠
압필 적옥구(紫石硯朱漆匣筆赤玉具) 각각 1벌, 삽필묵 청석연(揷筆墨靑石硯) 각각 1벌, 
화족자(畫簇子) 각각 4쌍(雙), 자문지(咨文紙) 각각 1권(卷), 책지(冊紙) 각각 50권
(

卷), 

법첩(法帖) 각각 6부(部), 도자(刀子) 각각 1부(部), 흑세 마포 단령(黑細麻布團領) 

각각 하나, 백세 저포 철릭(白貰苧布帖裏) 각각 1부(部), 흑세 마포 철릭(黑細馬布帖裏) 
각각 하나, 백저포 한철릭(白苧布汗帖裏) 각각 하나를 주었다.”

78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卷之十二, 文○雜著 硯譜 “高靈石微澁。 但枯淡無光氣。 平昌紫石頗佳。 

亦有花草紋

。 豊川靑石甚硬。 理且麤如瓦硏。 安東馬肝石最劣。 雖其佳材。 不及他産。鍾城

鵝卵石

。 産於五龍川。 品冠東硯。 甲山茂山石亦佳。 淸人論硯材。 稱混同江松花石甚佳。 混

同江源出長白山

。 一名松阿里江。 松阿里者。 漢語天漢也。 江畔砥石山多産石。 綠色瑩潤細

。 品埒端歙。 吉林人取以充貢。 鍾城與甲山茂山隣混同江派。 硏材故多佳品。”

79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3~205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45

천에서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최고품이다.”

80라고 하였다. 

Q : “청나라사람이 벼루 돌에 대하여 말하길 혼동강에서 산출되는 송화

석이 매우 아름답다. 혼동강은 백두산에서 근원하는데 일명 송아리

강이라고도 한다. 송아리는 중국말로 천한이라고 한다. 강가에서 돌

이 나오는데 녹색의 윤기가 나고 결이 섬세하다. 품질이 단계연이나 

흡주연과 같다. 길림사람들은 이 돌을 채취하여 공물에 충당하였다. 

종성과 갑산, 무산 등은 혼동강의 지맥이다. 연재로써 모두 좋은 품

질이다.”

81

조근(趙根, 1631~1690)은 뺷손암집뺸에서 “수주(愁州, 종성) 부사 윤지선이 

마간석 벼루를 주어 시로 답례하다.”

82라는 시를 통하여 종성 자석연

의 유통을 알 수 있다. 종성 자석연은 벼루의 수가 적어 남포연만큼 

크게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80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鍾城紫硯石烏硯石品佳 而中鵝卵石出五龍川品冠東硯爲硯”

81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卷之十二, 文○雜著 硯譜, “高靈石微澁。 但枯淡無光氣。 平昌紫石頗

。 亦有花草紋。 豊川靑石甚硬。 理且麤如瓦硏。 安東馬肝石最劣。 雖其佳材。 不及他産。 

鍾城鵝卵石

。  産於五龍川。  品冠東硯。  甲山茂山石亦佳。  淸人論硯材。  稱混同江松花石甚

。 混同江源出長白山。 一名松阿里江。 松阿里者。 漢語天漢也。 江畔砥石山多産石。 綠色

瑩潤細膩

。 品埒端歙。 吉林人取以充貢。 鍾城與甲山茂山隣混同江派。 硏材故多佳品。”

82

趙根, 

뺷損庵集뺸 卷之八 詩. <愁州伯尹仲麟趾善贈馬肝石硯以詩謝之> “無田食硯我生憐, 奇禍如今

豈偶然. 擬與虛中交永絶, 相逢塞上意還鮮. 偏宜註易龍門下, 正合題騷楚 澤邊. 仍憶鑾坡揮翰日, 
靑綾不復共君眠.”


background image

 제30호

46

3. 녹석산지 

녹자석산지는 위원과 송화강 유역이 있고, 평양 대동강, 해주, 공주 

계룡산, 장수, 강진, 언양 등에서 산출되는 녹석이 있다. 

(1) 해주녹석

해주의 녹석은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에서 “장연의 장산곶 

아랑포 여러 곳의 해변과 해저에서 오석과 창석이 나오는데 금선이 

문양을 이루었다. 물속에 있는 것이 좋다.”

83고하여 녹석과 오석이 같

이 산출됨을 알 수 있다. 이규경의 지적과 같이 해주녹석은 층을 이룬 

하얀 층의 줄무늬가 특징이다.

(2)

 언양녹석

언양녹석은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변에 <연로개수비(硯路改修

, 1655)>

가 있고, 도로명이 ‘硯路’와 ‘硯路改修記’라는 기록

84으로 보

아 녹석연 산지임을 알 수 있었다. 언양녹석 산지에서는 자석과 함께 

산출된다. 태화강 사연댐(洗硯댐)에 수몰된 동네가 사연동(洗硯洞)으로 

벼루를 만들던 동네라고 벼루장 유길훈은 고증하였다. 

83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硯材辨證說」, 人事篇, 器用類, 文具, 고전간행회, 1959, 
132

쪽. “長淵長山串阿郞浦諸處, 海浦及海底出烏倉硏石. 金線紋成物象而得水沈者乃佳.(海澨巖

上有古人所鑿池. 凹心硏者十餘座, 佳品.)”

84

「彦陽硯路改修記」 “順治十二年乙未年二月十八日硯路改修工事 施主 性今, □□, 金□□, 兪□
□, 朴命卜, 位 化主□□人, □□ 石手方北□”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47

<그림 16>

 <조선위원녹자석일월매죽연>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17>

 <조선상산자석민연> 

경희대학교 소장.

<그림 18>

 <조선위원녹자석일월용문연> 

권응수벼루.

<그림 19>

 <고려자석민연> 

대구대학교 소장.

<그림 20>

 <고려자석민연> 경북 구미 출토, 

계명대학교 소장.

<그림 21>

 <조선고령자석연> 

경희대학교 소장.

<그림 22>

 <평북용천자석연> 김영복 제작, 

개인 소장.

<그림 23>

 <함북종성자석연> 

단국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림 24>

 <조선종성자석초엽문연> 

단국대학교 소장.

<그림 25>

 <조선안동자석초엽문채연> 

단국대학교 소장.


background image

 제30호

48

<그림 26>

 <송화강녹석운룡문연>

<그림 27>

 <대동강녹석산수명문연> 

<그림 28>

 <언양녹석하엽연> 유길훈 제작.

<그림 29>

 <해주녹석경회루문연>

언양 연석의 광물성분은 “주 구성광물은 석영, 사장석으로, 등립상

조직(granoblastic texture)을 가지는 석영장석질 호온펠스(quart feldspartic 

hornfels)

로 대상구조(banded structure)를 나타내며, 다소 신장된 규질대

와 녹렴석으로 된 유색광물대가 호상구조로 발달한다. ~ 경상분지 

퇴적층인 진동층 내 분포하는 호온펠스(회색셰일)”

85이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연석재료로 사용되어온 오석과 자석, 녹석 등의 산지

를 살펴보았다. 가장 널리 이용된 연석은 남포 오석이다. 자석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남포오석에 비하여 석영질이 적게 포함되어 벼루의 기

85

이현주, 앞의 논문, 2020, 192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49

능면에서 남포의 오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자석과 녹석은 돌

의 색깔이 아름다워 조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조각으로는 위원녹자석이 유명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민생이 피폐

하여짐에 따라 문방제구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석연(石硯)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상의원에서 도자기로 관요에서 사연(沙硯)

을 만들어 행정기관에 보급하여 사용하였다. “유백증이 상의원 관원

이 전하는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전부터 여러 곳에서 쓰는 사연(沙

)

은 으레 사옹원에서 구워 만들어 수송하였고, 그러면 본원에서 지

급받아 쓸 수 있었습니다.”

86라고 한 예는 이를 대변하는 예이다. 사

연(沙硯)은 도연(陶硯)

87이라고도 하였다.

IV. 벼루장

벼루는 관료(官僚)의 필수품이며, 선비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명

품연의 수장과 애호는 특별했다. 과연 명품연은 누구의 손에서 나왔

는가. 벼루는 각 지역마다 산지가 있고, 산지에서 장인들에 의해 제작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손재주 있는 선비들의 손에

86

뺷인조실록뺸 7년 기사(1629, 숭정) 3월 21일(정축) <맑음 각처에서 쓰는 사연은 내자
시 등에 있는 사연으로 대신 쓰게 할 것을 청하는 상의원 제조의 계>.

87

이민서, 뺷西河集뺸 “詠陶硯贈松磵 兼示史院諸公”.


background image

 제30호

50

서도 품격이 높은 명연이 만들어졌다. 직업적인 벼루장은 ‘연석장(硯石

)’

88, ‘연장(硯匠)’89 등으로 불렸다. 연장(硯匠)은 옥장(玉匠), 와장(瓦匠) 

등과 함께 상의원(尙衣院)에 속해 있었다. 역사적으로 벼루장의 계보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시대적으로 벼루를 잘 만들었던 장인들의 

기록이 간간이 전하는 정도이다. 

조선 초기 문예부흥시기인 세종부터 성종시대에는 자석연이 유행

하였다. 특히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위원녹자석연의 조각이 특별하

였다. 이런 벼루의 전통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전통이 단절되었다. 조선 중후기 숙종부터 정조시대의 문예 부흥기에

는 벼루의 문양과 조각이 다양하게 발전하여 벼루의 전성시대를 열

었다. 이러한 벼루의 문양과 조각이 다양하게 발전한 데는 조선 후기

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석치(石痴) 정철조(鄭喆祚, 1730~1781)와 김도산(金

道山

, 18세기 중기~19세기 초기),

90 주계(朱桂)91 등이 있으며 그 후, 방효량(方孝

,  1700년 중반~1823),

92 신경록(申慶祿, 1779~1841), 채정묵(蔡定默, 1835~1876) 

88

뺷일성록뺸, 정조 13년 기유(1789) 10월 8일(경신).

89

南鶴鳴, 

뺷晦隱集뺸 第五, 雜說 瑣聞 “瓦硯古稱銅雀瓦爲第一。 東方未有此法。 頃年李判府事正英

爲瓦署提調

。 令尙衣院硯匠及玉匠與瓦匠。 同議爲瓦硯。 其法以造瓦土。 三篩極精緻。 無沙石

。 合水成泥如餠。 以手担之。 更以刀刮成硯形。 入置火所陶出之。 則堅於石硯。 刀不得入。 

以錠玉沙斂正而已

。 其重稍不及石。 而堅則過之。 最有墨光。 貯水或至數十餘日而不乾。 初造

十餘

。 而入陶太半窳轉。 僅能用三四。 外舅西河公爲瓦署提調。 更依李判府制命造之。 工手頗熟於前。 

余亦得而用之

。 箇箇堪比石品之好者。 潤墨貯水之功則過之。 比浮石琢造之功。 便易不啻倍簁矣。”

90

뺷일성록뺸, 정조 13년 기유(1789, 건륭) 10월 8일(경신) <천원도감(遷園都監)의 당상
과 낭청 이하에게 모두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연석장(硯石匠) 김도산(金道山)”.

91

李栽, 

뺷밀암집뺸 「창옥연명(蒼玉硯銘)」에 ‘수주(愁州, 종성)’의 주계(朱桂).

92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25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대궐 안의 옛 벼루>, “정묘조(正廟朝)
에 남포석(藍浦石)이 귀하여 방효량(方孝良)으로 하여금 초룡(草龍), 포도 등의 물건을 
새겨 자그마한 벼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마치 천구(天球)나 홍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51

93이 있다. 시대별 벼루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R : “시대별 벼루장의 기록은 16세기 임무적(林無迪), 18세기 정철조(鄭

喆祚

, 1730~1781)와 김도산(金道山, 18세기 중기~19세기 초기), 신경

록(申慶祿,  1779~1841),  19세기 방효량(方孝良,  ?~1823),  평정(平亭) 

채정묵(蔡定默, 1835~1876), 취선(醉仙) 김영수(金榮洙) 등이 시대별 

벼루장으로 확인된다. 벼루의 문양과 조각이 다양하게 발전한 데

는 이들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 정철조의 벼루 제작법은 홍주(홍

성)의 소리(小吏) 김도산에게 전하였다. 그도 원석의 모양을 잘 살

려 조각을 새겼다. 김도산에 대하여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내

가 서울에 살 때 김도산이 벼루를 잘 만들었는데 도산은 홍주의 아

리였다. 누추하여 무능한 차림새였다. 홍주는 남포에서 가깝고 남

포는 벼룻돌의 산지이다. 그래서 벼루 만들기를 좋아하였다. 기술

이 성취된 다음에는 아리를 버리고 서울을 떠돌면서 벼루를 팔아 

먹고살았다.”고 하였다. 1789년(정조 13) 10월 8일(경신) 아버지 사

도세자를 위하여 설치한 「천원도감(遷園都監)」에서 벼루를 만든 연

장이 바로 연석장(硯石匠) 김도산이다. ‘김도산 등 3345인은 첨지중

(

弘璧)

처럼 귀중히 여겼는데, 경신년(1800, 정조24) 이후 민간에 유락(流落)되었다. 

내가 근래에 궁인(宮人)의 족속에게서 그것을 하나 얻었는데, 과연 세상에서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갑(匣)에 넣어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물건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고, 선왕
(

先王)

의 수택(手澤)을 공경하는 까닭이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자 조사(朝士)들

이 앞 다투어 남포석을 찾으면서 ‘도연(陶硯 자기(瓷器)로 만든 벼루에 비할 바가 아니
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남포석이 중국의 흡주(歙州)에서 산출되는 벼룻돌과 비교해 손
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3

손환일, 앞의 책, 2018, 9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52

추부사에 단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김도산의 대표성을 알 수 있

다. 김도산은 남포 연석뿐 아니라 위원 녹자석연을 만들었던 것으로 

전한다. ~ 신경록(申慶祿, 1779~1841)은 홍이원(洪履黿)의 아들 홍운

석(洪雲錫, 1836~?)의 장인이다. 신경록의 벼루 제작과 관련한 기록

을 보면 “신경록은 돈령부리(敦寧府吏)를 지냈다. 벼루를 잘 만들었

는데 조각을 잘하였다. 때로는 중국벼루가 아닌가 할 정도였다. ~ 

방효량(方孝良, ?~1823)은 자가 유능(幼能)이다. 방효량이 남포석으

로 조각하여 벼루를 만든 기록이 전한다. 방효량은 본디 장황(표구)

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방효량의 표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평정(平亭) 채정묵(蔡定默, 1835~1876)은 판서 채홍리(蔡弘履)의 증

손으로 채동석(蔡東奭)의 아들이다. 1865년(고종 2) 을축(乙丑) 식년

시(式年試) 진사 3등 14위(44/150)에 합격한 인물로 형조정랑(刑曹正

)을 지냈다. 그가 제작한 벼루로 한 점이 확인되는 정도이다. 취

선(醉仙) 김영수(金榮洙)가 제작한 벼루가 여러 점 전한다. 김영수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벼루를 제작하였다. 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행적을 알 수 없는 벼루장이 여

러 명 있는데 이규환(李奎煥, 1904년 제작)도 알려지지 않은 벼루장

이다.”

94

벼루는 대부분 연석의 산지별로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벼루는 보령 남포에서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 그래서 전

94

손환일, 앞의 책, 2018, 9~12쪽.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53

국에서 ‘흑칠연갑남포연’이란 말이 회자되는 정도였다. 조선 후기의 

황해도 정철조(鄭喆祚, 1730~1781)와 남포의 신경록(申慶祿, 1779~1841)이 유명

하였다. 신경록(申慶祿, 1779~1841)은 성해응이 국수(國手)

95로 호칭할 정

도로 대표적인 벼루장이였다. 남포에서 활동한 국수 신경록은 증손인 

신철휴(申喆休, 1892~1954)로 전승되었다.

96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보령 남포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 보령 남포벼루의 대부분이 보

령 청라에서 남포연이란 이름으로 제작되었다. 남포벼루의 제작 기술

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 근현대로 이어지

는 다른 산지의 벼루장들은 계보를 알기 어렵다. 다만 남포벼루의 전

통을 이어온 계보만이 전할 뿐이다. 남포의 벼루장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 신경록(申慶祿, 1779~1841)과 일제강점기에 보령 화산동 청라면 향

천리에서  활동한  송병요(1876~1935),  신경록의  증손  신철휴(申喆休, 

1892~1954)

가 대표적이다. 

S : “송병요(1876~1935)의 뒤를 이은 김형수(1880~1948), 신철휴(1892~1954) 

등이 활동하였다.  ~  왕릉 석공의 계보인 이범석(?~?)과 신철휴

(1892~1954)는 본디 석공으로 이수와 귀부조각으로 유명하였던 명

장들이었다.  이범석은 김갑룡(1904~1972)에게,  신철휴(1892~1954)

95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卷之十五, 文○銘 雙螭硯銘 “余嘗得渭原紫石。 托國手申敬祿者製雙螭硯。 

銘曰

。 水不耗。 發墨濃。 利筆鋒。” (뺷고령신씨족보뺸에는 申慶祿, 1779~1841).

96

고령신씨대동보편찬위원회, 뺷고령신씨대동보뺸 권2, 회상사, 2011, 64~66쪽. 신경록 
아들 신홍락(申鴻樂, 1814~1866), 손자 신용구(申容求, 1841~1905) 등인데 이들은 
벼루장의 기록 불명.


background image

 제30호

54

는 아들 신권우(申權雨, 1910~1985)에게 용문과 운문 석각을 전수하

여 벼루에 사용하면서부터 용문을 깊게 새기는 유개연(뚜껑이 있는 

벼루)이 유행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 유진해(1902~1979, 

유학준, 유삼준 부), 김갑룡(1904~1972, 김진한 부), 노장성(盧長星, 

1907~1973, 노재경 부), 조병환(최홍진 스승), 김태갑(최홍진 스승), 

이경직(최홍진 스승), 신권우(申權雨, 1910~1985), 보령의 대천 동대

리 양태형(이창호 친구), 화산리 신구선, 신구섭, 조근행(1950년대), 

조병목(1950년대, 이창호에게 영향), 신병식, 신근식, 신명식 등이 

활동하였고, 근현대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각을 잘한 벼루

장은 김갑룡(1904~1972, 김진한 부), 노장성(盧長星, 1904~1973), 신

권우(申權雨, 1910~1985) 등과 신구선(이창호 친구, 단양자석연 선

구자), 신구섭(김갑룡 제자), 채규석(이창호 친구, 김갑룡 제자), 채

두석(이창호 친구, 김갑룡 제자), 최승태(김갑룡 제자) 등이 뛰어났다. 

1970~1980년대에는 40~50명이 벼루를 전문적으로 제작하였고, 이 

가운데 6명은 광산채굴 업도 병행하였다. 이런 호황은 1980년대까

지 이어졌다. 보령 청라면 향천리 임천골 이강직 (1937-1989)과 이

성직(1941~ ) 형제는 유신벼루 3300여 개를 만드는 공장식 벼루공장

을 창업하여 조각수가 100여 명에 달했다. 이창호(1926~1990, 중요

무형문화재 제94호 벼루장, 1989), 유학준(兪學濬, 1933~2001, 보령공

예사), 신병식(1936~2018), 신근식(申根湜, 1942~ ,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1998), 최홍진(崔洪鎭, 1938~?, 삼성석재공업사), 최덕

환(1942~ , 상산예원), 윤경희(尹慶熹, 1946~?, 동신공업사), 김진한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55

(金鎭漢, 1941~ , 충남무형문화재 제6호, 1988), 안교준(1953~?, 성남

공예사), 신명식(1954~ , 충북무형문화재 제18호, 영춘공예사) 등이 

벼루장으로 활동하였다. 남포의 많은 벼루장들이 진폐증으로 세상

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40년 이상 벼루제작에 전념하고 있는 벼루

장들이다. 그 외에도 이용국(작고, 보령 벼루), 민흥기, 진종완, 강길

호, 강명호 형제와 장현순, 최현식 등의 벼루장이 보령에서 활동하

였고, 1980년대에는 50여 명의 벼루장이 활동할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였다.”

9798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역할은 삼대 계보에 의하여 전승되

었다. 신경록(申慶祿, 1779~1841)과 증손 신철휴(申喆休, 1892~1954)의 계보는 

아들 신권우(申權雨, 1910~1985)에게 전승되어 신병식(1939~2017, 신권우 2남), 신

근식(1942~ , 신권우 3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신명식(1954~ , 신권

우 4남, 충청북도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 

등 삼형제, 신명식의 아들 신재

민(신민호, 1977~ )의 5대계보로 전승되었다.

99 김형수(1880~1948)와 김갑

룡(1904~1972), 김진한(金鎭漢, 1941~ , 충남무형문화재 제6호, 1987) 3대 계보, 

노장성(盧長星, 1904~1973)과 노두성(1907~ ) 형제의 계보는 노장성 아들 

노재경(1959~ )의 2대 계보가 전승되고 있다. 

97

손환일, 앞의 책, 2018, 12~15쪽.

98

벼루장 김진한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신근식 구술자료(여주, 2018. 7), 신
명식 구술자료(단양, 2018. 7), 벼루장 노재경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유길
훈 구술자료(언양, 2018. 3), 벼루장 김유제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이성직 
구술자료(서울, 2018. 7) 등을 참고하여 정리.

99

고령신씨대동보편찬위원회, 뺷고령신씨대동보뺸 권2, 2011, 회상사, 254~255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56

현대의 남포연은 이창호(1926~1990, 중요무형문화재 제94호 벼루장, 1989)

와 김진한(金鎭漢, 1941~ , 충남무형문화재 제6호, 1987)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명연(明硯)의 조건은 석질과 조각의 품격이다. 이창호는 전문적인 

화가의 안목으로 벼루를 제작하여 조각과 문양의 품격을 높였고, 김

진한(1941~ )은 벼루의 첫째 조건인 최고의 석질을 알아보는 혜안을 갖

고 명연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김진한은 조부로부터 벼루를 제작하여 

근현대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하면서 벼루의 용도에 따른 양식과 조

각과 문양의 변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 벼루의 전통인 남

포 오석연은 이상의 계보를 중심으로 전승되어졌으며, 청라면 의평 3

리 추진위원장 김재철이 정리한 역대 남포 벼루장 명단

100이 있어 참

고된다.

종성에서 활동한 벼루장 주계(朱桂),  김영수(金榮洙),  피성구(皮性九), 

평북 용암포 용천산업에서 활동한 김영복(金永福) 등이 활동하였고, 평

북 용천에서는 일제강점기 벼루장 김영복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이다. 이들 기록은 벼루의 조성기에 의한 것이다. 

진천의 상산자석연의 제작도 역사가 깊다. 1960년대 10여 명이었

100

역대 남포 벼루장 [근대 벼루장]: 김갑룡, 노장성, 노두성, 유진해, 유학준, 민병훈, 김
인수, 최종호, 채학석, 채호석, 이종학, 김승남, 이정수, 이영수, 채수현, 채수돈, 채상
배, 최창식, 최종석, 최종수, 차상선, 차상룡, 채규석, 채형석, 송흥재, 이성의, 이영수, 
윤두순, 김종원, 채중석, 채갑식, 이두영, 윤승준, 이종기 [현대 벼루장]: 기능보유자 
김진한(남포벼루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6호) 기능이수자 원창재, 이영식, 최상기, 노
재경, 권태만 [역대 벼루장]: 김한성, 김종호, 진창규, 이용도, 채수길, 이용태, 채수영, 
채수훈, 채수용, 송경보, 유삼준, 이용택, 채수국, 채수생, 차영준, 이용국, 장현순, 채수
능, 이창수, 이용덕, 김재성, 최현식, 강선호, 이적원, 김재필, 유옥식, 이경래, 강병갑, 
김종열, 이영회, 김종철, 김종래, 김광해, 민홍기, 조중현, 강병권, 윤정기, 최영식, 나종
만, 장화순, 양진석, 김동빈, 이명호, 진종완, 권태성, 김영태, 김종해, 김상태, 차영환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57

으나 그 명맥이 단절되고 진천의 상산자석연을 이은 벼루장 이규환(李

奎煥

, 1904년 활동), 

황곡(黃谷) 김인수(1908~1972, 진천군 초평면 신통리 황골)가 

타계 후, 최덕환(1942~ )이 진천사람으로 두타산 벼루재(충북 증평군 도안

면 연촌리)

에서 벼루를 제작하고 있다. 뒤를 이어 50여 년간 벼루제작

을 하고 있는 유길훈(1948~ ,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 언양녹석벼루공방)

은 자석연을 제작하던 벼루장이다. 진천 상산자석의 벼루장이었던 유

길훈(1948~ )의 제자 권혁수(1959~ )가 진천 상산자석연의 맥을 잇고 있

다. 이로써 고려시대부터 유명했던 진천 상산자석의 명맥은 권혁수

(1959~ )

가 계승하고 있다.

101 

단양 자석연은 보령 남포에서 활동하던 신근식과 신명식 형제를 

중심으로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삼형제는 남포의 연석이 고갈

되자 연석의 산지를 찾아 단양으로 이사하여 자석벼루를 제작하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성해응이 뺷연경재집뺸에서 국수(國手)로 칭했

던 신경록(申慶祿, 1779~1841)을 계승한 증손 신철휴(1892~1954, 신경록 증

손), 

신권우(申權雨, 1910~1985, 신철휴 아들) 역시 부친 신철휴의 기법과 기

술을 전수받아 평생 벼루제작에 열성을 다 받쳤다.  신권우(申權雨, 

1910~1985,  신철휴 아들) 

아들인 신병식(1939~2017,  신권우 2남),  신근식

(1942~, 신권우 3남,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신명식(1954, 신권우 4남, 

충청북도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 

형제에게 전수되었다. 신명식의 아들 

신재민(신민호, 1977~ )이 현재 단양에서 자석벼루를 만들고 있다. 5대

가 벼루를 만드는 벼루장이다.

102 

101

벼루장 유길훈 구술자료(언양, 2018. 3)


background image

 제30호

58

T : “신철휴(申喆休, 1892~1954)의 기술을 이은 후손들은 신철휴의 아들 

신권우(申權雨,  1910~1985),  손자들인 신병식(1939~2017),  신근식

(1936~ ,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신명식(충청북도무형문화

재 제18호 벼루장) 형제에게 전수되었다. 신철휴(申喆休, 1892~1954) 

역시 보령에서 태어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었으나 

자신이 사용할 벼루를 만들다 가업으로 벼루를 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석각을 배웠다.  벼루를 조각하여 

진상하면서부터 벼루주문이 많아졌고 이때부터 벼루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신철휴의 아들 신권우(申權雨, 1910~1985) 역시 부친 

신철휴의 기법과 기술을 전수받아 평생 벼루제작에 열성을 다 받쳤

다. 신권우(申權雨, 1910~1985)의 아들 신병식(2남, 1939~2017), 신근

식(3남, 1942~ ,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과 신명식(4남, 1952~ ,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 등이 대를 이었다. 신명식의 

아들 신재민(1977~ )이 현재 단양에서 자석벼루를 만드는 일을 하

는 등 5대가 벼루를 만드는 벼루장이다. ~ 벼루는 석질이 제일 중

요하다. 그래서 할아버지 신철휴와 아버지 신권우는 늘 좋은 연

석(硯石)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셋째인 신근식은 스물두 살 때 단

양의 영춘으로 이사해 영춘공예사를 개업했다. 그 후 신병식, 신

근식, 신명식 삼형제가 벼루를 제작하며 전통을 이었으며, 신병식

이 작고하고 현재는 신근식과 신명식 형제가 활동하고 있다. 그

래서 신경록의 계보는 증손 신철휴로 이어졌고, 신철휴 아들 신권

102

벼루장 신근식 구술자료(여주, 2018.7. 2.). 신명식 구술자료(단양, 2018.7. 2.)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59

우(申權雨, 1910~?, 신근식 부)는 신병식(1936~?, 신권우 2남), 신근식

(신권우 3남, 1941~ ,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6호 벼루장), 신명식(신

권우 4남, 1954, 충북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 형제계보로 이어졌

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벼루의 전통인 남포 오석연은 김진한을 중

심으로 전승되어졌으며, 단양 자석연은 보령 남포에서 활동하던 신

병식, 신근식과 신명식 형제를 중심으로 전통이 이어졌다.”

103

녹석연은 2001년에 울주 언양 반구대 일원에서 발견된 녹연석이

다. 벼루장 김인수(1908~1972)의 제자인 벼루장 유길훈(1948~ , 울산광역

시 무형문화재 제6호, 언양녹석벼루공방)

이 언양녹석연의 산지를 찾아 전통

을 계승하고 있다. 반구대주변에 ‘硯路’와 ‘硯路改修記’라는 기록을 

찾아 단절되었던 녹석연의 제작을 계승한 벼루장 유길훈에 의하여 

명맥이 이어졌다. 그리고 장수(長水)의 녹석(綠石)

104은 벼루장 고태봉

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V. 맺음말

벼루는 무엇보다도 석질이 가장 중요하다. 즉 석질에 은사가 많아

야 먹이 잘 갈리고, 은사가 고와야 먹물이 맑다. 그리고 단단해야 먹

103

손환일, 앞의 책, 2018, 15쪽.

104

이규경,뺷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뺸, 권37, 동국문화사, 1962, 132쪽.


background image

 제30호

60

물이 잘 마르지 않는다. 연석에는 오석, 자석, 녹석, 녹자석 등이 있

다. 연석의 대표적인 산지로 오석산지는 남포, 종성 등의 오석이 있

고, 자석산지는 위원, 정선, 진천(상산), 단양, 안동 등이 있으며, 녹석

산지는 송화강, 대동강, 해주, 울주 언양 등이 대표적이다. 

벼루를 만드는 연석에는 은사(銀砂)나 금사(金砂)와 같은 석영질이 섞

여있다. 석영질인 은사가 봉망(鋒芒)을 형성하고 봉망(鋒芒)에 의하여 

먹이 갈리는 것이다. 은사나 금사의 분포형태에 따라 운문(雲紋), 산문

(散紋), 

사문(絲紋) 등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문양에 따라 석란문, 혹은 

아란문(鵝卵紋), 화초문(花草紋) 등으로 분류된다.

벼루의 기능은 처트(Chert)를 구성하는 입자의 크기와 분포와 관련

된 석질의 강도에 달려있다. Chert는 미립질 석영(石英), 이산화규소로 

된 화학적 퇴적암을 의미한다. 화학적 퇴적암에 속하는 Chert는 물속

에 녹아 있던 규질 성분이 침전하여 형성된다. 먹은 이 Chert에 갈리

는 것이며, 조흔색이 흰색은 백운모의 은사이고, 누른빛은 흑운모의 

금사이다. 

역대 벼루장은 조선 말기에 정철조(鄭喆祚, 1730~1781)와 김도산(金道山, 18

세기 중기~19세기 초기), 

주계(朱桂), 신경록(申慶祿, 1779~1841), 방효량(方孝良, 

1700년 중반~1823),

105 채정묵(蔡定默, 1835~1876), 김영수(金榮洙) 등이 벼루를 

105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제25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대궐 안의 옛 벼루 “정묘조(正廟朝)에 
남포석(藍浦石)이 귀하여 방효량(方孝良)으로 하여금 초룡(草龍), 포도 등의 물건을 새
겨 자그마한 벼루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마치 천구(天球)나 홍벽(弘
璧)

처럼 귀중히 여겼는데, 경신년(1800, 정조24) 이후 민간에 유락(流落)되었다. 내가 

근래에 궁인(宮人)의 족속에게서 그것을 하나 얻었는데, 과연 세상에서 보기 드문 물건
이었다. 갑(匣)에 넣어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물건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고, 선왕(先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61

제작하였고, 근현대에는 송병요(1876~1935), 김형수(1880~1948), 신철휴(申

喆休

, 1892~1954), 

유진해(1902~1979), 김갑룡(1904~1972), 노장성(盧長星, 1904~1973), 

노두성, 양태형, 신구선, 신구섭, 조병목 등이 가교역할을 하였다. 현재 활

동하는 벼루장들은 각 지역에 분포하는 연석산지에 따라 남포 오석에 김

진한 등 10여 명, 진천(상산)자석에 권혁수, 단양 자석에 신근식, 신명식, 

언양녹석에 유길훈, 장수녹석은 고태봉 등이 대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王)

의 수택(手澤)을 공경하는 까닭이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가자 조사(朝士)들이 

앞다투어 남포석을 찾으면서 ‘도연(陶硯 자기(瓷器)로 만든 벼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남포석이 중국의 흡주(歙州)에서 산출되는 벼룻돌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ackground image

 제30호

62

참고문헌

사료 및 자료

뺷세종실록뺸
뺷단종실록뺸
뺷세조실록뺸
뺷중종실록뺸
뺷명종실록뺸
뺷인조실록뺸
뺷일성록뺸
뺷여지승람뺸
뺷훈민정음해례본뺸
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뺸
뺷資源總覽뺸 (동력자원연구소, 1985) 
뺷韓國의 地質과 鑛物資源뺸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1982) 

저서 및 논문

고령신씨대동보편찬위원회, 뺷고령신씨대동보뺸, 회상사, 2011.
金正中, 

뺷燕行錄뺸

김정희, 뺷阮堂全集뺸
金宗直, 

뺷속동문선뺸

남구만, 뺷약천집뺸
南鶴鳴, 

뺷晦隱集뺸

柳馨遠, 

뺷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뺸

李荇, 

뺷신증동국여지승람뺸

李荇, 

뺷용재집(容齋集)뺸

朴祥, 

뺷눌재집(訥齋集)뺸

裵龍吉, 

뺷금역당집뺸 제4권

成海應, 

뺷硏經齋全集뺸

손환일, 뺷보령 남포 명연전뺸, 「남포 벼루의 특징」, 보령시, 2018.
______, 

뺷한국의 벼루뺸, 서화미디어, 2010.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63

申翊聖, 

뺷樂全堂集뺸, 1682.  

尹愭, 

뺷무명자집(無名子集)뺸

윤성순, 뺷韓國鑛業誌뺸 (대한중석광업회사, 1952)
이규경, 뺷오주연문장전산고(하)뺸
이남규, 뺷수당집뺸
이민서, 뺷西河集뺸
이유원, 뺷임하필기뺸
이익(李瀷), 뺷星湖先生僿說뺸
이재, 뺷密菴先生文集뺸
이찬희 외, 뺷보령남포벼루제작뺸, 도서출판선인, 2011.
丁若鏞, 

뺷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뺸

趙根, 

뺷損庵集뺸

韓致奫, 

뺷海東繹史뺸 제27권 物産志 2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 뺷交隣須知뺸

이현주, 「울산 반구대 벼룻돌 석질과 벼루장의 특성」, 뺷울산학연구뺸 15호, 울산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2020.

기타자료

벼루장 김유제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김진한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노재경 구술자료(보령, 2018. 3)
벼루장 신근식 구술자료(여주, 2018. 7)
벼루장 신명식 구술자료(단양, 2018. 7)
벼루장 유길훈 구술자료(언양, 2018. 3)
벼루장 이성직 구술자료(서울, 2018. 7)


background image

 제30호

64

Abstract

The Stone Material and the Place of Production of Korean Inkstone 
and the Inkstone Artisan 

Son, Hwanil Seohwa Institute 

In order to make an inkstone, the stone material should satisfy the condition for an 

inkstone. For this reason, the quality of stone is the most important factor. The stone 

containing a lot of silver sand (white sand) makes inksticks easy to be ground; the fine 

silver sand makes clear quality of ink. In addition, solid stone material makes ink not to 

be dried. The stone materials used as an inkstone are blue stone, purple stone, green 

stone and so on. The major regions of stones are following: blue stones from Nampo 

and Jongseong; purple stones from Wiwon near the Amnokgang (Yalu), Jeongseon, 

Jincheon (Sangsan), Danyang and An-dong; green stones from Songhua river area, 

Daedonggang River area, Haeju and Eonyang.

The inkstone-making stone material contains a mixture of chert such as silver sand 

(

銀砂) or gold sand (金砂). Ink sticks were rubbed on this chert. Streak color in white 

means silver sand from muscovite, and oxidized yellow streak color means gold sand 

from biotite. silver sand(chert) form Bongmang (

鋒芒: sharp joint on inkstone surface) 

and it makes ink stick to be ground. According to the distribution form of silver sand or 

gold sand, the ink stones were divided to cloud style (

雲紋), scattered style (散紋), 

thread style (

絲紋) and so on; According to the pattern, the ink stones were divided to 

egg-in-stone (looks like a bird’s egg) pattern, goose-egg pattern, flower pattern and so 

forth. 

There were several famous inkstone artisans such as Kim Dosan, who was following 

Jeong Cheol-jo (

鄭喆祚, 1730~1781) of the late Joseon period; Shin Gyeong-rok (申慶

祿, 1779~1841) of Nampo area, Bang Hyo-rang (方孝良 ?~1823) of unknown area, 

Chae Jeong-muk (

蔡定默, 1835~1876) and Kim Yeong-su (金榮洙) of Jongseong area. 

The representative artisan of modern times was Song Byeong-yo (1876~1935), the 

maker of Nampo inkstone from Boryeong. Following Song Byeong-yo, several artisans 


background image

한국 벼루의 연석(

硯石) 산지(産地)와 벼루장

65

논문 투고일 : 2022.01.24 심사 완료일 : 2022.05.25 게재 확정일 : 2022.05.28

worked, including Kim Hyeong-su (1880~1948), Shin Cheol-hyu (

申喆休, 

1892~1954), Kim Kapryong (1904~1972), No Jang-seong (

盧長星, 1904~1973) & No 

Mu-seong brothers and Shin Gwon-wu (

申權雨, 1910~1985); Kim In-su (1908~1972) 

worked in Jincheon area. Artisans of present day are producing inkstones in the differ-

ent area following the stone material producing-place; at Nampo area, Lee Chang-ho 

(1926~1990), Kim Jinhan (1941~), Won Chang-jae, Yi Yeong-sik, No Jae-gyeong, 

Gwon Tae-man and Jo Jung-yeon; Shin Geun-sik (1942~ ) & Shin Myeong-sik 

(1954~) brothers at Danyang area; Gwon Hyeok-su (1959~) of Jincheon area; Ryu 

Gil-hun (1948~ ) of Eonyang area and Go Taebong (1961~ ) of Jangsu area.

Keyword Inkstone, Inkstone Artisan (硯匠), Conditions of the Inkstone Material, 

Production Area of the Inkstone Material, Characteristics of the Inkstone Material